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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재벌은 위기를 먹고 자란다


1997년도, 2008년도, 

재벌에겐 ‘그들만의 기회’였다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마법, “씽크빅”


송명관┃서울



“** 씽크빅”. 우리말로 풀면 ‘크게 생각하세요’ 정도의 뜻이다. 많은 사람이 알다시피, 어느 학습지 광고에 등장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이 올해 미국 중앙은행 수장의 입에서 나왔다. 언제? 구제금융에 관한 의회에서의 협상 과정에서. 누구에게? 민주당 하원의장에게 건넨 말이다. 중앙은행은 쏟아부을 실탄()이 얼마든지 있으니, ‘크게 생각해’ 구제금융 액수를 대폭 늘리라는 의미다. 대개 의회가 이런저런 지원책을 쏟아내려 하고 중앙은행은 이에 대해 ‘안정적인 통화정책을 고수하겠다’면서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는 모습을 많이 봐서 그런지, 이런 풍경은 매우 역설적이고 이례적이다.


이 장면은 코로나가 바꾼 세상의 한 단면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실제 올해 코로나 대책으로 미국 중앙은행이 쏟아낸 조치는 2008년 금융위기와 비교해도 규모 면에서 파격적이고, 의사결정 과정에서도 대단히 전격적이었다. ‘대통령 탄핵’까지 등장하면서 대립각을 세웠던 미국 의회 양당은 재정 지원 방안 마련엔 서로의 주장을 별 이견 없이 수용하면서 파격적인 대책을 쏟아냈다. 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이참에 마중물 붓고 싶은 곳에 시원하게 물을 쏟아주겠다’는 정치적 의도도 깔려 있다. 말 그대로 “씽크빅”이다.



위기 탈출의 갈림길은 차등적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파격적인 일회성 지원책’이 아니라, 자원 배분의 역할을 하는 재정정책의 변화다. 이미 한국에서는 1997년 IMF 위기를 겪으면서 이것이 무엇인지 피부로 실감했다. 당장 ‘나라가 부도났다’는 전대미문의 사태를 보면서 금 모으기에 바빴지만, 정작 이 사태를 거치며 장기적으로 우리의 삶에 어떤 변화가 올지 예측하지 못했었다. 비정규직이 이렇게 많이 늘어날지, 고용안정이 삶의 최우선 목표가 되면서 청년 공시족 50만 시대가 열리게 될지, 그 당시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이 20년이 지난 지금은 일상이 되어버렸다. 분명 경제위기는 탈출했다는데, 선거 때마다 ‘폭망한 경제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에 다들 흥분한다. 우리의 삶은 여전히 경제위기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와는 정반대로, 대기업은 아주 드라마틱한 부의 증가를 이뤄냈다. 국내 전체 기업의 사내유보율(자산총계 대비 이익잉여금 비중으로, 기업이 사내에 쌓아둔 이윤)은 1990년대만 하더라도 5% 수준에 머물렀지만, 2000년대에 이르러 20%대로 급증했다. 한편 사내유보금 규모가 크지 않았던 1980~90년대에는 실물투자 활동이 연평균 10% 정도의 증가율을 보였지만, 2000년 이후에는 사내유보금이 대폭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실물투자는 연평균 2%대로 급락했다. 물론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기업의 재무건전성 확보(부채와 비용 지출을 줄이고, 자기자본과 현금을 늘리는 것)가 최우선 사항이었기 때문에 유보금이 많아졌다’는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이런 추세는 외환위기 여파가 사라진 이후에도 지금까지 계속 진행 중이다.


게다가 과거 존재했던 ‘사내유보금에 대한 과세제도’ 마저 2001년 12월 폐지됐다. IMF 위기를 거치며 기업에 더 많은 이윤을 축적해둘 수 있도록 해준 조치였는데, 기업은 이렇게 늘어난 사내유보금을 바탕으로 일종의 ‘돈 굴리기’를 하는 거대한 금융 주체가 됐다. 실제로 기업의 유형자산(생산활동에 필요한 건물‧기계‧장치 등) 비중은 계속 줄어든 반면 금융자산 비중은 대폭 늘어났는데, 1990년대 47% 정도의 수준을 유지하던 유형자산 비율은 현재 33%로 하락했다. 이처럼 기업이 돈 쌓기에 몰두하며 투자를 방치하자, 그 빈자리는 노동시장에서 퇴출당한 은퇴 자영업자들과 청년실업자들의 가계 빚으로 메워졌다. 기업소득과 가계소득의 격차가 커진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을 뿐만 아니라, 내수 부양의 버팀목이 된 가계 빚을 제물로 삼아 한국경제는 지난 20년 동안 절름발이 걸음을 해온 것이다. 우리에게 진정한 위기는 어쩌면 ‘위기 이후’였다.



재벌은 위기를 먹고 자란다


이처럼 97년 IMF 위기가 대기업에게 커다란 기회의 시발점이었음은 명확하다. 투자 부족에 대한 질책엔 규제완화라는 이데올로기가 버텨주고, 정부의 시장개입에 대해서는 ‘관치의 부작용’이라는 말이 대신 싸워준다.


그런데 이 와중에 터진 2008년 금융위기도 ‘대마불사’들에겐 또 하나의 기회였다. 기업에 뿌려주기 위한 천문학적 액수의 공적 자금이 조성됐다. 한국은행이 절반을 지원한 “채권시장안정펀드” 10조 원, 한국은행 및 산업은행의 대출금 각각 10조 원과 2조 원을 기반으로 한 “은행자본확충펀드” 20조 원, 한국자산관리공사법 개정안에 그 설치를 규정한 “구조조정기금” 40조 원 등이다. 여기에다 금산법(“금융산업의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 개정안에 따라 한국정책금융공사에 설치한 “금융안정기금”까지 합하면, 사실상 공적 자금의 신규 조성 규모만 100조 원에 이르렀다. 게다가 각종 금융공기업의 지원 규모까지 더하면 150조 원이 넘는 지원책이 시행됐다.


이런 ‘유사 공적 자금’과 금융지원책뿐만 아니라, “4대강 사업”에 몰두했던 당시 이명박 정권하에서 대기업들은 또 한 번 몇 년 치 먹거리를 챙길 수 있었다. 4대강 사업은 설계부터 시공까지 대기업만이 할 수 있었던 유일한 공사였다. 대기업이 생산하는 덤프트럭과 포크레인이 동원됐고, 직접 공사비의 25%에 달하는 기름값도 시공사인 정유회사들이 독식했다. 애초 ‘지역경제 활성화’라는 명분과는 거리가 한참 먼 것이었다.


여기에 더해, “기업 프렌들리”로 시작한 이명박 정부의 규제완화는 박근혜 정부에서도 그대로 이어졌고, “기업활력제고특별법(구조조정 과정에서 기업에 요구되는 규제를 풀어주고, 각종 혜택으로 구조조정 지원)” 등의 규제완화 정책은 현 정부에서 꽃을 피우게 됐다. 그리고 이제는 코로나 사태 이후 예상되는 경기침체 속에, 대대적인 노동 관련 규제완화 요구가 흘러나오고 있다. 문재인 정부도 이런 흐름에 동조할 가능성이 크다.


이러니 재벌의 곳간은 차곡차곡 쌓일 수밖에 없다. 현재 국내 30대 재벌의 2019년 전체 사내유보금은 950조 원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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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충북 차별철폐대행진 참가자들이 재벌체제 청산 퍼즐 맞추기를 하고 있다.



위기는 기회를 창조하는 시발점… 씽크빅!


그렇다면 매번 이렇게 재벌 강화로 귀결하는 위기탈출법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손실의 사회화’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높았지만, 위기가 다시 찾아오면 ‘대마불사’ 논리는 언제고 반복됐다.


대응법을 찾기 위해, 지금 벌어지고 있는 다른 나라의 사례를 참조해 보자. 한국은 상대적으로 코로나 사태가 심각하지 않아서 전면적인 셧다운 없이도 안정적으로 사회가 유지됐다. 하지만 상황이 심각한 영국이나 미국의 경우를 보면, 정부가 임대인에게 한시적으로 임대료를 받지 말라고 강제하거나 권고한다. 은행의 차압도 금지하고 있다. ‘개인 사유재산 침해’ 논란이 벌어질 수도 있지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자본주의 국가 역시 이렇게라도 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미국 중앙은행장이 건넨 “씽크빅”을 우리가 던져보자. 앞선 미국과 영국의 사례처럼 ‘착한 임대료 운동’에 그칠 것이 아니다. 앞으로 세계경제 침체가 심화하면서 기간산업에 대한 구제금융 이야기가 흘러나온다면, ‘이참에 국유화하자’는 요구를 전면에 내걸 수도 있다. ‘이래 돈 드나 저래 돈 드나’ 마찬가지라면, 기업주나 경영진을 도와줄 게 아니라 ‘크게 생각해서’ 기간산업 국유화가 더 효과적이라고 설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국유기업들에서 해고 없고, 산업재해 없고, 비정규직 없고, 원청 갑질 없도록 통제하자고 요구할 수 있다. 가령 최근 LNG선 100척 수주로 조선업계가 한껏 들떠 있지만, 불과 4년 전 이들은 해양플랜트 사업 대실패로 수조 원의 구제금융을 받은 바 있다. 당시 10만 명이 넘던 조선 빅3(현대중공업‧대우조선해양‧삼성중공업) 비정규직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상당수가 해고당했고, 지역경제는 파탄 났다. 그러므로 이런 국가적 고통을 수반했던 조선 산업의 과실을 국가적으로 나눠 가져야 한다는 논리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번에도 재벌은 또다시 위기를 ‘자신들만의’ 기회로 만들려 할 것이다. 그러나 지난 20년의 과정을 도돌이표처럼 반복해선 안 된다.


이번에 긴급재난지원금을 둘러싼 논란은 국가의 재정정책에 관한 대중적 인식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예전 같았으면 ‘혈세 퍼주기’ 주장이 전가의 보도처럼 언론 지면을 뒤덮었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일단 그들이 신봉하던 신자유주의 경제규율의 표준인 미국이 적극 나서 정반대의 처방책을 쏟아내고 있다. 지금 대중적 인식의 대세는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대중은 조금씩 ‘씽크빅’으로 한 발짝씩 전진하고 있다.



‘재벌 강화’ 논리를 거꾸로 세우자


자본주의 논리로는 지금처럼 삶이 붕괴하는 위기를 막을 수 없다는 게 명확해지고 있다. 그렇기에 체제 자체의 붕괴를 어떻게라도 막아보기 위해 각국 자본주의 정부는 일정하게 시장 원리를 위배하면서까지 온갖 대책을 쏟아내고 있다. 그리고 그 대책의 가장 큰 수혜는 재벌대기업으로 귀결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훨씬 더 과감하게, 체제의 원리 자체에 균열을 내는 급진적인 대안을 대중적으로 제기하면서 ‘모두가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강조해야 한다. ‘대마’ 자체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말에 여물 먹이는 노동자도 중요하며, 그렇게 해서 살린 말을 재벌회장님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탈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국유화 주장은 지극히 당연하고 명확한 논리일 수 있다. 오히려 그 이후에 국유기업을 어떻게 지속적으로 운영할지가 더 큰 문제인 것이다.


1997년 IMF 위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서 어느 경제 관료가 하는 말을 기억하자. “시끄러운 노조들 싹 다 밟아줘야 하는데.” 지금 상황을 돌아보면, 이 대사는 너무나 섬뜩하다. 앞으로 나타날 진짜 적은 어디서 어떤 대사를 읊조리고 있을까? 진정한 위기는 ‘위기 이후’다. 우리는 그것을 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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