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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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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17.12.15 05:58

어리상수리혹벌

 

숲정이(마을 가까이 있는 숲) 길을 걷는다. 아파트로 둘러싸인 작은 숲정이엔 깊은 산속보다 사람 곁을 더 좋아하는 상수리나무가 가장 흔하다. 무성하던 상수리나무 잎이 지면 숲길은 텅 빈 듯하다. 잎이 지니 그제야 보이는 것도 있다. 잎사귀에 가려 보이지 않던 벌레혹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언뜻 보면 아직 떨어지지 않은 도토리쯤으로 보이지만 잘 보면 도토리보다는 자라다만 작은 밤송이를 더 닮은 털북숭이 어리상수리혹벌 벌레혹이다.

벌레혹은 곤충이나 진드기, 선충, 균 따위가 식물을 자극해서 식물 조직이 부풀어 오른 것이다. 벌레혹은 잎이나 꽃, 줄기, 뿌리, 어디서나 생긴다. 식물은 벌레가 산란관을 꽂고 알을 낳거나 알을 까고 나온 애벌레가 식물을 갉아 먹으면 그걸 막아내려고 식물 조직을 부풀려서 알이나 애벌레를 감싸는데, 벌레는 오히려 부푼 벌레혹을 집으로 삼아 살아간다. 벌레혹은 그 자체가 영양가 높은 음식이다. 애벌레는 벌레혹 안에서 벌레혹을 먹으면서 자란다. 벌레혹은 온도와 습도를 유지해 주고, 병원균이나 천적을 막아 주는 훌륭한 벌레집이다.

벌레혹을 만드는 곤충 종류는 많다. 파리 무리, 벌 무리, 나방 무리, 딱정벌레 무리, 매미 무리 따위에 드는 많은 곤충이 있다. 그 가운데 참나무에 벌레혹을 만드는 곤충은 벌 무리에 속하는 혹벌 종류가 가장 많다. 상수리나무 가지에 달린 게 열매가 아니라 벌레혹이라는 걸 알고 나면 숲 여기저기에서 벌레혹이 보이기 시작한다. 벌레혹은 주로 키가 작은 어린 나무에서 더 잘 생겨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상수리나무 옆에서 함께 자라는 굴참나무 가지엔 구슬처럼 동글동글하게 생긴 참나무가지둥근혹벌(가칭) 벌레혹이 보인다. 숲 속 놀이터 옆 굴참나무엔 가지마다 온통 이 벌레혹이 달렸다. 갈참나무 가지에선 갈참나무혹벌, 벌레혹을 찾았다. 상수리나무 아래 쌓인 낙엽엔 작은 구슬 같은 참나무잎혹벌 벌레혹이 붙어 있다. 벌레혹 여러 개가 잎사귀 측맥마다 조르르 달린 것도 있다. 낙엽을 헤치고 보면 부엽토 위엔 잎에 붙어 있다 떨어진 벌레혹들이 보인다. 구슬 같은 벌레혹, 둥글납작한 벌레혹, 둥글납작한데 털이 난 벌레혹, 아주 작은 여러 가지 벌레혹 수천수만 개가 쌓여 있다. 상수리나무는 이렇게 많은 벌레혹을 만들어 냈지만 지치거나 병든 기색이 없다.

눈깔사탕 크기만 한 어리상수리혹벌 벌레혹을 가만 들여다보면 또 다른 세계를 발견하게 된다. 벌레혹을 잘라 보면 겉껍질 속에 작은 애벌레 방이 단단한 속껍질에 쌓여 있다. 애벌레방에는 애벌레 한 마리만 산다. 그런데 어른벌레가 빠져나간 벌레혹엔 구멍이 여러 개 나 있는 게 있다. 벌레혹에는 어리상수리혹벌만 사는 게 아니라 겉껍질 속 육질에 더부살이하는 혹벌이나 나무좀이 살고, 어리상수리혹벌이나 더부살이하는 혹벌, 나무좀에 기생하는 기생벌이 산다. 기생벌은 지난여름 벌레혹이 단단해지기 전 긴 산란관을 찔러 넣고 알을 낳았을 것이다. 기생하는 벌레들은 먼저 어른벌레가 되어 혹을 뚫고 나가고, 어리상수리혹벌은 늦은 가을에서 이른 봄 사이 껍질을 뚫고 나와 겨울눈에 알을 낳는다. 그리고 빈 혹은 가지에 그대로 남아 있어 딱정벌레, 거미, 개미 들이 월동하거나 생활하는 공간으로 이용된다.”[<식물혹의 세계>, 임효순지옥영, 현진사] 상수리나무가 식물 조직을 부풀려 만든 벌레혹에는 어리상수리혹벌이 살고 더부살이하는 혹벌과 기생벌이 살고, 이듬해 빈 벌레혹은 개미가 들어와 알을 낳고 사는 개미집이 되고 다시 겨울이 되면 여러 벌레들이 깃들어서 겨울을 나는 겨울별장이 된다. 벌레혹은 이보다 더 많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품고 있을 것이다.

가끔 시내로 나갈 때면 싹 바뀐 거리 풍경에 깜짝 놀란다. 도시재개발, 도시재생사업으로 도시는 익숙해질 틈이 없이 빠르게 바뀐다. 도시 변두리 마을에서도 오래된 옛집이 몇 주 만에 음식점과 카페로 바뀌곤 한다. 벌레혹만큼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던 건물, 골목, 거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새로 단장을 한 곳은 임대료가 오르고 오래 전부터 살아온 세입자들은 쫓겨나 버렸다. 셀 수 없이 많은 벌레들이 깃들어 사는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마을과 삶을 닮을 수 있는 정감 어린 거처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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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강우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