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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환 

전국공무원노조 희생자 원상회복 투쟁위원회(회복투) 전 위원장


15년의 해고 생활, 그리고 세 번의 단식

끝까지 잘못을 부정하는 민주당 정권



# 지난 3월 2일, 13일간의 세 번째 단식농성을 이어가던 공무원노조 해고자 김은환 동지가 건강 악화로 병원에 이송됐다. 15년 전 노무현 정권은 무자비한 탄압과 해고로 공무원노조를 짓밟았고, 문재인 정권은 ‘기다리라’는 말만 반복하며 해고자 복직을 외면한다. 2004년 총파업으로 해고된 동지들이 하나둘 정년을 넘어서고, 몇몇은 세상을 떠나거나 병마까지 짊어진 지금, 자신의 몸을 깎는 단식은 ‘이제 끝장을 보자’는 절박한 선택이었다. 단식을 마치고 회복 중인 김은환 전 공무원노조 회복투 위원장을 <변혁정치>가 만났다.



Q: 먼저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린다.


저는 16년 차 공무원 해고자다. 1994년에 처음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고, 사회복지직으로 일했다. 그러다가 노무현 정권 시기였던 지난 2004년, 노동기본권을 요구한 공무원노조 총파업에 참여하면서 해고됐다.


2004년 11월 15일이 총파업을 시작한 날이었는데, 그 이후 많은 동지들이 직위 해제되거나 징계위가 열려 해고당했다. 제가 해고 통보를 받은 게 2005년 1월 7일인데, 총파업 끝나고 불과 1달 반 뒤였다. 다만 그 당시에는 ‘우리가 큰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2~3년 뒤엔 복직할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도 복직은 이뤄지지 않았고, 그렇게 2010년 정도부터 본격적인 복직 투쟁에 나서게 됐다.



Q: 재작년 4월과 11월에 이어, 올 2월 또다시 13일간 단식농성을 진행하다 최근 병원에 이송되셨다. 스스로 몸을 깎으면서까지 세 번째 단식농성에 나선 이유는?


“공무원 해고자 복직 특별법”을 두고 오랜 시간을 끌었는데, 이번에 끝장을 봐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해고자들의 요구는 한결같다. 2004년 총파업 당시 징계와 해고가 부당했다는 거다. 노동3권은 누구나 가져야 할 기본권이다. 그걸 정권이 법과 제도로 억압할 수는 없다. 해고 자체가 잘못됐으니, 그간의 징계와 탄압을 취소하고 국가가 사과하라는 것이다.


18대, 19대, 20대 국회에도 해고자 복직 법안이 발의됐지만, 매번 처리가 무산됐다. 재작년에 두 번의 단식과 오체투지 등의 투쟁을 벌이자, 이전까지 대화에 응하지 않던 정부가 협상에 나왔다. 그러면서 20대 국회에 새로 법안을 발의했다. 그런데 정부여당의 법안 내용을 보면 ‘인도적인 차원에서 복직시키자’는 수준이다. 과거에 민주당 정권 자신들이 공무원노조를 탄압하고 해고를 자행한 것에 대해서는 일절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민주당 정권이 이런 행태를 보인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노무현 정권에서 문제가 많은 “공무원노조 특별법”을 제정할 때도 정부여당이 일방적으로 만들었다. 이 법은 단결권조차 제대로 보장하지 않았다. 단체교섭에 대해서도 사실상 교섭할 수 있는 내용 자체가 없도록 만들어놨다. 단체행동권은 통제됐다. 결국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거다. 노무현 정권은 이 법을 던져 놓고 ‘이 범위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징계를 남발했다.


지금의 해고자 복직 특별법도 마찬가지다. ‘이 법안을 수용해야 하는가’를 두고 우리 사이에서도 논쟁이 있었다. 가령, 이미 정년이 지난 동지들은 이 법안으로는 명예 회복도, 보상도 불가능하다. 결국 우리 해고자들도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 법안의 대표발의자가 얼마 전까지 민주당 대변인이던 홍익표다. 당시에는 우리에게 ‘법안 논의 과정에서 보완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제 보완은 고사하고 20대 국회 통과 자체도 어렵게 됐다. 민주당은 보수야당 핑계를 댄다. 물론 보수야당이 반대하는 건 맞는 것 같다. 그런데 정부여당이 진정 자신들의 책임이라고 느꼈다면, 왜 방법이 없었겠나. 그렇게까지 안 하려는 거다. 과거 자신들이 노무현 정권에서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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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11월 총파업 당시 과천시청 로비. [사진: 공무원노조 과천시지부 홈페이지]



탄압의 광풍 속에서 올린 공무원노조 깃발

그리고 2004년 총파업


Q: 말씀하셨듯 김은환 동지는 2004년 11월 공무원노조 총파업에 참여했다가 해고당하셨다. 당시 총파업의 요구는 무엇이었는지?


당시는 공무원노조 초창기였다. 그때까지 공무원 사회 내에서 불합리한 일이 엄청 많았다. 일을 잘 못하면 재떨이나 결재판을 집어 던지는 건 비일비재했고, 상급자보다 먼저 출근해서 청소하는 게 당연시되다시피 했다. 도저히 자기 의견을 낼 수 없는 분위기였다. 이런 게 결국 자존감을 무너뜨리고, 조직 안에서 스스로가 사라진다는 무력감을 느끼게 한 거다.


사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김대중 정권 당시 노사정위원회에서 정리해고와 파견제를 도입하는 대가로 공무원의 노동기본권을 인정하겠다는 거래가 있었다. 이후 1999년 7월경 직장협의회가 만들어졌다. 물론 그 이전부터 노조 결성 활동을 했던 동지들이 있었지만, 이때부터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렇게 2000년경 “전국 공무원 직장협의회 연합”이라는 전국적 연합단체를 만들고, 이어 2002년 3월 23일 공무원노조가 출범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시작부터 불법노조였다. 공무원노조는 출범 직후부터 별도의 공무원노조법을 만들 게 아니라, 기존 노조법에 공무원 노동권을 보장하는 내용을 보태서 노조를 인정하라고 요구하며 투쟁했다. 그러다 2004년 노무현 정권에서 아까 얘기했던 문제투성이의 공무원노조 특별법을 발의하자, 이에 항의해 온전한 노동3권을 요구하며 총파업을 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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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11월 23일, 공무원노조 총파업 관련 징계에 항의하며 과천시청 정문에서 1인 시위를 진행하는 김은환 동지. [사진: 공무원노조 과천시지부 홈페이지]



Q. 총파업에 대한 노무현 정권의 대응은 어땠나?


원래 총파업 예정 시점은 11월 초였는데, 조금 늦춰져 11월 15일로 결정됐다. 파업 전부터 언론의 공격은 물론이고, 경찰이 들이닥쳐 총파업 찬반투표조차 무산됐다. 당시 노동부‧행정안전부‧법무부 등 3개 부처 장관이 공동으로 ‘이번 파업은 불법 파업이며, 집단행동에 나서면 곧바로 사법처리하겠다’고 밝혔다. 총파업에 돌입하기도 전에 공무원노조 주요 간부들에 대한 검거령이 떨어졌다. 집에도 못 들어가고 도망 다니다 결국 잡혀서 갇힌 사람도 많다.


우여곡절 끝에 11월 14일 종로에서 노동자대회가 있었는데, 그날 연세대에서 파업 전야제를 진행하자 경찰이 진입해 우리 모두 흩어졌다. 그리고 다음 날인 15일 아침 총파업을 시작했을 때, 울산과 강원 일부 지역은 실제 업무가 마비되기도 했다. 당시 종로3가나 고속터미널 등에서 집회를 하려고 하다가, 정보를 입수한 경찰이 체포하러 들이닥치기도 했다. 그렇게 공권력의 탄압 속에서 싸우다가, 결국 3일째 되던 날 지도부의 복귀 지침이 떨어졌다.


총파업 이후 540여 명이 해임‧파면당했다. 이 가운데 430여 명은 소청‧소송으로 복직했지만, 110명 정도는 해고자로 남았다. 저는 당시 과천시지부 지부장이었는데, 이때 해고됐다. 현재 공무원노조 해고자가 136명인데, 파업 후 추가로 20명 정도가 노조활동으로 해고당했다.


노무현 정권의 탄압은 집요했다. 결국 공무원노조 특별법이 2006년 1월부터 시행됐는데, 그때부턴 이 법을 거부한 공무원노조에 대해 사무실을 뺏거나 해고자의 사무실 출입을 금지시켰다. 노조를 탈퇴하지 않으면 징계하겠다는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제가 있던 과천시지부 사무실도 2006년과 2009년쯤에 두 번 털렸다. ‘불법노조이니 사무실을 빼라’는 거였다. 당연히 우리는 저항했고, 경찰이 들어와 조합원들을 끌어냈다. 공무원노조에서 활동한 게 17년 정도 됐는데, 그동안 우리 지부만 해도 이리저리 밀려나며 사무실을 5~6번 넘게 옮겨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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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9월, 당시 공무원노조 과천시지부 노조 사무실을 폐쇄하려 하자 사무실 사수 투쟁이 벌어졌다. 사진 맨 오른쪽이 김은환 동지. [사진: 공무원노조 과천시지부 홈페이지]



해고는 모든 노동자의 문제,

이제는 끝내야 한다


Q: 2004년 파업 이후 15년이 흐른 지금, 공무원노조 해고자 가운데에는 안타깝게도 목숨을 잃거나 질환을 앓고 있는 동지들도 있다고 들었다.


어떤 사업장이든 해고되면 상황이 비슷할 거다. 가족도 그렇고 본인에게도 큰 충격이다. 일단 해고자들의 경우 가정불화를 겪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 해고자 가운데 38명 정도는 이미 정년이 지났다. 복직해도 나이 때문에 공무원으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다. 정년이 지난 분 가운데 3명이 돌아가셨고, 정년 전에 세상을 떠난 분도 2명이다. 게다가 정년이 지난 뒤에는 노후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분들도 있다.


더 가슴 아픈 건 사람들에게 잊힌다는 점이다. 노조를 만들고 총파업에 뛰어들 당시엔 나름대로 사명감이 있었는데, 사람들 기억 속에서 점점 잊힌다. 그래서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경우도 많다. 다른 한편으로는 희망이 없어지는 데 대한 좌절감도 있다. 젊을 때는 어쨌든 ‘복직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는데, 이제는 세월이 흐르지 않았나.


현재 남아 있는 해고자 중에서도 아픈 동지들이 꽤 많다. 암이나 뇌경색, 심장질환을 앓는 분들도 있고. 육체적 건강도 문제지만, 몇몇 동지들은 아예 바깥출입을 못 하기도 한다. 사람 만나는 게 겁나는 거다. 그나마 농성장에 나오는 동지들은 몸이 고달프더라도 심리적으로 해소되는 부분이 있는데, 아예 나오지 못하는 동지들은 그 심경이 오죽하겠나.



Q: 교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지만, 이 나라에서는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상당히 강하다.


결국 공무원과 교사의 정치적 자유를 제한하는 건 지배자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렇게 ‘정치적 중립’을 주장하는 고위 공무원들, 가령 장관이나 대통령, 중앙부처 국장, 하물며 지자체 과장들까지도, 낮에는 공무원이지만 밤이나 선거철엔 다들 정치인이다. 그러면서 우리 하위직 공무원들에게 ‘정치적 중립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게 말이 되나. 예전에 공무원노조 특별법을 만들 때도 여당에서 중앙부처 국장이나 고위직 공무원에게 ‘이러저러하게 법을 만들어 달라’고 하면 ‘예 알겠습니다’라고 하고서는, 밤이 되면 이들이 야당을 찾아가서 ‘이 법은 이러저러해서 문제가 있습니다’라고 알려준다던 얘기까지 들었다. 이게 무슨 ‘정치적 중립’인가.


우리는 정치적 자유를 누린다고 해도 그 영향을 미치는 범위가 본인과 가족, 혹은 주변 정도일 텐데, 이 고위직 공무원들은 나라 전체를 들었다 놨다 하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은 오히려 다들 정치적 행위를 하는데, 이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Q: 이번 단식은 일단 마무리됐지만, 여전히 공무원 해고자 복직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상태다. 몸도 상하셨지만, 마음 한 켠도 무거우실 것 같은데.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끝으로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부탁드린다.


회복투 위원장으로서의 제 임기가 이제 끝나긴 했지만, 이건 개인의 임기를 떠나서 해고자 전체의 문제다. 지난 2년간 해고자 동지들은 복직 투쟁에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다만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이 문제가 당사자들만의 투쟁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간과했던 것 같다. 우리의 복직도 문제지만, 해고 일반의 문제, 즉 해고자가 왜 복직해야 하고 해고가 왜 발생하면 안 되는지 등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좀 확대시켜야 하지 않나 싶다.


그러자면 공무원노조 해고자도 그렇고 다른 사업장 해고자들도 마찬가지고, 이 내용을 서로가 많이 알고 있어야 한다. 그 수단은 연대하면서 같이 싸우는 방법밖에 없는 것 같다. 지금까지 회복투 위원장을 맡으면서도 내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보니 내 문제에만 급급했는데, 이제 좀 더 멀리 보면서 다른 해고 노동자들과의 접점을 찾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또한, 우리 공무원노조가 좀 더 역할을 강화했으면 한다. 공무원노조 초창기 우리와 함께했던 노조와 시민사회단체들을 포함해 많은 이들이 큰 기대를 했는데, 그만큼 역할을 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공무원노조를 처음 만들 때 품었던 열정과 취지를 살려 나갔으면 좋겠다.



■ 인터뷰이주용 기관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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