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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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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완전고용에 가려진 진실

 

이주용정책선전위원장

 


최근 신규 대학졸업자 취업률이 97.5%에 달하고, 전체 실업률은 2.5%에 불과해 경제학자들이 완전고용상태에 가깝다고 평가하는 일본. 고령화 속도가 빨라 생산가능인구가 급속히 줄어, 사업주들이 일할 사람을 찾아 헤맨다는 얘기를 흔치 않게 접할 수 있다. 기업들이 노동자들을 모셔오기에 열을 올린다는 말까지 나오면서 마치 일본의 노동자들은 일자리 걱정 없이 안정적이고 여유로운 노동조건을 누릴 것 같은 인상마저 준다. 지표를 보면, 근래 취업자 수 증가율이 대폭 줄어들고 특히 청년실업률이 10%를 넘어선 한국과는 대조적이다. 과연 일본은 노동자들에게 희망의 나라가 된 것일까?

지난 629, 일본 의회에서는 모순적인 장면이 펼쳐졌다. 이 날 일본의 상원의회인 참의원은 아베 정부가 일하는 방식 개혁이라는 이름을 붙인 일련의 노동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일본의 고질적인 장시간노동 관행을 근절하겠다는 게 법안의 표면적인 목적이었다. 참의원 본회의장에는 과로에 시달리다 목숨을 잃은 노동자들의 유족들이 상복을 입고 희생자들의 사진을 든 채 참관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족들이 이 날 방청에 나선 이유는 해당 법안 통과에 반대하기 위해서였다. 과로사 피해가족들이 장시간노동을 근절하겠다는 법안에 항의한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하지만 문제는 법안 자체에 있었다. 명분과는 달리, 이 법안들은 오히려 장시간노동을 조장하는 동시에 임금체계도 유연화하려는 독소조항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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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29일, 일본 참의원이 노동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가운데, 과로사망 노동자의 유족들이 해당 법안에 대한 반대의사를 밝히기 위해 본회의를 방청하고 있다.



일도, 인생도 모두 괴롭다

20151225일 크리스마스 아침, 도쿄에서 한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이 죽음은 일본사회에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게 된다. 희생자는 세계적인 규모를 자랑하는 일본 최대의 광고회사 덴츠電通에서 일하던 24세의 여성노동자 다카하시 마쓰리高橋 まつり. 갓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 1년차 신입사원이었던 그녀를 죽음으로 내몬 것은 바로 살인적인 장시간노동이었다. 다카하시 마쓰리는 월 100시간에 달하는 초과노동을 강요당했고, 목숨을 끊기 2달 전인 201510월에는 무려 130시간의 초과노동에 시달렸다. 과로로 우울증까지 겪게 된 그녀는 상사에게 업무를 줄여달라고 요청했지만, 돌아온 것은 성차별이 섞인 폭언이었다. 절망과 고통 끝에 다카하시 마쓰리는 결국 사랑하는 엄마, 이제 안녕. 인생도 일도 모두 괴로워요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사원 기숙사에서 뛰어내렸다.

이 비극은 일본에 만연한 초과노동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일본의 연간 노동시간은 1,719시간으로, OECD 2위의 악명을 떨치는 한국(2,113시간)보다는 적지만 독일(1,371시간)이나 프랑스(1,482시간), 스웨덴(1,612시간) 등 미국을 제외한 선진자본주의국가 가운데 가장 긴 편에 속한다.* 이조차도 파트타임(단시간 노동자)이나 파견노동자 등 불안정한 비정규직 일자리를 양산하면서 평균노동시간이 줄어든 것으로, 실제 장시간노동은 더욱 심각하다. 기존에 일본의 노동기준법(한국의 근로기준법에 해당)은 법정 노동시간을 주 40시간으로 규정하고, 초과노동은 후생노동성 고시에 따라 월 45시간연간 360시간으로 제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초과노동 규제는 강제력이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무제한노동이 가능했다. 노동자들의 과로사와 과로자살이 반복되는 가운데, 다카하시 마쓰리의 죽음을 계기로 장시간노동을 철폐하라는 대중적 요구가 분출했다. 이에 따라 아베 정부는 노동시간 규제입법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난 629일 의회를 통과한 아베 정부의 노동시간 단축법안은 그 취지를 무색하게 했다. 100시간, 연간 720시간까지 초과노동이 가능하도록 허용했기 때문이다. 다카하시 마쓰리가 월 100시간 수준의 초과노동에 시달렸던 것을 떠올린다면 이는 합법적으로 과로를 조장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조차도 자동차운전, 건설, 의사 업무에 대해서는 적용을 5년간 유예하고 연구개발 업무는 아예 규제대상에서 제외했다. 나아가 비록 고소득 전문직으로 한정하기는 했으나 노동시간 규제를 폐지하고 초과노동수당을 없애 노동시간과 무관하게 사용자의 성과평가만으로 임금을 책정하는 이른바 시간급제도(‘고도 프로페셔널 제도로도 알려짐)를 도입하여 무제한노동을 정당화하는 한편, 향후 임금체계를 완전히 유연화하는 포석을 놓았다. 이날 통과한 노동법 개정안에 대해 한국의 대외경제정책연구원과 경제신문들은 한국에 비해 규제강도와 경직성이 약해, 유연한 대응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부러워했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다카하시 마쓰리의 어머니는 딸의 영정을 들고 법안 통과에 항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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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다카하시 마쓰리가 생전에 남겼던 트위터.

부장 : '너의 잔업시간 20시간은 회사로서는 낭비야', '회의 중에 졸린 얼굴을 하는 건 관리를 못 하는 거야', '덥수룩한 머리카락에 충혈된 눈으로 출근하지 마라', '지금 업무량으로 괴로운 건 네 능력이 없는 거야'

: '충혈도 되면 안 되는 거야?'


일본을 본받자는 한국자본의 속내

장시간노동과 함께 일본 노동구조를 특징짓는 것은 저임금 비정규직의 확대다. 일본정부의 공식 통계만 보더라도 전체 노동자 가운데 비정규직 비율은 지속적으로 상승해 이제 37%를 상회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근래 일본의 높은 취업률과 낮은 실업률의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지난 20년간 일본의 생산가능인구가 약 1천만 명 감소하고 고령화 속도가 빨라짐에도 불구하고 고용지표가 개선되는 것은 여성과 고령인구가 대규모로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가운데 이들의 상당수가 비정규직으로 고용되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00~2017년 중 일본의 여성 노동자는 464만 명 증가했는데 이 가운데 94.4%(438만 명)가 비정규직이었고, 노년층 노동자는 284만 명이 증가한 가운데 84.5%(240만 명)가 비정규직이었다.** 일본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수준은 정규직 대비 65%에 불과한데, 이는 고용지표가 개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임금이 전혀 오르지 않는 주요 원인이다.

현재 일본은 소득불평등을 나타내는 지니계수나 빈곤율이 OECD 평균은 물론이고 한국보다도 악화하고 있다. 반면 아베 정부 집권 이후 일본 기업들의 이윤은 계속 커졌다. 대규모 양적완화를 통해 기업의 부실을 국가가 대신 떠안아주는 동시에 엔화 가치를 떨어뜨려 수출가격을 인하함으로써 대기업들의 수익성은 크게 개선되었다. 늘어난 이윤은 임금상승으로 이어지지 않고 기업 내부에 축적되었다. 이 시기 일본 기업의 내부유보액(사내유보금)은 크게 증가해, 제조업 기준으로 2011111조 엔에서 2015년에는 132조 엔으로 무려 19% 늘어났다.*** 일본 전체의 실질경제성장률GDP1% 수준에 머물렀던 것과 대조적이다.

몇 년 전부터 한국에서는 경제신문과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아베 정부의 노동정책을 높게 평가하면서, 노동시간을 줄이고 다양한 근무형태를 도입해 고령화와 산업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본받아 한국의 경직된노동시장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제언도 잊지 않는다. 그러나 자본이 요구하는 유연화는 곧 노동자들에게는 삶의 불안정을 의미하며, 한국 역시 1997년 이후 지난 20년간 이 파괴적인 노동유연화를 경험하고 있다. 높은 취업률과 낮은 실업률, 기업이윤의 상승에 가려진 일본 노동구조의 실상을 제대로 살펴보아야 할 이유다.

 

[출처]

*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일본의 노동시간 단축 추진현황 및 시사점>, 2018.5.25.

** 한국은행, <국제경제리뷰> 2018-8, 2018.4.19.

*** 한국은행, <해외경제포커스> 2017-10, 2017.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