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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식 1909~1942

동북지역 항일무장투쟁의 마지막 불꽃


나영선┃노동자역사 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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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식은 1909년 경상북도 구미 임은동에서 태어났다. 1907년 서울 진공 작전(일제에 맞서 전국 의병들이 서울로 진격한 전투)을 지휘했던 왕산 허위(1855~1908)가 그의 당숙이었다. 허위의 집안은 일제의 탄압에 견디다 못해 1912~15년 사이 서간도로 모두 망명한다. 하지만 1920년 경신참변(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가 만주 일대 독립군을 공격하며 대량 학살한 사건)을 피해 허형식 일가는 다시 터를 옮겨 하얼빈 부근 빈현에서 고단한 삶을 이어갔다.


그즈음 만주지역에서는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위원 중 검거를 피한 김동명과 조봉암, 김찬 등이 1926년부터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건설 임무를 띠고 조직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28년에 코민테른의 방침에 따라 조선공산당 각 정파는 해산 절차에 들어가고 중국공산당에 입당하게 된다.


당시 빈현은 훗날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 되는 최용건이 중국공산당 빈현지부 서기를 맡아 빈농과 고농(자기 땅 없이 지주나 부농에 고용된 농민)의 조직화에 박차를 가하던 곳이었다. 온 집안이 항일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보고 자란 배경, 그리고 소수의 지주가 대토지를 소유했던 빈현의 상황은 약관의 허형식을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사상으로 끌어들이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허형식은 최용건의 후원과 지도 속에 중국공산당 북만주특위를 비롯해 조선인 공산주의 관계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1930년 초 중국공산당에 입당한다.



당원으로 전선에 서다


허형식은 입당 직후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이하 ‘중공 만주성위’)의 메이데이 투쟁에 참여해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관을 타격, 일경에 맞서 투석전을 벌이고 영사관 내로 진입하는 등 적극적 투쟁을 벌였다. 이 일로 허형식은 첫 번째 구속을 겪지만 곧 풀려나고, 중공 만주성위의 신임과 주목을 받게 된다. 풀려난 허형식은 대중봉기를 주도하다가 1930년 후반 체포돼 심양형무소에 갇혔다. 이곳에서 그는 평생의 동지들을 사귀었는데, 그들은 이후 북한의 부수상이 되는 김책과 북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의 최고지도자 조상지였다.


옥중 생활은 길지 않았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일본이 벌인 중국 침략 전쟁의 시작)이 터지자, 당 조직은 옥에 갇혀 있던 이들을 구조했다. 이렇게 12월 말 풀려난 허형식은 본격적인 혁명의 길로 나섰다. 1932년 중공 만주성위 빈현특별지부 선전위원을 시작으로, 1934년 6월 동북반일유격대 합동지대 3대대 정치지도원, 1935년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 제1독립사 2단장, 1938년 6월 동북항일연군 제3군 제1사장을 거쳐, 1939년에는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 겸 3군장에 임명됐다. 이는 당시 만주지역 조선인으로서는 최고위직에 오른 몇 안 되는 경우였다. 참고로 이즈음의 김일성은 1로군 2방면군 군장이었다.


한편 일제는 1937년 전면적인 중일전쟁을 개시한다. 일본군은 1936년 4월부터 1939년 3월까지 3년간 만주지역 항일세력을 말살한다는 계획을 세워 토벌의 강도를 높이다가 1937년 겨울부터 본격화했다. 토벌은 동북항일연군 세력에 궤멸적인 타격을 가했다. 실제로 1938년 한 해 동안 일제에 귀순‧투항한 대원이 무려 2,742명을 헤아렸다. 이로써 1931년 구 동북군과 민족주의 계열, 중국 항일의용군 세력, 적색빨치산을 모두 포함해 25만 명 정도로 추정되던 만주 항일무장투쟁 세력은 1940년에 이르면 1,500여 명 수준으로 축소됐다.


일제가 관동군의 규모를 40만 명에서 76만 명으로 크게 늘리는 등 상황이 악화하자, 남만주와 동만주에서 활동하던 잔존 동북항일연군 세력은 ‘혁명역량을 보존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소련 블라디보스토크 부근의 남야영지와 하바로프스크 부근의 북야영지로 나눠 이동한다. 이때 최현, 최용건, 김일성, 주보중 등도 생존한 항일연군 세력과 함께 소련 경내로 들어갔다. 소련은 이들을 “소련 적군 88특별저격여단”으로 정식 개편했고 여단장에 주보중을 임명했다. 이들 중 훗날 1영장 김일성을 비롯해 “조선공작단”에 선발돼 1945년 9월 19일 원산에 소련군과 상륙한 세력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류세력이 된다.



북만주 무장투쟁의 마지막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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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흑룡강성 경안현 대라진 소릉하 입구에 있는 허형식 희생지 비.



허형식의 3로군도 형편은 다르지 않았다. 1940년 11월 말 3로군을 이끌던 장수전, 김책, 허형식 가운데 허형식을 제외한 둘은 소련 경내로 이동하지만, 허형식만은 상부의 지시도 거부한 채 완강하게 투쟁을 지속한다. 그 후 1년 정도 지난 1941년 김책이 다시 북만주지역에 합류해 소부대를 중심으로 유격투쟁과 대중사업을 병행한다. 허형식이 북만주에서 이동하지 않은 건 그의 혁명적 낙관주의와 더불어 ‘민족혁명전쟁론’을 견지했던 입장, 그리고 1941년 무렵 중국공산당의 독자성을 소련이 침범하고 있다는 데 크게 반발한 것 때문이었다.


만주에서 무장투쟁세력 대부분이 사라지자, 허형식의 3로군만 남은 북만주는 일제의 표적이 됐다. 한때 ‘남만주는 양정우, 북만주는 조상지’라 하여 ‘남양북조’로 불린 두 명의 걸출한 유격투쟁 지도자도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 1940년 2월 1로군 총사령관 양정우가 전사하고, 출당 조치에도 불구하고 유격투쟁을 지속했던 조상지가 1942년 2월 전사한다.


1942년 7월경 북만주지역 소부대 활동을 독려하는 한편 대중조직 점검도 마치고 돌아오던 허형식은 8월 3일 두 명의 경호원과 함께 만주국 경찰토벌대에 포위돼, 2시간의 격전 끝에 불꽃 같은 삶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33세였다. 허형식과 함께 북만주를 떠나지 않았던 박길송도 1943년 1월 전사하고, 같은 해 10월 김책이 생존 대원을 추슬러 1944년 1월 소련 경내로 들어감으로써, 동북항일연군을 중심으로 한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은 그 장엄한 막을 내린다.



<참고자료>


* 장세윤, 「동북항일연군과 허형식」, 『한국현대사와 사회주의』, 역사비평사, 2000.


* 유순호, 「북만주 항일의 별」, 문예운동사, 『문예운동』 통권 제63호(1999년 9월).


* 장세윤, 「해방 전후시기 만주지역 조선의용군과 동북항일연군의 동향」, 한국근현대사학회, 『한국근현대사연구』 제42집(2007년 9월).


* 김충석, 「소련 극동군 제88여단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 역사학연구소, 『역사연구』 제30호(2016년 6월).


* 장세윤, 『1930년대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51권),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신주백, 「과거 기억과 현재의 相存 - 1930년대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사」,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27권(2001년).


* 김성호, 「1930년대초 중국 동북조선민족과 항일무장투쟁」, 한국외대 역사문화연구소, 『역사문화연구』 제21권(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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