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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19.11.04 18:30

투쟁하는 노동자의 벗 

노동자뉴스제작단

올해로 서른 살이 되었습니다


송준호┃기관지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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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설립 30주년을 맞은 노동자뉴스제작단(이하 ‘노뉴단’)은 영상 운동 역사에서 지나칠 수 없는 이름이다. 1989년 설립한 이래 현재까지 영상을 통해 노동운동의 현실을 알리고 현장의 문제의식을 공유해왔다.


인터뷰를 위해 찾은 노뉴단 사무실에는 30년의 역사를 증명하듯, 그간 제작해온 비디오테이프와 DVD가 수납장을 채우다 못해 거실 한구석을 점령하고 있었다. 한구석에서 먼지를 쓰고 있지만, 묵묵히 제 가치를 간직한 모습에 경외감을 느꼈다면 과장이 될까. 노뉴단 배인정 동지, 박정미 감독은 때로는 담담하고 때로는 열띤 목소리로 노뉴단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역사의 시작


노뉴단은 서울영상집단(이하 ‘서영집’)과 들풀, 서울대 영화동아리 얄라셩 등에서 활동하던 영상 활동가들이 노동 현장의 실상을 대중에 알리고자 뜻을 모아 만든 단체다. 값비싼 필름 매체로는 자주 작업을 할 수 없었던 환경 탓에 영화 평론이나 제3세계 영화·진보적 영화 소개 위주의 이론 작업을 해오던 서영집의 배인정 대표는 선배의 소개로 들풀의 활동가들을 만나게 됐다. 88년 겨울의 일이다. 들풀의 활동가가 ‘그때그때 일어나는 투쟁을 빠르게 찍어서 뉴스 형식으로 만들면 좋겠다’는 얘기를 꺼냈고, 서영집에서도 그 취지에 공감해 노동뉴스를 제작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1~2년 정도만 하자고 했어요. 영등포에 있는, 원래 여성노동자회가 쓰던 사무실을 넘겨받았는데, 자금을 여기저기서 빌리고 회비를 걷고 해서 세를 얻었던 거죠.”


그렇게 노동자뉴스제작단의 탄생을 알린 <노동자뉴스>는 1989년 3월 1호로 선을 보인 후에 1992년 6월 8호까지 제작되었다. “제일 중점에 둔 것은 노동 현장의 소식을 빠르게 전달하는 거였죠. 그렇지만 바로 전파를 타는 방식이 아니니까, 기획물도 좀 넣고 하자고 제가 제안해서 1호 뉴스 같은 경우는 꼭지도 일곱 개 정도 들어갔던 것 같아요.”


열정적으로 작품을 만들었지만, 기술적인 부분에서 어려움이 많았다. “그때는 16mm 비디오 매체로 촬영했는데, 낯설고 익숙지 않아서 고생했어요. 그래서 시간도 무척 많이 들여 작업했고.” 그 사이 노뉴단은 최초의 설립 목적을 넘어 중요한 투쟁의 속보와 전노협 건설 관련 조직·교육 영상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본래적 의미에서의 뉴스 제작은 사실 <노동자뉴스>나 <투쟁속보>로 끝난 것이죠. 특히 97년경 <참세상> 같은 곳에서 속보작업을 하면서부터는 일상촬영을 많이 안 하게 됐어요. 그다음부터는 독자적인 기획 작품이나 교육물 위주로 제작을 했어요.”



경제적으로는 항상 힘들었지만


노뉴단을 세우고 몇 년간은 활동비를 지급하지 못했다. 1990년 전노협이 건설된 이후로 작업이 안정되기는 했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제작비를 지급하는 방식이 아니라 노뉴단이 제작한 영상을 중앙조직에서 산하 조직에 공문으로 소개하는 방식이었다. “비디오테이프를 엄청 많이 복사해서 가방에 넣고 직접 노조에 돌아다니면서 팔았어요. 그렇게 마련한 제작비로 또 다음 작품 준비하고 그랬죠.”


1995년 들어 노뉴단에서는 처음으로 활동비를 지급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민주노총 건설과 제작방식의 변화가 한몫했다. “민주노총이 건설되면서 영상물에 대한 제작비가 지급됐어요. 당면한 투쟁과제·조직과제를 설명하는 교육 영상에 대한 노조의 요구가 생기면서, 노뉴단도 본격적으로 교육물을 제작하게 됐죠.” 그해 일부 활동가의 활동비 지급을 시작으로 97년에 이르러서는 활동가 전원에 활동비를 지급했고 금액도 차츰 늘었다. 박정미 감독이 노뉴단에 합류하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저는 서울대 얄라성에서 활동했었어요. 다큐멘터리 작업을 계속하고 싶어서 알아보던 중에, 노뉴단에서 활동하던 얄라셩 선배의 소개로 98년에 노뉴단에 들어오게 됐어요.”


IMF 외환위기가 한창일 때 노뉴단의 활동은 오히려 더욱 활발해졌다. “그때는 노뉴단 소속 활동가가 열 명 정도로 많았어요. 노동운동이 어려움에 처할수록 싸울 게 많기 때문에 영상으로 제작할 것도 많았죠. 경제적으로는 항상 힘들었지만(웃음), 그때는 그래도 괜찮았어요.”


설립 10주년을 맞이하는 노조들이 하나둘 생기면서 노뉴단도 노조 역사물로 작업 영역을 확장해갔다. 이후 2002년 플래시 애니메이션을 적용해 호평을 받은 <노동자의 단결로 미래를 노래하자>는 정규직을 대상으로 비정규직 문제를 다룬 작품으로, 노뉴단의 교육물 수준을 한 단계 높인 작업물이었다. 노뉴단은 그 외에도 극영화, 노동영화제, 영상 제작 교육 등 다방면에 걸쳐 활동을 이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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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9년 '노동자뉴스 1호'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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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뉴단 사무실에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영상자료들.



집회는 교육의 장


한 세대의 세월을 영상이라는 한 분야에서 보내며 노뉴단이 느낀 변화는 뭘까. 배인정 동지는 본질적으로 바뀐 것은 크지 않다고 말한다. 노뉴단에 의뢰하는 작업은 조직과제와 투쟁과제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게 배인정 동지의 설명이다. “영상을 보는 대상이나, 그걸 주문하는 곳이 너무 똑같아서 문제지(웃음). 물론 작품의 리듬감이나 영상 문법에 익숙해진 시청자가 영상물을 좀 더 장르적으로 바라보는 것, 작품의 표현방식은 분명히 바뀐 지점이죠. 약간의 법칙 같은 게 생겨나는 거? 하지만 본질은 같아요.”


박정미 감독은 제작하는 영상의 길이가 짧아졌다는 점을 변화로 꼽았다. “노조에서도 짧은 것을 많이 요구해요. 사람을 모으는 일이 점점 만만치 않아서 그런지 혼자 보기 좋은 짧은 영상을 더 찾게 된 것 같아요.” 하지만 혼자 앉아 보는 것은 교육 효과가 적으리라는 게 박정미 감독의 생각이다.


무엇보다 노뉴단이 느끼는 변화는 집회의 영상문화다. 많은 사람의 생각과 달리, 집회에서 영상을 주된 꼭지로 활용하게 된 것은 불과 5~6년 남짓한 일이다. “그전에는 여러 제약 때문인지 많이 안 했어요. 가끔가다 노동자대회 전야제 때 간간히 트는 정도? 지금은 LED가 발달해서 가능한 것 같아요.” 배인정 동지는 집회 상영물의 중요성을 근래 들어 크게 느낀다고 했다. “노동자들 만나보면 다들 그래요. 혼자 고립돼 있다가 집회라는 곳에서 여럿이 함께 본 영상, 거기서 말하는 내용 이런 게 굉장히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고. 그 사람한테는 그 영상이 1년 중 가장 중요한 교육물인 거죠. 그래서 저희도 집회를 교육의 장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어요.” 박정미 감독도 이에 동의한다. “예전에는 집회에 왜 왔는지를 주요 발언자가 말해주는 식이었는데, 요즘은 집회 메인 영상이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된 것 같아요. 자기가 집회 왜 왔는지, 뭐해야 하는지를 영상을 통해 접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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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5월 ACC 시네마테크 5월 인권 특집 '노동자뉴스제작단' 프로그램 포스터.



노뉴단의 내일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노뉴단을 꾸리고 영상작업을 지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진짜 힘들 때는 정말… 때려치우고 싶죠(웃음). 그렇지만 노뉴단에서 활동하면서 다른 곳에 가고 싶거나 다른 걸 하고 싶었던 적이 없었어요. 하니까 계속해왔던 것 같아요.” 박정미 감독의 말이다.


한편 배인정 동지는 시청자의 반응을 원동력으로 들었다. “뭔가를 만들면 작게는 노뉴단 내부에서, 크게는 발주처에서, 더 크게는 전혀 모르는 어떤 노동자가 뭔가 반응을 해줘요, 좋든 나쁘든.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었다고 하면 그런 피드백은 월급밖에는 없잖아요. 그런 면에서 피드백이 상당히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힘든 과정을 지난 후에 오는 만족감 같은 거.”


몇 년 전 다른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배인정 동지는 “웃으면서 해체하는 것”을 노뉴단의 남은 목표로 밝혔었다. “우리가 더 이상 후배들을 받지 않고 있잖아. 일이 생각보다 힘들어서인지 우리가 요령이 없어서인지 오래 있는 친구들이 없었어요. 우리가 끝이면 그냥 끝이구나…. 그런 의미예요.” 물론 당장의 해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박정미 감독은 설명한다. “한정적이기는 하지만 노뉴단이 하는 일을 필요로 하는 곳이 아직 있잖아요. 어쨌든 우리가 계속해오던 일들이 있으니까, 그런 일을 하는 시간이 좀 길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있어요.”


해체하기 전까지 하고 싶은 활동이 있냐는 질문에 배인정 동지는 제작 지원을 받아 장편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다. “우리가 제작 의뢰를 받기 때문에, 해소하지 못한 게 좀 있어요. 그리고 여건이 되면 그간의 작업과 우리의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논리적으로 정리하는 것을 해보고 싶어요.”


저녁때를 훌쩍 넘겨 인터뷰를 마치고, 너무 늦게야 노뉴단의 30주년을 기념하는 것 아닌가 반성하며 사무실을 나섰다. 노동운동에서, 투쟁 현장에서 활동한 동지들이라면 알 것이다. ‘노뉴단’이란 이름에 우리가 진 빚이 꽤 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당에 큰 도움이 못 되었다며 마음의 빚을 얘기하는 두 동지에게 우리는 어떤 축하 인사를 건네야 할까. 노동자뉴스제작단이 투쟁하는 노동자의 벗으로 웃으면서 계속 왕성히 활동해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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