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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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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 

재벌 정책 2년을 평가한다


김태연┃대표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정권의 주체세력, 정치적 역사, 정책 방향 등 여러 면에서 볼 때 문재인 정권은 노무현 정권을 계승하고 있다. 그래서 문재인 정권이 재벌개혁을 말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바로 ‘노무현 정권의 악몽’이었다. 2002년 대선 때 삼성 재벌은 노무현 후보 캠프의 안희정에게 정치자금 30억 원을 전달했고, 당선 후 노무현 정권은 삼성 재벌과 별도의 인수위를 구성해 삼성이 제출한 국정운영계획서 내용 대부분을 정부 정책으로 반영했다. 진대제, 홍석현 등 삼성맨을 정부에 포진시키고, 정부 고위 관료들을 삼성 인력개발연구원에서 교육받게 했다. 삼성 재벌은 이른바 ‘삼성 장학생’으로 불리는 인사들을 정치, 관료, 법조, 시민사회에 포진시키고 정권과의 유착을 강화했다. 이런 연유로 노무현 정권 때 ‘삼성 공화국’이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때문에 노무현 정권의 적통을 잇는 문재인 정권이 과연 재벌개혁을 할 수 있을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자신을 촛불 항쟁 정부라 칭하고, 촛불 시민의 명령인 국정농단 범죄자 처벌과 적폐 청산을 정부의 최고 과제라고 공언했기 때문에, 근본적인 개혁은 언감생심이지만 시늉 정도는 내지 않을까 했다.


그러나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라던가. 문재인 정권은 집권하자마자 대통령이 앞장서서 삼성 재벌 구하기에 나섰다. 문재인 정권 출범 이후에도 삼성 재벌의 범죄는 연이어 드러났다. 삼성전자서비스에서 조직적인 노조파괴 범죄가 드러났고,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가 치밀한 계획에 의한 범죄임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박근혜와 함께 대법원에서 재판을 받는 국정농단 범죄자 이재용을 대통령이 거듭 만나면서 경제 살리기 주역으로 치켜세우고 있다. 이 정도면 청와대가 대법원에 이재용의 뇌물죄 무죄판결을 압박하는 것과 다름없다. 만약 대법원이 이재용을 석방한 2심 판결에 손을 들어준다면, 재벌과 경제 살리기라는 공동의 이해관계를 축으로 한 문재인 정권판 사법농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성 재벌과 손을 잡은 정권에게 재벌개혁을 기대하는 것은 무망한 일이다. 그래서 문재인 정권의 재벌개혁 공과를 평가할 것이 있을지 의문이다.



재벌체제 옹호를 위해 노동자를 공격


한국 사회는 재벌 대기업을 정점으로 마치 다단계 피라미드와 같은 착취구조에 놓여 있다. 이 피라미드 구조의 최하층이 최저임금과 장시간노동에 내몰린 노동자들이다. 이들 최저임금 노동자들이 모두 재벌 대기업과 직접 고용관계에 있지는 않지만, 최저임금 인상과 장시간노동 단축은 재벌체제 피라미드 구조를 바닥에서부터 뒤흔들 수 있다. 이 때문에 1천 원 남짓한 최저임금 인상과 주 52시간 노동시간 제한에 재벌이 들고일어나는 것이다. 재벌체제의 근간인 저임금·장시간 노동체제를 사수하기 위함이다. 문재인 정권이 최저임금 제도를 개악하고 탄력근로제를 강행하는 것은 재벌체제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손대지 않겠다는 뜻이다.


최저임금 인상을 둘러싼 사회적 논란, 사실은 계급 간 논란이 첨예하게 전개됐다. 최저임금인상이 자영업을 어렵게 해 경제와 고용을 위축시킨다는 주장이 기승을 부렸다. 피라미드 구조의 최상층에 재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저임금 인상 문제를 노동자와 자영업자 간의 대립으로 몰아갔다. 논란의 와중에서도 2018년 30대 재벌 사내유보금은 전년보다 75조 원이나 늘어났다. 그런데도 문재인 정권은 재벌 책임론을 일언반구도 거론하지 않았다. 결국 노동자들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워서 최저임금 인상을 무로 돌리는 개악을 강행하고 있다.



총수 일족의 재벌지배체제 강화


문재인 정권은 출범하면서 총수 일족의 편법적 지배력 강화를 방지하고, 일감 몰아주기 등 불법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러나 정권 출범 2년이 지난 지금, 재벌총수 일족의 편법적 지배력 강화를 방지하기는커녕 총수 일족의 지배가 오히려 강화하고 있다. 지배력 장악을 위해 국정농단 불법을 저지른 이재용과 신동빈이 풀려났고, 공정거래위원회는 그들에게 총수 자격을 부여했다. 재벌총수 일족은 지주회사 제도를 이용해 오히려 지배력을 2배 이상 강화하고 있다. 4대 세습을 한 LG 재벌 구광모는 지주회사 제도를 이용해 지분율을 7%에서 4배가 넘는 32%로 확대했다. 현대중공업, SK 등에서도 총수 일족 지배체제가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자사주의 마법’ 등 편법을 사용하고 있지만, 문재인 정권은 스스로 공약한 ‘편법적 지배력 강화 방지’를 위한 그 어떤 조처도 없이 방관하고 있다.


지주회사 제도가 총수 일족 지배체제를 강화하는 도구임이 드러나는 상황에서, 정부는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 내용은 실소를 자아낼 수준이다. 그동안 기존 정치권과 시민단체도 총수 일족의 독점적 지배를 완화하기 위한 여러 방안을 제출한 바 있다. △자사주 의결권 금지, △증손자회사 설립금지(2단계 지주회사), △자회사·손자회사의 지분요건 100%로 강화, △재벌총수 일족 범죄수익 환수, △범죄를 저지른 총수 일족의 이사 선임 금지와 자격 박탈을 위한 대주주 적격성 심사제 확대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문재인 정권은 이런 내용을 하나도 법률개정안에 포함하지 않았다. 국회에 제출한 개정안은 단지 자회사·손자회사 지분율 요건을 10% 높이고, 일감 몰아주기 규제대상을 총수 지분 30% 기업에서 20% 기업으로 확대한다는 정도다.


이런 내용으로는 문제를 조금도 해결할 수 없다. 문제는 이뿐만 아니다. ‘벤처기업’이라는 조건을 달았지만, 총수 일족에게 차등 의결권을 보장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총수 일족이 적은 지분으로도 더 많은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한편 중소기업으로 제한하고 있지만, ‘가업상속 공제’를 확대하는 안도 제출했다. 이는 향후 재벌총수 일족의 상속세(증여세) 인하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 여기에 더해, 인터넷 전문은행에 대한 금산분리를 완화도 포함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 재벌개혁 종착지는 주주자본주의


상황이 이런데도 문재인 정권은 법 개정으로 재벌개혁을 추진하겠다고 한다. 국회에 상정된 상법 개정안은 △감사위원 분리선임, △가격담합과 입찰 담합 등 위법성이 중대하고 소비자 피해가 큰 경성 담합에 대한 전속고발제 폐지, △2인 이상 이사 선임에 대한 집중투표 요구를 정관으로 배제하는 것 금지, △모회사 주주가 자회사 이사에 대한 공소 제기를 가능케 하는 다중대표소송제, △일정 규모 이상의 상장회사에 전자 투표실시 의무화 등이 그 내용이다. 이는 그동안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가 추진해 온 소액주주운동을 반영한 것이다. 최근 재벌 갑질로 악명을 떨친 대한항공 조양호 회장의 재선임이 주주총회에서 국민연금, 외국인 주주, 소액주주들의 반대로 저지됐다. 이런 상황도 소액주주운동에 더욱 활력을 줄 것으로 보인다.


시민단체들은 IMF 사태의 근본 원인을 재벌독점으로 규정하고, 위기극복을 위해 재벌개혁을 주장해 왔다. 구체적 방안의 하나로 제출한 것이 기업지배구조를 개선하기 위한 소액주주운동이다. 재벌개혁론의 문제의식은 재벌총수 독점구조가 자본주의 주식회사 제도의 ‘1원 1표제’ 질서, 즉 ‘공정한 시장질서’를 교란하고 있다는 것이다. 경제민주화와 재벌개혁은 이 교란을 바로 잡아 자본주의 주식회사 제도의 1원 1표제 원리가 작동하도록 하자는 주장이다. 총수 일족이 전횡하는 지배구조를 개선하고, 소액주주들의 권한을 강화하자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그동안 재벌개혁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소액주주운동을 전개해 온 장하성 교수와 김상조 교수를 청와대 정책실장과 공정거래위원장으로 포진시켜 재벌개혁을 추진해 왔다.


그런데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내용으로 볼 때, 그동안 시민단체들이 주장해 온 재벌개혁에도 턱없이 못 미치는 수준이다. 총수 일족의 지배 자체는 손대지 않고, 지주회사 제도로 총수 일족의 지배를 보장하되 주주권 행사 절차를 개선해 소액주주들의 권리를 일정 정도 보장하는 선에서 타협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주회사 규제를 완전히 무력화하는 대신 소액주주의 권리행사 절차를 개선하는 법률개정안을 제출한 것도 이런 배경이라고 해석된다. 때문에 문재인 정권의 재벌개혁은 그동안 시민단체들이 재벌개혁의 한 내용으로 주장해 왔던 ‘소유와 경영의 분리’에 의한 전문경영인 제도와도 거리가 멀다. 물론 현재도 총수 없는 몇몇 재벌이 있듯이, 총수 일족의 경영권을 박탈하고 전문경영인을 둔다 해도 주주의 이익을 증대하기 위해 구조조정을 하고, 노동자의 임금을 깎고, 고용을 유연화하는 것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문재인 정권의 재벌개혁이란 결국 기업은 주주의 것이고 이사회와 경영자는 기업 투명성을 통해 주주 이익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영·미식 주주자본주의를 실현하자는 것이다. 주주뿐만 아니라 노동자, 지역주민, 협력업체 등으로 확대하는 유럽식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와도 거리가 멀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재벌개혁은 주주들의 사적 소유제도와 시장질서 내에서 문제를 해결하자는 입장이며, 1원 1표제 경제민주화에 노동자는 없다. 재벌 체제 청산을 요구하는 노동자민중은 ‘왜 노동자가 아니라 주주들에게 결정권이 있느냐’는 근본적 문제 제기를 과감하게 해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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