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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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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를 위한 유럽은 없다

사회적 합의주의 유럽의 귀결, 신자유주의와 극우의 발호

 

이주용정책국장

 

헬조선이라는 말이 한창 떠돌 때 같이 유행하던 신조어가 탈조선이었다. 절망적인 현실 앞에 차라리 이 나라를 떠나고 싶다는 심리를 반영한 것이었다. 많은 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은 유럽이었다. 사람들은 유럽이라는 이미지에서 사회안전망과 복지제도를 떠올렸다. 노동자의 권리와 생활수준 역시 헬조선과는 차원이 다른 신세계일 것만 같이 느껴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거대한 환상이다. 유럽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서 비켜난 다른 세계가 아니라 바로 그 신자유주의의 광풍을 정통으로 맞은 핵심 세계다. 특히나 유럽연합(EU) 창설과정에서 강요된 대대적인 긴축은 사회보장과 복지국가체제를 적극적으로 파괴했다.

사회적 합의주의 혹은 사회적 대타협의 원류라 불리는 유럽. 노동자와 기업이 대화와 타협으로 한 발씩 양보하고 경제성장과 사회보장을 모두 이뤄냈다는 신화는 경제위기 앞에서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아무리 세심하게 설계된 제도나 모델, 혹은 사회적 기구라 하더라도 현실의 권력관계 앞에서, 힘을 내세운 자본의 이윤논리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졌다. 신자유주의 유럽은 노동자들에게 양보를 넘어 희생을 강요했다. 다름 아닌 사회적 합의라는 이름으로.

 

사회적 합의주의, 노동유연화를 포장하다

사회적 합의주의의 핵심은 언제나 하나였다. 임금이나 고용이 상대적으로 나은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후퇴시키는 것. 이렇게 깎인 노동자들의 몫은 상대적으로 열악한 노동자들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임금과 고용은 경제위기와 함께 악화일로, 하향평준화의 길을 걸었다. 더불어 이 합의모델에서 자본가단체들과 함께 한 축을 담당한 것이 노총과 진보정당이었던 만큼, 현장노동자들의 불만과 저항은 위로부터 관료적으로 통제됐다.

사회적 합의주의 모델의 대표격인 스웨덴을 보자. 1938년 스웨덴 노총과 사용자연맹은 수도 스톡홀름 인근의 잘츠요바덴에서 장기적 노사협정을 맺는다. 이른바 잘츠요바덴 협약으로서, 노총과 사용자연맹이 중앙교섭으로 임금노동조건을 결정하는 대신 고임금 노동자들의 임금을 억제하고 현장의 쟁의행위를 통제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여타 유럽 국가들보다도 격렬했던 스웨덴 노동자투쟁은 이 노사협조체제 이후 유럽에서 가장 미미한 수준으로 전락한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1951, 스웨덴 노총 소속 경제학자 렌과 마이드너는 대기업 노동자들의 임금삭감 상시적 해고와 구조조정 취업소개와 실업부조 등 이른바 유연안정성 모델을 확립해 노동자들의 임금과 고용안정을 희생시켜 한국의 재벌처럼 소수 가문이 장악한 대기업 이윤확보에 일조했다. 마침내 1970년대 경제위기가 닥쳤을 때 스웨덴 사용자연맹은 노총과의 합의를 파기하고 노동유연화를 밀어붙였으며, 스웨덴 사민당 정부 역시 민영화, 실업수당 축소 등 복지삭감에 나섰다. 자본이 잃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한국에서 노무현정권 시기부터 도입하려 한 네덜란드 모델은 사회적 합의의 외피로 신자유주의를 전격 도입한 전형적인 사례다. 1982년 네덜란드 우파 정부는 경제위기와 높은 실업률에 직면하여 네덜란드 노총과 사용자 단체들 간의 합의인 바세나르 협약을 주도했다. 이 협약은 경제위기의 원인을 노동자들의 임금과 고용안정 탓으로 돌리며, 그에 따라 임금삭감 및 시간제 일자리 양산을 해결책으로 내놓았다. 네덜란드 정부는 체계적으로 전일제 정규직 일자리를 축소하고 그 자리를 시간제 일자리로 채우는 방식으로 자본의 부담을 덜어주었으며, 이 연장선에서 각종 복지급여 축소 등 긴축정책을 추진했다. 1996년에는 유연안정화 협약을 통해 정규직에 대한 추가적 임금삭감과 노동유연화 조치를 취했다. 박근혜 역시 양질의 시간제 일자리라며 네덜란드 모델을 도입하려 했는데, 그 본질은 결국 임금노동조건의 하향평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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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스웨덴 노총 대표와 경총 대표가 잘츠요바덴 합의문에 서명하고 있다. 


사회적 합의가 아름다웠다면, 어떻게 극우가 설치고 있는가?

스웨덴에서 그리스, 영국에서 오스트리아에 이르기까지 유럽 전역에 걸쳐 극우정당의 발호는 지난 수년간 하나의 추세로 굳어지고 있다. 이 극우정당들은 하나같이 EU 탈퇴를 외치며 신자유주의 EU체제에서 수탈당한 빈곤한 대중으로부터 인기몰이에 나섰고 그 가운데 일부는 집권까지 넘보며 주류 정당들을 위협하는 수준까지 성장했다.

사회적 합의주의가 아름답고 성공적인 것이었다면, 극우정당들이 어떻게 이 정도로 대중적 지지를 받으며 성장할 수 있었단 말인가? 바로 앞서 언급한 스웨덴과 네덜란드는 사회적 합의주의의 전형으로 한국에서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널리 설파하고 있지만, 정작 그 스웨덴과 네덜란드에서 극우정당이 원내 제2, 3당으로 올라서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변명조차 없다. 현재 스웨덴의 공식실업률은 7%를 상회하고 청년실업률은 20%에 달한다. 네덜란드 실업률 역시 비슷한 수준이며 청년층의 저임금 노동 비율은 절반을 넘어선다.

극우정당들은 이 현실의 불만지점을 파고들었다. 그들은 겉으로라도 복지를 전면에 내세운다. 인종주의와 이민자 혐오를 더해, ‘외부자들이 아닌 내국인들의 복지 회복을 설파한다. 파시즘이 유태인 혐오만으로 설명될 수 없듯, 사회적 합의라는 미명 하에 임금도, 고용도 빼앗긴 노동빈곤층과 대중은 이성을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 생존권을 잃었기 때문에 극우정당에 흔들린다. 사회적 합의주의의 귀결은 오늘날 유럽의 비극으로 펼쳐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