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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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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 없는 투쟁의 그늘

 

토닥이(노동자뉴스제작단)서울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는 공장 안에서 권리 의식을 자각한 노동자가 노조로 조직되는 것을 바라보는 자본가의 마음에는 그것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적어도 노조가 한 번 조합원을 모았다 하면 만 명, 이만 명을 모아, 공장에서 일할 때 입으라는 똑같은 옷을 입고, 일할 때 쓰라고 한 지게차를 타고, 공장 문을 박차고 나가 도심을 휘젓고 다니는 노동자의 두려움 없는 기세에 마주하게 되는 자본가는, 짧은 순간,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인다, 라고 생각한다.

 

두 개의 파업

87년 대투쟁 때, 현대중공업 자본은 노동자들이 만들어 낸 노동조합을 끝까지 교섭단체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투쟁의 기세가 꺾이지 않자, 마지못해 노동조합을 인정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노조를 인정하기는 했지만, 자본은 구속수배 노동자들에 대한 해결 약속은 지키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1년여 만인 1988년 말에 다시 투쟁에 나서기로 한다. 자본은 이 투쟁을 막기 위해 당시 최고의 노무관리자, 노조파괴 전문가인 제임스 리를 데려온다. 노무관리자라는 이름의 노조 때려잡는 깡패를 데려와 투쟁을 준비하는 선진노동자들에게 식칼테러를 했다. 칼에 찔려 들것에 실려 가는 동료노동자의 모습은 노동자대중투쟁을 또 다시 불러 일으켰고, 선진노동자들은 바리바리 싸들고 서울 계동 현대사옥 앞에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천막농성에 돌입했다. 결국 자본은 노동자의 요구를 들어줬고, 128일간의 투쟁은 그렇게 끝났다. 그리고 다음 해, 이제 자본은 더 지능적이고 대담해진다. 먼저 도발을 시작했다. 노조위원장은 구속으로, 수석부위원장은 수배로, 지도부를 묶고, 남은 지도부가 총파업을 결정하자, 1만여 명의 경찰 병력을 동원해 노동자는 현장으로, 투쟁지도부와 선진노동자 78명은 82미터 상공 골리앗 위로 몰아넣었다. 준비 없이 올라간 골리앗에서 죽을 고생 끝에 농성자들은 눈물을 머금고 점거 13일 만에 내려온다. 이른바 골리앗 투쟁은 노동자의 항복 선언이었고, 현대 자본의 노동자 투쟁에 대한 승리이자 노동에 대한 두려움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공간과 사람이 자아낸 기억의 편린

이 두 개의 투쟁, ‘128일 투쟁골리앗 투쟁을 우리는 <두 개의 파업>*에 담았다. 87년 이후 3년간, 현대중공업에서 있었던 노동자의 두려움 없는 투쟁의 시간과 자신의 치사하고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본능이 두려움으로 잠시 흔들렸던 자본가의 시간이 담겨있다. 현중노동조합 3부작 중 2부에 해당하는 이 작품은 총 17개 단락으로, 단락이 교차하면서 자본과 노동 간의 치고받는 긴장 구조를 축으로 한 전형적인 인터뷰 형식의 다큐멘터리이다. 전체 작품 분량의 1/3이 인터뷰이다. 나머지 2/3도 인터뷰를 위한 가교 역할이 크다. 인터뷰는 압도하는 분량 뿐 아니라 128일 투쟁과 골리앗 투쟁을 기억하는 노동자의 개인적인 감정을 잘 담아내서, 작품의 전체 정서를 통일되게 만들어내는 데 결정적이다. 인터뷰가 서사 구조의 핵심인 작업에 있어서 모범 사례가 될 만한 작품이었다.

연출자는 인터뷰 촬영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당시로서는 처음 시도해보는 스튜디오개념을 적용한 촬영이었다. 현대중공업 인근의 건물 지하에 있는 한 공간에서 모든 인터뷰가 이루어졌다. 이 닫힌 공간에 뒤에 검은 천을 두르고 썰렁한 의자를 하나 놓고, 그곳에 조명을 비추고, 그 조명 아래에서, 노동자들은 6~7년이 지난 128일 투쟁과 골리앗 투쟁을 회상했다. 그 공간과 노동자로부터 나오는 기이한 집중력과 서늘한 정서가 인터뷰 내내 가득했다. 회상하는 노동자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더 이상 ‘128일 투쟁골리앗 투쟁같은 투쟁을 다시 할 수 없다는 것을. 열패감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의 분노, 슬픔, 씁쓸함이 인터뷰 공간을 지배했고, 그 정서가 영상에 고스란히 전해왔다.

이 작품의 인터뷰를 상상하고 실제로 만들어낸 연출자는 이 작업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96년에 벌인 노뉴단의 눈싸움(참조 : 변혁정치 47, 22눈싸움’)으로 이번 촬영이 마지막 작업이 되었고, 이후 그 친구는 영상 작업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아이디어와 테크닉과 추진력을 모두 갖춘, 아쉬운 연출자였다. 자본에 대한 노동의 가장 폭발적이고 두려움 없는 투쟁의 시간들 뒤에 깔린, 그때는 보지 못한 노동자의 두려움 없는 투쟁의 깊은 그늘을 느껴지게 만든 것은 그 친구의 인터뷰를 다루는 뛰어난 역량이 없었다면 성취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 <두 개의 파업>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사 3부작, 미포만의 붉은 해 (2) : 1998/ 90/ 제작 : 현대중공업노동조합-노동자뉴스제작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