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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시간 어떻게 단축할 것인가

 

임용현기관지위원장

 


2015년 기준 한국의 연간 노동시간은 2,113시간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가운데 멕시코(2,246시간) 다음으로 긴 노동시간이다. 1953년 제정된 근로기준법에서 법정 노동시간18시간, 148시간으로 규정한 이래, 반 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노동시간 단축은 노동자운동의 주요한 화두였다. 그러나 장기적인 추세로 보더라도 법정 노동시간을 상회하는 장시간 노동의 현실은 크게 변화하지 않았다. 우리는 늘 저녁이 있는 삶을 희구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장시간 노동의 덫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장시간 노동체제는 개인의 삶의 질을 떨어트리고 건강권을 훼손하는 주요인이다. 장시간 노동이 각종 근골격계 질환이나 과로사를 비롯한 산업재해를 유발하는 주된 이유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바이다. 따라서 노동시간 단축은 노동자의 삶과 건강을 회복하기 위한 관건적인 투쟁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노동시간을 둘러싼 자본과 노동의 대립 관계다. 실질적인 노동시간의 변화를 추동할 수 있는 노동자운동의 전략이 부재한 상황에서는 인간적 삶을 위한 노동시간 단축도 요원할 것이다. 단지 노동시간의 길이를 줄여보자는 접근만으로는 이러한 의도와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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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 조절에 나선 정부의 노동시간 단축 방안

새 정부가 들어서고 노동시간 단축 논의도 모처럼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기간에 발표한 10대 공약을 통해 연간 노동시간을 임기 내 1,800시간대로 줄여 50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는데, 그 골자는 다음과 같다. 현행 근로기준법에서는 노동시간을 140시간으로 규정하고 있고, 연장근로를 12시간 이내로 제한, 모두 합해 152시간의 노동을 허용하고 있다. 그동안 정부는 1주일을 5일로 유권해석하여 주말(8시간씩 토, 일 이틀 간 16시간)에 일을 하더라도 근로기준법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평일 최대 노동시간 52시간에 주말 16시간을 더한 168시간이 주당 최대 노동시간으로 정착된 것이다. 정부 계획은 주말 노동시간도 주당 노동시간에 산입하여 1주 최대 52시간으로 노동시간을 단축하겠다는 것이다. 이같은 정부 방침에 따라 대통령 직속 일자리위원회는 주말 16시간 노동도 연장근로에 포함한다고 명시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의 6월 국회 통과를 우선 추진하되, 입법적 해결이 어려우면 고용노동부의 행정해석을 폐기하겠다는 계획이다.

그런데 경영계의 반발이 빗발치자, 일자리위원회는 이내 경영계의 속도 조절요구를 받아들여 보완책을 마련하겠다고 나섰다. 최근 정부가 최저임금 인상안에 대한 경영계의 하소연에 2020년까지 단계적 인상 방안을 내놓은 것과 흡사하다. 이처럼 기업 부담을 의식한 정부 정책은 노동시간 단축 논의에서도 추진시기의 유예, 면책조항 발동 등의 우회로를 터 줄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자본의 노동유연화 전략에 포섭돼선 안 된다

이런 까닭에 노동시간에 대한 노동의 대안적 관점 형성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가령, IMF체제 이후 김대중정부는 일자리 나누기차원에서 노동시간 단축 문제를 접근했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계도 정리해고 중심의 구조조정에 대한 대안으로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를 적극 제기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도래한 당시 상황에서 노동시간 단축은 일자리 나누기보다 노동 유연화기제로 더 강력하게 작동했다. 박근혜정부도 취임 일성으로 2017년까지 연간 근로시간을 1900시간 이하로 단축해 취업자 수를 연평균 0.6% 증가시키겠다는 목표를 제시했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장시간 노동의 해소가 아닌 노동시간의 유연화가 해법으로 등장했고, 그 결과 질 나쁜 시간제일자리의 증대, 야간노동, 탄력적 근로시간제의 확대, 포괄임금제의 광범위한 적용 등 자본에 이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따라서, 법제도적으로 소정노동시간을 얼마나 줄이느냐에만 착목해서는 곤란하다. (벨기에, 캐나다, 프랑스, 네덜란드에서는 파트타이머의 고용비중이 증가하면서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이 단축되기도 했다.) 노동시간 문제의 프레임이 어떻게 노동자들의 내부 격차를 심화하고 단결을 저해하는지 살펴봐야 하는 이유다.

물론, 정부와 자본 역시 장시간노동의 문제를 지적한다. 과다한 노동이 낮은 노동생산성의 주된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진단은 생산성 향상 위주의 노동시간 유연화 정책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이는 노동시간 단축의 전제로 노동강도를 강화하거나 임금을 양보하라는 자본의 요구로 나타난다. 이처럼 자본이 초과노동 강제나 임금체계 개편의 수단으로 노동시간 단축 문제를 활용하려고 할 때, 노동자들은 장시간 노동체제를 벗어나기 위한 근본적인 대안보다 당장 눈앞의 실리를 선택하곤 한다. 그러나 이같은 선택은 자본에 대한 노동의 예속과 분열을 한층 강화할 뿐이다. 자본이 만들어놓은 규칙과 원리를 넘어서, 임금 및 노동조건의 저하 없는 노동시간 단축과 그를 통한 일자리 늘리기를 단호하게 요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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