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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텍

일삶을 되찾기 위한 끝장투쟁

 

신순영콜텍투쟁승리를위한공동대책위원회,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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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8, 콜텍 기타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키보다 큰 기타를 십자가처럼 메고 광화문 농성장을 출발해 이틀간의 행진에 나섰다. 대전 계룡공장에서 서울 양화대교 북단으로, 부평 콜트악기 공장과 쫓겨난 뒤 정문 앞으로, 여의도 새누리당사 앞에서 광화문으로, 거리에서 보낸 긴 세월만큼이나 여러 곳에서 농성했던 기타노동자들의 마지막 농성장이 될 등촌동 본사로 향하는 길이었다.

행진대오는 콜트악기 대리점이 열한 개나 위치한 인사동 낙원상가 앞, “회사의 어려움을 도외시한 채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갈등을 야기했다며 노조를 비방했던 경총 앞, “기업이 어려울 때 고통을 분담하기는커녕 강경한 노조가 제 밥그릇 불리기에만 몰두한 결과 건실한 회사가 아예 문을 닫은 사례가 많다며 콜트·콜텍 노동조합을 호도한 김무성 당시 새누리당 대표의 사과를 받기 위해 곡기를 끊으며 농성했던 여의도를 지났다.

2008년 정리해고를 철회하라며 송전탑에 올라 20일이나 단식농성을 했던 양화대교를 바라보며 한강을 건넜고, 마침내 등촌동 콜텍 본사 앞에 닿아 새로운 천막을 쳤다. 12년 투쟁하며 수도 없는 선전전과 집회를 진행했지만 본사 앞에 농성장을 차리기는 처음이다. 아니, 마지막이기 때문에 등촌동 콜텍 본사 앞으로 왔다.

 

콜트·콜텍 박영호와 꿈의 공장이야기

자본가에게 꿈의 공장은 노동자에게 지옥과 같은 일터다. 콜텍 공장 역시 다르지 않았다. 해외에서 생산한 반제품을 국내로 들여와 완성한 기타에 ‘Made In Korea’를 붙여 막대한 부와 명성을 쌓아가던 박영호 사장에게 노동자는, 일에만 몰두하며 물량 계획에 맞춰 언제든 쓰고 버릴 수 있는 존재여야 했다. 그러나 1987년 인천 콜트악기 공장에 노동조합이 설립됐다. 1990년대 중반부터 인도네시아와 중국에 해외공장을 설립해 국내 생산을 축소하기 시작했지만, ‘한국인의 손재주와 집중력으로 완성된 기타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환율이 급등한 외환위기를 기회로 삼아 승승장구하던 박영호 사장은 2000, 노동조합도 인권도 창문도 없는 공장을 아들에게 물려주겠다는 헛꿈을 꾸며 대전 계룡에 콜텍 공장을 신축했다.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으로 굴러가는 공장에는 분진과 유기용제 악취가 가득했고, 비일비재한 산재는 오히려 노동자를 내쫓는 빌미가 됐다. 비인간적인 착취로 만들어낸 기타는 2002년 산업자원부의 세계 1위 시장점유율 상품으로 선정됐고, 세계 시장의 30%를 생산·통하는 대표 브랜드가 되었으며, 박영호 사장은 1,200억 원대의 재력가가 됐다.

그러나 박영호 사장의 탐욕은 멈출 줄을 몰랐다. 2003년부터 해외 공장에 대규모 시설 투자를 본격화하면서 국내 생산을 줄여나가기 시작해, 20071월 인천 콜트악기 공장 정리해고 계획을 발표한 것이다. 해외로 물량을 빼돌리며 국내 공장 경영난을 위장하기 시작하자, 가시화되는 고용 불안에 2006년 콜텍 공장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그리고 200749, 여느 날과 다름없이 공장으로 출근한 노동자들은 일방적인 폐업 공고를 마주한다. 정리해고 당시 콜텍은 설립 이후 단 한 차례의 적자도 없이 수백 억 원의 누적 흑자를 기록해온 알짜기업이었다.

 

사법농단 재판거래, ‘미래에 올 경영위기를 인정한 콜텍 정리해고 대법원 판결

2012223일 대법원은 콜텍 정리해고에 대해 부당해고 원심을 깨고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기업이 전체적으로 흑자여도 일부 사업 부문을 폐쇄하며 정리해고를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취지였고, 2012년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은 이를 최악의 걸림돌 판결로 꼽으며 대법원이 정리해고라는 지옥의 문을 열었다고 평했다. 2014110일 서울고등법원은 자신들이 선임한 공인회계사의 감정 결과를 뒤집으며 콜텍의 정리해고가 정당하다는 정치판결을 내놓았고, 612일 대법원은 이를 그대로 인정했다.

지난해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사법농단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콜텍 정리해고 판결은 당시 대법원의 상고법원 설치를 위한 정부와의 재판거래용이었음이 드러났다. ‘사법행정권 남용의혹 관련 특별조사단 조사보고서별지에는 노동시장의 유연성 확보 등을 위해서는 정리해고 요건의 정립이 필요한데, 선진적인 기준 정립을 위하여 노력함이라며 콜텍과 쌍용차 정리해고 판결이 예시되어 있었다. 콜텍 정리해고 투쟁의 원인제공자는 박영호 사장이었지만, 5년이면 승리할 수 있었던 싸움을 13년차에 이르도록 연장한 것은 양승태 대법원이었던 것이다.

재판거래에 희생된 KTX 해고승무원들과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은 다행히도 투쟁과 연대의 힘으로 지난해 현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뒤늦게나마 양승태는 구속됐지만, 콜텍 노동자들은 최장기 정리해고 투쟁사업장으로 여전히 거리에 있다. 재판거래를 위한 대법원의 부당한 판결이 아니었다면, 지금 콜텍 노동자들은 정리해고로 인한 심신의 상처를 어느 정도 회복하고 자연스러운 일상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사법적폐 청산을 말하는 문재인 정부는, 형식적인 사법 개혁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삶이 파탄에 이른 희생자들의 실질적인 원상 회복을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열두 번의 봄-여름-가을-겨울을 채운 투쟁과 연대

200749, 공장 앞에서 마주한 폐업과 정리해고. 그날로부터 4,400일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창문도 없는 공장에서 분진과 유기용제 악취를 마셔가며 지문이 없어지고 뼈마디가 닳도록 일했던 노동자들은, 더 이상 눈치 보고 순응하며 물러설 수 없었다. 열악한 조건에서도 최고의 기타를 만든다는 자부심으로 일했던 소중한 일터에서 그냥 떠날 수 없었다. 자신들의 피땀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해외공장 설비를 증설하고 물량을 빼돌리며 공장문을 닫은 박영호 사장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싸움이 오늘에 이르렀다. 노동자들은 열두 번의 사계절, 열두 번의 설과 추석을 거리에서 보내며 투쟁하고 있다.

공장 안 농성부터 고공농성과 단식에 본사점거까지 투쟁이 격화되면서, 기타를 만들던 노동자들의 정리해고 싸움이 세상에 알려졌다. 노래의 꿈을 키워준 기타가 누군가의 노동과 삶을 파괴하는 착취의 도구로 변질됐다는 사실은 수많은 음악인들을 움직였고, 문화예술계 역시 공명하며 기타노동자들의 투쟁에 긴밀히 연대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연대는 새로운 투쟁을 불러왔고, 해외원정과 국제연대 그리고 무수한 음악인들의 연대와 지지가 이어졌다. 투쟁의 사회적 확산에 대응하기 위해 2010년 박영호 사장은 공감 나눔 소통을 내세운 콜텍문화재단을 설립해 기만적인 사회공헌 사업을 벌이고 있지만, 이미지 제고는커녕 신대철·최이철·한상원 등 국내 최고 기타리스트들이 콜트·콜텍의 실상을 깨닫고 기타노동자들과 연대하는 계기를 만들었을 뿐이다.

새로운 연대와 만나 가장 많이 도전하고 변화한 것은 당사자들이었다. 정리해고 이후 쳐다볼 일도 없었던 기타를 연주자로서 다시 만났다. 콜트콜텍 기타노동자 밴드 콜밴를 결성해 어설픈 무대를 선보이더니 어느새 자신들의 이야기를 노래로 엮어 꿈이 있던가”, “고공”, “서초동 점집”, “주문등 자작곡을 보유한 뮤지션이 되었고, 연대의 힘으로 투쟁 10주년 음반까지 발매했다. <구일만 햄릿>, <법 앞에서> 등으로 연극 무대에 올랐고, <기타이야기>, <꿈의 공장>, <천막> 등 여러 편의 다큐멘터리와 영화에도 출연했다. ‘기타는 고통스러운 투쟁의 과정에서 새로운 만남을 잇고 연대를 확장하는 매개가 되었고, 노동자들의 변신은 새로운 지평을 만들어냈다.

 

끝장투쟁은 제자리로 돌아가기 위한 용기

그러나 13년은 너무나 긴 세월이다. 그중 절반은 단 세 사람이 버텨왔다. 투쟁의 시간이 쌓여갈수록 가족도 관계도 일상도 일그러진다. 잃어버린 것들이 늘어날수록 분노는 높아지지만 안타깝게도 모아낼 수 있는 강력한 힘은 적어진다. 끝이 보이지 않는 거리의 삶은 어쩌면 가혹하고도 고통스러운 매일의 반복이었을지 모른다. 외롭고 힘겨운 투쟁을 떠받치는 연대의 힘은 곁을 지키는 것일 뿐, 삶을 가꾸는 것은 결국 각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끝장투쟁 결심의 바탕에는, 자신과의 싸움과 그 속에서 아프게 길어 올린 용기가 있을 것이다. 시간이 멈춘 공장에서, 내몰린 거리에서 투쟁을 함께 지켜줬던 연대에 대한 믿음도 있을 것이다. 이들이 어렵게 결단한 마지막 투쟁이, 시간의 힘에 밀린 정리가 아니라 정말로 끝장을 보는 투쟁이 되기를 바란다. 오랜 투쟁이 고통과 상처의 기억이 아니라 이후를 살아갈 원동력과 추억이 될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연대의 힘이 넘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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