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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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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20.03.16 17:48

시드니 웹 1859~1947, 페이비언 협회1884~


영국노동당의 성장 신화와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

“적당한 때가 올 때까지”


이한서┃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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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이비언 협회의 대표적 인물인 베아트리스 웹, 시드니 웹, 버나드 쇼(좌측부터).



영국노동당(이하 ‘노동당’)은 19세기 말 빅토리아 시대(영국 빅토리아 여왕 재위기, 1837~1901년경) 말엽의 경기침체를 바탕으로 창당했다. 이전까지 노동계급정치를 부르주아 정당인 자유당과의 공조에 의탁해왔다면, 앙등하는 실업률에 숙련공들의 지위까지 위협받는 시점에서 적극적인 정치세력화의 필요성이 대두한 것이다.


영국에는 러다이트 운동(19세기 초 기계제 공업의 확산과 노동조건 변화 과정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사수하고자 했던 집단행동)을 비롯해 여러 투쟁을 벌여온 노동계급의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세력과 노선이 존재했다. 노동당의 전신 격인 “노동대표회의”만 해도 페이비언 협회, 독립노동당, 사회민주연맹 등 정치단체와 더불어 대중기반인 노동조합 세력이 있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노동당의 의결권 행사에서는 노동조합의 비중이 높게 보장돼 있었으며 정치단체의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당의 주요 문서와 선거강령을 제출하고 지도부의 일원을 맡았던 시드니 웹을 비롯한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이 노동당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좋건 싫건 창당 시기의 행보가 이후 백 년 역사에 흔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페이비언 협회가 그 역할이나 규모에 비해서도 넘치는 유명세를 남긴 이유다.



참고 기다리는 사람들


페이비언 사회주의의 대표적 인물인 시드니 웹은 영국 식민청 공무원 출신으로, 이름난 작가였던 버나드 쇼의 권유를 받아 페이비언 협회의 일원이 됐다. 웹은 이후 노동당 중앙집행위원회NEC의 일원으로 주요 정책문서를 작성했다. 그는 노동당 정부에서 식민성 장관을 지냈으며 남작 작위를 받은 엘리트다.


이외에 유명한 페이비언 협회원으로는 노동계급 생활 수준 연구로 명성을 얻은 베아트리스 웹, 극작가 버나드 쇼, 역사가로 이름을 떨친 G. D. H. 콜, 1920년대 당 대표를 역임하고 내각에 참가했던 아서 헨더슨 등이 있다.


“페이비언”이라는 명칭은 고대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에 맞섰던 로마 장수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이름을 딴 것으로, ‘적당한 때가 올 때까지 참고 기다리지만, 때가 도래하면 사정없이 내리친다’는 태도를 의미한다.


페이비언 협회의 대기주의적 입장 등으로 힘차게 창당한 것은 아니지만 1920년대 들어 노동당은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계기는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다. 전시 산업통제와 완전고용으로 노동자들의 소득수준이 가파르게 상승했고 여성의 사회진출이 급증했다. 그러나 그만큼 높은 노동강도를 감내해야 했던 노동계급은 국가가 전시의 희생에 보답해야 한다고 벼르고 있었다. 전쟁 이후의 질서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전쟁 전과는 확연히 달라져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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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드니 웹이 기안하여 1918년 당대회에서 채택한 <노동당과 새로운 사회질서>.



페이비언, 당헌과 정책을 기안하고 

후퇴하고 다시 기다리고


이에 노동당은 1918년 1월, 새 당헌을 마련하고 조직을 재편했다. “생산, 분배, 교환수단의 공동소유”를 명시한 유명한 <제4조>가 이때 제정됐다. 이와 함께 시드니 웹이 집필한 문건 『노동당과 새로운 사회질서』와 1918년 선거강령을 채택했다. 해당 문건은 노동당의 개혁 방향을 정리한 최초의 정책자료집이라 할 수 있다. 실업수당, 공공주택, 의무교육 등 고전적 개혁정책에다 철도, 탄광, 발전산업 국유화와 특별 자본과세 도입 등 새로 대두한 의제도 포함했다.


노동당은 1910년 7.1%, 1918년 22.2%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1924년에는 33%를 득표해 처음으로 내각을 주도했다. 그러나 떠밀리다시피 좌경화된 당은 금세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탄광 국유화 요구는 1920년을 마지막으로 한동안 자취를 감췄다. 노동당이 내각에 들어오면 발생하리라고 보수언론이 요란하게 경고했던 급진적 변화는 전혀 없었다. 1926년 노동계급의 분기가 총파업의 형태로 터져 나왔을 때 노동조합회의(TUC: 영국의 노동조합 총연맹 격)와 노동당은 무력했고 이 사건은 영국노동운동사 최악의 참패로 기록된다.



백 년의 기다림


이후 페이비언 협회와 노동당의 “참고 기다리기”는 장장 백 년 동안 이어졌다. 공황기에 우경화의 절정을 달리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다시 노동계급의 성장과 함께 힘을 얻은 당내 좌파를 중심으로 국가의료체계NHS 구축, 철강 및 탄광 국유화, 완전고용 합의를 이뤘다. 그리고 거기까지였다. 호황기가 끝나고 보수당에 내리 패배한 이후 우경화의 역사는 널리 알려진 대로다.


창당 초기 노동당의 성장은 정치세력화의 신화로 여겨지곤 한다. 하지만 그 성장 과정마저도, 노동계급의 투쟁에 비해 정당의 역할은 무엇이었는지에 관해서는 회의적인 질문을 남긴다. 기실 노동당의 행보를 보면 노동계급의 요구를 정리해서 입법안을 제출하는 것이 당의 역할이었다.


맨 처음, 노동계급이 독자적 정당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를 주도했던 것은 키어 하디와 이후 이탈한 독립노동당 세력이었다. 페이비언 협회와 TUC 지도부는 노동당 창당에 반대했다. 자유당과의 선거협약을 유지하고 심지어 보수당에 침투전략을 구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유연하고 정세적인 판단을 자랑하지만, 정세에 떠밀려 요동치는 노선이 마냥 올바른 선택은 아닌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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