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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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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5월 투쟁과 그 후 


정경원노동자역사 한내

 

1991년 5월 25일 3차 국민대회 가두투쟁이 

벌어진 충무로에서 백골단과 전투경찰이

시위대를 토끼몰이 하고 있는 모습.

여기서 성균관대학교 김귀정 학생이 압사해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했다.

[사진: 이정민/노동자역사 한내 소장]


19914. 집회와 거리에서 만난 백골단은 있는 힘을 다해 곤봉을 휘둘렀고 전투경찰은 최루탄을 사정없이 터뜨렸다. 집회 참석 이후 모인 이들은 불길한 기운을 이야기했다. 꼭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426. 명지대 1학년 강경대 학생이 백골단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했다. ‘학원자주화 완전승리와 노태우 군사정권 타도 및 총학생회장 구출을 위한 결의대회를 마치고 거리로 나가던 차였다. 사람들은 876월 이한열의 죽음을 떠올렸다. 이건 시작이었다.

429일 청년학생들이 앞장서서 싸울 것을 호소하며 전남대 박승희 씨가, 51일에는 안동대 김영균 씨가 분신했다. 53일 천세용 씨가 분신 후 투신하여 운명했다. 56일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이던 한진중공업노조 박창수 위원장이 안양병원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58일에는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씨가 분신했고 10일에는 전남대에서 윤용하 씨가 분신했다. 518일 고 강경대 열사 노제 영결식 도중 연세대 굴다리 위 철길에서 이정순 씨가 분신했고 전남 보성고교 김철수 씨가 ‘5.18 11돌 추모행사중에 분신했다. 522일 전남대 병원 영안실 옥상에서 정상순 씨가 분신했다. 그리고 525폭력살인 민생파탄 노태우 정권 퇴진을 위한 3차 국민대회거리 투쟁 중 성균관대 김귀정 양이 전투경찰의 토끼몰이에 충무로에서 사망했다.

 

투쟁의 정점과 하락

민중운동진영은 대책위를 구성해 투쟁했다. 박창수 위원장 죽음을 계기로 노동운동진영이 적극 참여하면서 투쟁전선이 확대되었다. 59일 전국적으로 100여 개 노조 5만여 명이 시한부 파업을 하고 거리로 나갔다. 전국 60여 개 시군에서 30만 명이 노태우 퇴진투쟁을 전개했다. 이날 이후 백골단 해체, 노재봉 내각 사퇴투쟁 요구는 노태우 퇴진으로 바뀌었다. 민주노조운동진영은 515일 연세대에서 전노협, 업종회의, 연대회의 간부 8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 노동조합 비상 대표자회의를 개최했다. 지역과 업종을 넘어 대표자들이 한 자리에 모인 역사적인 날이었다. 여기서 노조 대표자들은 518일에 고 박창수 위원장 옥중살인 규탄 및 폭력통치 종식을 위한 총력투쟁을 전개할 것을 결의했다. 51816개 지역 156개 사업장 91,415명이 시한부 총파업 투쟁을 전개했다. 이날 2차 국민대회에서는 전국의 81개 도시에서 40여만 명이 참여하는 6공화국 최대 규모의 가두시위였다. 19915월 투쟁의 정점이었다.

그러나 3차 국민대회가 개최되고 노동자들이 파업했지만 이후 전체적으로 보면 동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63일 한국외국어대에 방문한 정원식 총리가 학생들로부터 밀가루 달걀 세례를 받는 사건이 발생했다. 노태우 정권은 이를 국면 전환의 계기로 삼았다. “죽음의 굿판을 걷어버리라는 충고는 힘을 받았고 보수언론은 대대적으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패륜아로 매도했다. 노태우 정권은 파업현장에 경찰을 투입하고 민족민주진영의 지도부에 사전구속영장을 발부했다.

5월 투쟁 과정에서 민족민주진영은 민주정부수립을 제기하며 투쟁과제를 선포하고 명동성당 거점 투쟁을 전개했으나 정권의 탄압에 대응하지 못한 채 투쟁 국면은 광역의회 선거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이 선거의 투표율은 58%였지만 압도적인 비율로 민자당 후보가 당선되었다.

 

5월 투쟁 그 후

5월 투쟁은 국가폭력에 의한 죽음에 대한 공분에서 시작되었다. 876월 항쟁 이후 가장 큰 거리 투쟁, 거리 정치가 벌어졌고 노동자 민중은 응축된 분노를 쏟아냈다. 하지만 이 분노를 모아 어디로 향할지 명확하지 않았고 노동자 민중의 투쟁은 죽음의 담론에 갇혀버렸다.

돌아보면, 갈 길 잃은 대규모 투쟁은 이후 운동진영을 공격하는 부메랑 역할을 했다. 분노를 표출했던 노동자 민중의 투쟁이 문제가 아니라 운동조직과 이념 주체들이 혼란을 겪은 게 문제였음에도 말이다. 이 혼란은 어디서 왔을까. 1989년 폴란드인민공화국의 비공산주의 선언을 시작으로 동유럽 국가들이 변화하고, 19918월부터 12월 사이 러시아를 포함한 소련의 모든 공화국들이 연방을 탈퇴하거나 소련 수립 조약에서 탈퇴하면서 한국 사회에도 영향을 미쳤다. 비합법 전위정당 노선의 폐기와 공개 진보정당 노선의 등장(한국사회주의노동당), 기존 운동노선과의 청산주의적 단절 강요등은 빠르게 운동진영에 퍼졌다. 노동자 민중에 대한 낭만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거나 중산층을 조직하기 위한 활동이 강조되고 힘을 얻어갔다. 이러한 것들은 운동의 위기라는 표현으로 운동진영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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