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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21.05.17 14:11

[기획 번역] 파리코뮌 150주년(2)

 

 

코뮌의 결의

 

 

 

번역자: ‘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 150년 전 탄생해 2달여간 지속하다 지배계급의 잔혹한 유혈진압으로 막을 내렸던 ‘파리코뮌’이 받는 평가다. 파리코뮌은 그저 ‘실패로 끝난 혁명’이 아니라, 당대부터 그 이후로까지 사회주의자들에게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질서’에 대한 영감을 끊임없이 불어넣은 원천이 됐다.

 

파리코뮌 150주년을 맞아 지난 3월 좌파 매체 <Left Voice>는 3회에 걸쳐 코뮌의 배경과 그 속에서 이뤄진 혁명적 조치들,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다루는 연재기사를 게재했다. <변혁정치>는 지난 호부터 다음 호까지에 걸쳐 이 연재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지면 분량 등의 문제로 원문을 상당히 압축해 번역한 점에서 한계가 분명하지만, ‘노동자권력의 원형’을 만들어냈던 파리코뮌의 경험에 독자의 관심을 환기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이번 호에 싣는 기사는 <Left Voice> 3월 18일 자로 게시된 Doug Enaa Greene의 글 “The Resolution of the Communards”를 축약해 번역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3회분 연재 중 두 번째다. 지난 <변혁정치> 125호(4월 15일 자)에서는 이 연재의 첫 번째 기사(“반란을 일으킨 코뮌군”)를 통해 파리코뮌의 역사적 배경과 탄생까지를 다뤘는데, 이해를 돕기 위해 이번 글을 보기 전에 일독을 권한다. 간략히 요하자면, 프랑스 정부가 프로이센(독일)과의 전쟁에서 패한 뒤 굴욕적 협정을 맺는 한편 그에 반발하는 민중에게 도리어 총구를 겨누려 하자, 가뜩이나 계급 간 불평등이 극심한 와중에 정부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며 파리 노동계급이 부르주아 정부를 내쫓고 도시를 장악하기에 이른 과정이었다(1871년 3월). 지난 호에 이어 이번 글에서는 노동계급이 스스로 자신들의 정부 곧 파리코뮌을 구성하고 어떤 혁명적 조치를 단행했는지 소개한다. 또한, 부르주아 정부의 유혈낭자한 진압으로 코뮌이 무너지는 비극적 결말을 묘사하고 있다.

 

참고로 번역 과정에서 추가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괄호() 혹은 대괄호[] 안에 번역자가 덧붙이거나 주석을 달았다. 원문에 있던 각주는 대부분 출처를 밝힌 것으로, 이 번역글에서는 옮기지 않았다.

 

 

- 번역: 기관지위원회

 

 

 

1871년 3월 18일, 국민방위대(파리코뮌을 지킨 노동계급의 무장조직. 자세한 내용은 지난 호 연재 참조)는 별다른 저항 없이 파리 시내의 모든 전략적 거점을 접수했다. 국민방위대가 파리에서 가장 큰 혁명조직이긴 했지만, 권력 장악을 미리 계획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권력은 사실상 국민방위대 수중에 떨어졌고, 그 권력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할 일만 남았다.

 

국민방위대 중앙위원회는 거의 즉각적으로 권력 이양을 결정했다. “합법적” 통치권을 확보하지 못했기에 자신들의 행동이 적법하지 않다고 판단한 국민방위대는 최대한 빨리 선거를 열기로 했다. 이에 따라 3월 26일, 파리 노동자민중은 새로운 ‘코뮌 평의회(Communal Council)’를 선출했다. 선거 결과는 여러 좌파 세력의 분포를 반영했다: 선출된 평의원 92명 대부분은 자코뱅파(1789년 프랑스대혁명 당시 급진파였던 ‘자코뱅’을 추종‧계승한 집단)이거나 블랑키주의자(소수 비밀결사 중심의 무장투쟁이 혁명의 관건이라고 믿었던 좌파 세력. 대표 인물이 혁명가 루이-오귀스트 블랑키(1805~1881)였다), 혹은 제1인터내셔널(마르크스가 지도적 역할을 수행했던 사회주의 노동자 정치조직으로, “국제노동자협회”를 말함) 소속이었다. 블랑키는 당시 부르주아 정부에 체포된 상태였음에도 평의원으로 뽑혔다.1

 

이렇게 파리의 합법정부로서 새로 구성된 코뮌 평의회는 국민방위대를 대체했다. 3월 28일, 붉은 깃발을 휘장처럼 내건 시청 건물 앞에서 이들은 파리코뮌이 성립했음을 공식 선포했다. 수천 명의 군중이 희열에 넘쳐 혁명가를 부르며 “코뮌 만세!”를 외쳤다. 같은 날, 코뮌 평의회는 희망에 찬 분위기 속에 1차 회의를 열었다. 코뮌은 첫 번째 조치로 블랑키를 명예 의장에 선출하는 한편, 사형제와 징병제를 폐지했다. 이제 국민방위대 혹은 무장한 인민이 유일한 군대였다.

 

비록 파리코뮌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지만, 그 짧은 기간에도 전례를 찾기 어려운 수준의 개혁안을 여럿 통과시켰다. 지금까지 이런 정부는 없었다: 공직자가 누리던 특권 일체를 철폐했으며, 선출된 대표자들이 받는 보수는 노동자 평균 임금 수준으로 제한했다. 게다가 모든 대표자는 인민에게 책임을 져야 했으며, 언제든 소환될 수 있었다. 마르크스가 목격했듯, “코뮌은 상비군과 관료라는 양대 지출 원천을 파괴함으로써 모든 부르주아 혁명의 슬로건, 즉 값싼 정부를 현실로 만들었다.”2

 

코뮌은 정부의 입법‧행정 기능을 융합함으로써 급진적 민주주의를 실현했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낡은 정부권력의 억압적일 뿐인 기관을 제거하는 한편, 그 정당한 기능을 ‘사회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권력’으로부터 떼어내 공동체에 책임지는 대리인들에게 돌려줘야 했다. 보통선거는 인민을 대표하지도 못하는 지배계급의 성원을 3년이나 6년에 한번씩 의회로 보내는 데 쓰이는 게 아니라, 코뮌을 구성하는 인민에게 봉사해야 했다.”

 

 

이외에도 코뮌은 여러 조치를 단행했다. 교회와 국가권력을 분리(정교분리)하고, 종교는 오로지 개인 영역으로 엄격히 제한했다. 빈집과 공공건물을 징발해 노숙자에게 주거를 제공하는 한편, 임대료 납부는 유예했다. 공공교육과 예술, 문화는 모두에게 열렸다. 코뮌은 프랑스 혁명력(1789년 대혁명 때 혁명파가 도입한 새로운 달력)을 부활시켰지만, 단순히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려던 게 아니었다. 단두대는 공개적으로 불태웠고, 프랑스 군국주의를 상징하던 방돔 광장 전승기념탑(나폴레옹 1세가 전쟁 승리를 기념해 세움)은 군중의 환호 속에 쓰러졌다.

 

코뮌은 프랑스 삼색기가 아니라 붉은 깃발을 사용했다. “코뮌의 깃발은 세계 공화국의 깃발”이기 때문이었다. 외국인 노동자는 적이 아니라 투쟁의 동지였다. 여러 폴란드 망명자들이 자랑스럽게 코뮌에 동참해 싸웠는데, 그중에는 전직 장교 출신이자 국민방위대 지휘관으로 복무한 야로스와프 돔브로프스키(Jaroslav Dombrowski, 1836~1871) 같은 인물도 있었다.

 

파리코뮌이 생존한 기간은 72일에 불과했다. 그만큼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온전한 계획을 세워 집행할 시간도 턱없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뮌은 지난 수백 년을 이어온 사회‧경제‧정치적 불평등을 뒤집기 위해 담대하게 첫 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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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1년 3월 28일, 파리코뮌 성립이 공식 선포됐다. [사진: wikipedia]

 

 

 

노동제 통제

 

헝가리 출신으로 제1인터내셔널 회원이었던 레오 프랑켈(Leo Frankel, 1844~1896)은 마르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만약 계급관계를 급진적으로 변혁할 수 있다면, 3월 18일 혁명(파리코뮌을 가리킴)은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혁명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프랑켈은 바로 그 “급진적 변혁”을 특히 더 실감했다. 그 자신이 코뮌의 노동‧상업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돼 활동했기 때문이다. 이 위원회에는 제1인터내셔널 회원이 많았는데, 여기에서 프랑켈은 노동계급의 이해를 수호하는 여러 개혁에 착수했다. 가령, 노동자들을 가혹하게 쥐어짜던 전당포를 없애는 한편 제빵업에 만연한 야간노동을 철폐하고, 공장주들이 노동자들에게 물리던 각종 벌금도 폐지했다.

 

하지만 이 위원회는 훨씬 더 야심찬 계획을 갖고 있었다. 보불전쟁과 그에 뒤이은 프로이센군의 파리 봉쇄3로 파괴됐던 경제활동을 재개하겠다는 것이다. 혁명 기간에 자본가들 다수가 공장을 버리고 파리에서 도망친 결과, 수천 명의 실업자가 발생했다. 프랑켈은 코뮌에 법령안을 제출하며 이 공장들을 장악해 노동자들이 스스로 운영하자고 주장했다.

 

 

“경영자들은 여러 사업장을 버려둔 채 달아났다. 노동자 생계나 공동체에 대한 책임은 안중에도 없었다. 이들의 비겁한 탈주 때문에 사회 유지에 필수적인 각종 생산활동이 멈췄고, 수많은 노동자가 생존 위기에 처했다. 이런 사업장은 이제 노동자들이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법령은 온전한 국유화를 뜻하지는 않았다. 적용 대상을 ‘버려진 공장’에 한정하고, 사업주에게 보상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동조합은 이 조치를 환영했다. 재단사 노조는 이렇게 극찬하기도 했다: “이만큼 노동계급이 자기 권리를 주장할 기회는 그간 어떤 정부도 제공하지 못했다. 이를 포기한다면, 노동계급의 해방이라는 대의를 배신하는 것과 다를바 없다.” 인쇄 노동자들은 ‘협동조합 소유’라는 형태를 사회주의로 향하는 중요한 일보전진이라 여겼다: “우리는 노동자 협동조합 체제로 독점을 폐지하고 고용주를 몰아낼 것이다. 착취하는 자도, 착취당하는 자도 없다. 노동을 통한 번영이 아니라면, 투쟁 속의 죽음을!”

 

 

제1인터내셔널은 코뮌의 행보를 새 시대의 여명으로 받아들이며 두 팔 벌려 맞이했다.

 

 

“인민-곧 프롤레타리아트는 승리했다.… 수많은 격동을 지나, 우리는 마침내 단결과 정의로 뭉쳐 혁명에 성공했다. 이 혁명은 무엇보다 사회혁명이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통상적인 왕조 교체도 아니고, 본질적으로 왕정(王政) 제도를 유지한 온건 공화정부도 아니다. 이 혁명은 우리의 모든 사회적 요구를 표현하는 새로운 정치 형태를 확고하게 세웠다.”

 

 

이렇듯 프랑켈과 노동자들이 열정을 쏟아 부었지만, 노동자 통제 법령의 실제 적용은 다소 무계획적이고 혼란스러웠다. 노동자 통제는 사적 소유 기업과 위태롭게 공존했다. 엄중한 군사 대치 상황에서 진정한 경제계획에 힘을 쏟기란 불가능했다. 결국 노동자 협동조합이 운영한 사업장은 수십 곳에 그쳤고, 그 모두가 민주적으로 조직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모든 한계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통제 법령은 이윤과 시장 원리가 경제를 조직하는 유일한 법칙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냈다. 코뮌은 연합한 생산자들이 스스로를 위해 경제를 계획하는 게 가능함을 보여준 것이다.

 

 

 

여성해방

 

프랑스 중간계급은 코뮌의 노동계급 여성을 ‘불 지르는 여자들’이라고 불렀다. 이 여성들이 이른바 ‘피의 일주일’(Bloody Week: 1871년 5월, 부르주아 정부가 파리코뮌을 잔혹하게 진압하며 벌인 학살극) 동안 여러 건물과 사유재산에 불을 질렀다는 것이다. 가부장제에 찌든 부르주아지에게 이 ‘불 지르는 여자들’은 ‘코뮌이 가족과 종교, 나아가 문명 자체를 파괴할 금수 같은 욕망을 불러일으켰다는 증거’였다. 이처럼 ‘불 지르는 흉포한 여자들이 프랑스를 잿더미로 만든다’는 류의 얘기가 대체로 반동적 신화에 근거한 반면, 코뮌은 실제로 노동계급 여성의 해방을 추구했다. (부르주아 정부군을 몰아내고 파리 시내를 장악한) 3월 18일부터 최후 항전을 벌인 5월에 이르기까지, 여성은 코뮌의 모든 과정에 참여했다. 이들에게 코뮌은 자신들의 혁명이었고, 교사‧간호사에서 군인‧정치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역할을 맡아 수행했다. 코뮌 여성에게 사회적 평등은 정치적 문제와 분리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하나가 이른바 “몽마르트의 붉은 처녀”라 불린 무정부주의자 루이즈 미셸(Louise Michel, 1830~1905)이었다. 원래 미셸은 프로이센군의 파리 봉쇄 당시 간호사로 일했지만, 이후에는 감시위원회(Vigilance Committee: 파리 봉쇄 당시 식량 배급 등의 문제를 해결하려 조직한 기구로 시작했지만, 이후 파리코뮌과 혁명을 지지하고 수호하는 대중조직으로 발전)와 국민방위대에서 활약했다. 파리코뮌에서 그는 라울 리고(Raoul Rigault, 1846~1871)와 테오필 페레(Theophile Ferre, 1846~1871) 같은 블랑키주의자들과 함께 했다. 미셸은 한때 (부르주아 정부 수반) 아돌프 티에르를 암살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는데, 블랑키주의자 동료들이 설득해서 말릴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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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뮌에서 앞장서 싸운 무정부주의 투자 루이즈 미셸. [사진: wikipedia]

 

 

미셸은 ‘피의 일주일’ 동안 바리케이드에서 싸우다가 티에르가 이끈 반(反)혁명군, 곧 ‘베르사유군’(아돌프 티에르를 수반으로 하는 부르주아 정부가 파리에서 쫓겨난 뒤 베르사유를 거점으로 삼은 데서 유래)에 붙잡혔다. 이후 재판에 회부된 미셸은 자신이 파리코뮌에서 수행한 역할을 당당하게 옹호했다. “나는 코뮌의 공범으로 기소됐다. 그렇다. 코뮌이 불러일으키고자 했던 사회혁명은 바로 내가 가장 간절히 원하는 바이기도 하다. 내가 코뮌의 주동자 중 하나로 지목됐다는 게 영광일 뿐이다.” 재판 결과 미셸은 국외로 추방당했지만, 후일 생존한 코뮌 참가자들이 사면되면서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굴하지 않고 무정부주의 투사로 남았다.

 

파리코뮌은 여성을 위한 여러 정책을 도입했다. 자유로운 결혼을 인정(과거에는 종교 예식을 치르지 않으면 정식 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 구습을 철폐한 것)하는 한편, 1816년 이후 불법화된 이혼도 다시 허용했다. 나아가 이른바 “혼외” 혹은 사실혼 관계에서 태어난 자녀의 권리도 공인함으로써 결혼 여부에 따른 여성 차별을 없애고자 했다.

 

이러한 조치는 코뮌에서 가장 중요한 여성 조직 중 하나였던 ‘여성동맹’(Union des Femmes)의 지지를 받았다. 여성동맹 핵심 조직자 엘리자베트 드미트리에프(Elisabeth Dmitrieff, 1851~1910)는 러시아 하층계급 출신의 20세 청년으로 제1인터내셔널 회원이었으며, 런던에서 마르크스의 비서로 일하기도 했다. 절정기에 달했을 무렵 여성동맹 회원 수는 3천~4천 명을 헤아렸고, 대부분 노동계급 출신이었다.

 

여성동맹은 노동시간 단축과 동일임금, 노동조합과 협동조합 등 여성을 위한 일련의 즉각적인 개혁을 요구했다. 이들은 여성 억압의 토대를 공격하지 않고선 코뮌의 혁명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코뮌의 원칙은 모든 특권과 불평등을 일소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에 따른 차별 없이 모든 주민의 정당한 불만을 수렴해야 한다. 그러한 차별은 지배계급의 특권을 유지하는 수단일 뿐이다.”

 

이렇듯 코뮌이 성취한 과업은 상당했다. 하지만, 여성해방에 대한 약속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루지 못한 과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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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르주아 정부군에 맞서 코뮌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여성들. [사진: wikipedia]

 

 

 

혁명을 사수하는 것

 

파리코뮌은 탄생 첫날부터 중대한 난제에 직면했다. ‘군사적 방위와 사회개혁 가운데 어디에 집중할 것인가?’ 이는 결코 추상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부르주아 정부군은 호시탐탐 파리를 재점령할 기회를 엿보며 혁명을 피로 물들이려 했다. 에밀 뒤발(Emile Duval, 1840~1871)을 비롯한 블랑키주의자들은 ‘코뮌이 살아남으려면 선제공격이 필수’라고 생각했다.

 

승리할 가능성이 가장 컸던 시점은 혁명의 막이 오른 초창기였다. 당시만 해도 프랑스 정규군 대부분이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한 결과) 포로 신세였고, 티에르가 실제 지휘하는 병력은 고작 12,000명에 불과했다. (파리코뮌을 지키던) 국민방위대가 수적으로 우세했기에, 재빨리 공격에 나선다면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코뮌 평의회는 내전을 피하고자 부르주아 정부와 협상에 나섰다. 헛된 희망이었다. 티에르는 ‘이미 내전이 시작됐고, 어느 한쪽이 상대를 꺾어야만 끝난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블랑키주의자 가스통 다 코스타(Gaston Da Costa, 1850~1909) 역시 그에 못지않게 이를 잘 알고 있었다: “베르사유 국민의회(티에르의 부르주아 정부를 가리킴)에 돌파구를 낼 수 있는 건 법령이나 선언이 아니라 포탄이다.”

 

결국 국민방위대는 4월 4일 공세에 나섰지만, 기본적인 전쟁 준비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리사가레(Prosper-Olivier Lissagaray, 1838~1901. 코뮌에 가담한 사회주의자로서, 자신의 경험과 생존자 증언을 바탕으로 <1871년 파리코뮌의 역사>(History of the Paris Commune of 1871)라는 저술을 남김)의 묘사에 따르면, “국민방위대는 심지어 가장 기초적인 경계조차 무시했고, 대포‧탄약차‧구급차를 모을 줄도 몰랐으며, 명령 시달도 잊었고, 스며드는 안개 속에 병사들을 음식도 없이 몇 시간 동안 놔두기도 했다. 대원들은 각자 좋아하는 사람을 지휘자로 뽑았다. 탄약통도 없는 사람이 수두룩했고, 이 공격을 단순한 시위쯤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이 공세는 코뮌에게 완전히 재앙이었다.

 

코뮌이 초기 공세를 지체한 것은 티에르에겐 이득이었다. 티에르는 군대를 재정비하는 한편, 비스마르크(당시 프로이센 수상)에게 ‘포로로 잡힌 프랑스 정규군을 송환해달라’며 협상을 벌였다. 이렇게 두 달이 지나면서 부르주아 정부는 정규군을 재건하고 파리를 포위해 최후의 일격을 준비했다. 코뮌군은 두 번 다시 공세를 취하지 못했다. 제대로 훈련받지도 못했고, 일사불란하게 통솔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두 달 동안 국민방위대 사령관이 다섯 번이나 바뀌었지만, 절실히 필요했던 군사 지도력을 발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코뮌은 거대한 혁명적 에너지로 충만했지만, 명확한 지도력이나 계획은 없었다. 코뮌 평의회는 각양각색의 이해관계와 이념, 성격이 혼재하며 효율적인 통치기구로 기능하지 못했다. 뛰어난 정신적‧정치적 권위를 제공할 인물은 코뮌군 사이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그 결과, 코뮌은 무기력과 혼란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블랑키주의자들은 적을 이기려면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라울 리고(블랑키주의자였던 그는 당시 코뮌의 치안 업무를 맡고 있기도 했다)는 코뮌의 혼란상을 보며 자신들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은 블랑키뿐이라고 믿었다: “블랑키 없이는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그가 온다면, 모든 게 가능하다.” 문제는 블랑키가 부르주아 정부에 붙잡혀 투옥된 상태라는 점이었다. 그를 석방하기 위해 티에르와 협상도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벼랑 끝까지 내몰린 심정이었던 라울 리고는 티에르에게 ‘파리 대주교를 비롯해 코뮌에 포로로 잡힌 70여 명의 인사를 보내줄 테니 블랑키를 풀어 달라’고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마르크스는 ‘티에르가 코뮌의 타고난 지도자를 빼앗은 것’이라고 평했다: “코뮌은 당시 티에르에게 억류돼 있던 블랑키 단 한 명을 대주교 및 다수의 성직자들과 교환하자고 수차례 제의했다. 티에르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블랑키를 석방하면 코뮌에 머리를 달아주는 셈이지만, 대주교는 시체가 됐을 때 자신의 목적에 가장 잘 봉사하리라는 점을 알았기 때문이다.”4

 

 

 

피의 일주일(Bloody We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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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의 일주일 이후 폐허가 된 파리 시내. [사진: wikipedia]

 

 

5월 중순에 이르러 파리코뮌의 운명은 이미 결판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티에르의 군대는 대거 운집해 코뮌을 무너뜨릴 준비를 마쳤고, 모두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남은 건 그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5월 21일, 부르주아 정부군은 파리 성곽 가운데 방비가 풀린 지점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그날 밤까지 6만 명이 넘는 적이 파리 시내로 진입했다.

 

티에르는 코뮌을 완전히 분쇄해 “한 세대에 걸쳐 질서를 회복”하겠다고 했으며, 그에 따라 투항 권유 같은 것도 아예 하지 않았다. 이후 7일간 벌어진 참극에 대해 역사는 “피의 일주일”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 일주일에 걸쳐 살해당한 희생자 수는 (프랑스대혁명 당시) 1793~94년 자코뱅 공포정치가 벌어지던 근 1년간 목숨을 잃은 사람보다 더 많았다. 부르주아 정부군이 파리를 재점령하면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어림잡아 2만~2만 5천 명가량이 마구잡이로 학살당했다. 마르크스가 지적했듯, 부르주아지가 저지른 이 잔학한 폭력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부르주아 질서의 문명과 정의는, 이 질서의 노예들이 자신들의 주인에게 반항할 때마다 참으로 격렬한 빛을 내며 등장한다. 그때 이 문명과 정의는 노골적인 야만과 무법적인 복수로서 나타난다.”5

 

5월 28일, 페르 라셰즈(Pere-Lachaise: 파리 시내에 있는 공동묘지)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코뮌군이 사살되며 파리는 “질서”를 회복했다. 코뮌군 수천 명이 감옥에 갇혔고, 그들 중 다수가 굶주림과 목마름 속에 목숨을 잃었다. 저 멀리 뉴칼레도니아(New Caledonia: 호주 동쪽의 태평양에 자리 잡은 섬으로, 당시 프랑스 식민지)로 추방된 이들도 있었다. 1880년에 사면령이 내려지고 나서야 이들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됐다.

 

비록 패배로 막을 내렸지만, 파리코뮌은 불꽃으로 타오른 하나의 선언이었다. 코뮌은 자본주의적 착취와 억압을 떨쳐낸 새로운 세계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러나 코뮌에서 영감을 찾는 데 그쳐선 안 된다. 노동자의 항구적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우리는 파리코뮌의 성공과 실패 모두를 들여다봐야 한다. (다음 호에 계속)

 

 

 

1 ‘블랑키’와 ‘블랑키주의’, ‘제1인터내셔널’에 관해서는 지난 호 연재 참조.

 

 

2 인용문 번역은 칼 맑스(안효상 옮김), 『프랑스 내전』, 박종철출판사, 2005, p.90 참고.

 

 

3 ‘보불전쟁’과 ‘파리 봉쇄’에 관해서는 지난 호 연재 참조.

 

 

4 인용문 번역은 칼 맑스, 앞의 책, p.120 참고(일부 문구 수정).

 

 

5 인용문 번역은 칼 맑스, 앞의 책,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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