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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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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18.11.02 09:13

짱구개미

 

가을이 되어서 찬바람이 불면 벌레들은 하나둘 모습을 감춘다. 텃밭 위를 날던 고추좀잠자리 떼는 알을 낳으러 개울가로 날아갔는지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땅속에 알을 낳고 죽은 섬서구메뚜기를 끌고 가던 곰개미도 집 안에 들어가 겨울 채비를 하는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늦털매미 소리가 들려오는 숲 가장자리 풀더미 아래엔 보이지 않던 개미가 느릿느릿 풀씨를 물고 간다. 곰개미들이 집안에 들어가 겨울 채비를 할 무렵에 나오는 짱구개미이다. 짱구개미는 가을에 풀씨가 여물면 땅 위로 나와서 풀씨를 거둬들인다. 이때 거둬들인 풀씨를 창고에 쌓아두고서 일 년 내내 먹는다. 짱구개미는 봄에 결혼비행을 할 때와 가을에 풀씨 거둘 때 잠깐 땅 위로 나오고 그 이외엔 집 입구를 막고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짱구개미는 흔한 개미이지만 보기 힘든 건 그 때문이다.

짱구개미는 다른 개미들과 달리 거의 풀씨만 먹고 산다. 강아지풀, 바랭이나 민들레 따위 풀씨를 많이 거둬들이지만 좋아하는 풀씨는 애기똥풀, 제비꽃 씨앗이다. 정확히 말하면 짱구개미가 좋아하는 것은 애기똥풀이나 제비꽃 씨앗에 붙어있는 엘라이오솜이라는 지방, 단백질, 비타민 덩어리다. 짱구개미는 엘라이오솜이 붙어있는 애기똥풀이나 제비꽃 씨앗을 물고 가서 애벌레에게 먹이고 씨앗은 쓰레기장이나 집 밖에 버린다. 이렇게 버려진 씨앗에서 싹이 나서 애기똥풀과 제비꽃이 자란다. 애기똥풀이나 제비꽃뿐 아니라 얼레지, 금낭화, 광대나물, 환삼덩굴, 괭이밥 따위는 엘라이오솜이 씨앗에 붙어있다. 씨앗에 엘라이오솜이 붙어있는 풀들은 개미를 이용해 널리 퍼져 자라는 풀들이다. 엘라이오솜은 멀리 옮겨주는 대가로 개미에게 주는 품삯인 셈이다. 어디에나 흔하게 퍼져 자라는 애기똥풀, 제비꽃을 보면 저 들꽃을 이곳에 옮겨준 게 짱구개미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멸종위기종인 깽깽이풀도 씨앗에 엘라이오솜이 붙어 있다. 이 풀을 복원하려면 꼭 짱구개미가 있어야 한단다. 짱구개미와 풀은 이렇게 서로 도우며 살아간다.

짱구개미는 풀밭이나 산길, 도시 공원에서 산다. 물기가 적고 단단한 땅을 파서 집을 짓는다. 집은 입구가 하나이지만 수직으로 땅속 깊이 집을 짓는데, 깊이가 보통 2, 3미터에 이르고 4, 5미터인 것도 있다. 수직으로 판 중앙 통로 옆으로 여왕개미방, 애벌레방, 먹이창고, 쓰레기를 버리는 방이 따로 있다. 먹이창고에 쌓인 풀씨는 페로몬을 뿌려서 일 년 내내 썩지 않는다. 5밀리밖에 되지 않는 작은 개미가 어떻게 단단한 땅을 파고 내려가서 집을 만들었을까 놀라게 된다.

다른 개미들이 다 집안에 들어갈 때 느지막이 나와서 풀씨를 거두지만 결혼비행만큼은 한국산 개미 가운데 가장 빠르다. 진달래와 벚꽃이 한창 필 무렵 결혼비행을 한다. 짱구개미를 기르는 사람들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가서 여왕개미를 잡는다. 짱구개미는 성질이 온순하고 튼튼한 데다 먹이 구하기도 쉬워서 처음 개미를 기르기에 제격이다. 여러 여왕개미를 함께 넣어주어도 사이좋게 잘 지낸다.

숲속 느림보 늦털매미 소리를 들으며 느릿느릿 풀씨를 물고 가는 짱구개미를 보고 있으면 정신없이 바삐 살아가는 사람살이가 부끄러워진다. 우화 속 개미는 봄부터 여름까지 부지런히 일해서 창고 가득 먹이를 모아 두고 겨울을 난다고 하는데 현실의 개미는 우화 속 개미와 많이 다르다. 짱구개미는 한국산 개미 가운데 풀씨를 모아 저장하는 유일한 개미이다. 그래서 짱구개미를 수확개미라 부른다. 그런데 짱구개미는 일 년에 두 달 잠깐 일하고 일 년 내내 놀고먹는다. 짱구개미 애벌레는 스스로 움직여서 씨앗을 먹기 때문에 특별히 애벌레를 돌보지 않아도 된다. 짱구개미를 보면서 생각해 본다. 4차 산업혁명으로 일자리가 사라진다고 불안에 떨지만 바로 옆에 노동에서 해방된 세상이 도래해 있다. “내가 하고 싶은 그대로 오늘은 이 일 내일은 저 일을 하는 것,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고 저녁에는 소를 치며 저녁식사 후에는 비판하면서도 사냥꾼으로도 업으로도 목동으로도 비판가로도 되지 않는 일이 가능한 세상[독일 이데올로기, 칼 맑스] 말이다. 75-벌레이야기75.jpg



 

그림 강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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