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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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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기구 사이의 쟁투, 

대중을 배제한 소모적인 논쟁


고근형┃학생위원장



추악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버닝썬, 장자연, 김학의 사건은 이 나라 ‘고위층’이라는 자들이 저지른 성폭력과 범죄 유착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경악스러운 것은, 검찰과 경찰이 이 범죄를 앞장서 은폐하는 공범이었다는 점이다. 버닝썬 사건에서는 최소한 총경급(보통 경찰서장) 고위 간부가 주요 인물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고, 경찰이 조직적으로 이들의 범죄를 묵인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특수강간 사건은 피해자의 고발과 ‘동영상’ 증거까지 나왔지만, 검찰이 무혐의 처분을 내리며 종결시켰다. 고 장자연 씨 사망 사건은 경찰과 검찰 모두 수사부터 부실하게 마무리하면서, 이름이 오르내린 고위급 인사들은 하나도 처벌하지 않은 채 무마했다.


검찰과 경찰 모두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자, 정부‧여당은 고위공직자 범죄수사처(공수처) 신설을 밀어붙이고 있다. 고위층에 대한 기존 형사기관들의 수사와 처벌을 대중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에, 공수처 설치가 상당한 여론의 뒷받침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의문은 남는다. 과연 공수처는 검찰, 경찰과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소모적인 검‧경 수사권 조정 논쟁


시계를 1년만 거꾸로 돌려보자. 2018년 1월 14일, 조국 민정수석은 국정원‧검찰‧경찰의 수사권과 기소권을 분할하는 “문재인 정부 권력기관 개혁 방안”을 발표했다. 그중 핵심은 단연 검찰 개혁과 공수처 신설이었다. 수사권 분할 중에서도 특히 검찰과 고위공직자에 대한 수사권을 이양한다는 게 이목을 끌었다. 수십년간 검찰의 ‘셀프 개혁’이 모조리 실패로 귀결했으니, 그 권한 일부를 경찰과 공수처에 넘기는 것이다.


경찰은 축배를 들었을 것이다. 늘 검찰의 수사지휘를 받다가 드디어 검찰에 대한 수사권을 얻는다니. 하지만 사건이 터졌다. 총경급 간부가 버닝썬 사태의 공범이라는 점이 드러나면서, 경찰 조직에 대한 불신도 폭발했다. 그러자 공은 공수처로 넘어가고 있다. 문제는 공수처 역시 검‧경의 전철을 밟지 말란 법이 없다는 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대중의 통제를 받지 않는 기구이기 때문이다.


버닝썬, 장자연, 김학의 사태를 들여다보자. 형사기관이 범죄자들과 결탁하거나 제 식구 감싸기로 내부 비리를 은폐할 때, 비리와 범죄를 처벌할 경로는 모두 차단된다. 수사의 주체가 경찰인지 검찰인지, 혹은 공수처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수사와 처벌 권한을 독점하는 공권력이 대중의 통제로부터 자유롭다는 게 핵심이다. 검찰과 경찰을 모두 견제할 수 있다는 새로운 기구, 공수처를 만든다고 해보자. 공수처가 수사대상인 고위층과 연계를 맺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대체 어디 있는가? 일단 공수처 자체가 새로운 고위 공직이다. 공수처보다 더 상위의 권력 기구, 설령 대통령이 수사권을 갖는다고 하더라도, 그가 범죄자와 결탁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는 3년 전 국정농단 사태로 아주 확실하게 경험하지 않았는가.



누가 통제하는가


공수처 설치를 요구하는 대중의 열망은 분명 존재한다. 정권을 가리지 않고 터져 나오는 고위공직자들의 비리, 그리고 그들의 범죄를 발본색원하기는커녕 웬만한 일은 은폐하기에 급급한 검‧경은 대중의 분노를 촉발한 직접적인 원인이다. 검‧경을 통제하고 그 인사권을 좌지우지하는 게 바로 권력과 고위공직자들이니, 촛불 항쟁처럼 대중적 저항이 전면적으로 벌어지거나 꼬리라도 잘라야 하는 경우가 아니면 애초에 구조적으로 엄정한 수사와 처벌을 기대할 수 없다. 이 점은 공수처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대안은 있다. 국가의 치안과 형사체계를 철저히 민주적 통제 하에 두는 것이다. 가령 기본적으로는 주요 수사기관장에 대한 대중의 선출권과, 검‧경에 대한 소환권을 요구할 수 있다. 예컨대 강남경찰서장이 버닝썬 운영자들과 결탁해 성폭력 사건을 방관했다면, 시민들이 그를 소환하고 파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장자연 씨 사망 사건처럼 고위층 여럿이 연루된 경우, 누가 이 사건을 수사할지 대중적 논의를 거쳐 임명하고 관리할 수도 있다.


이를 더 확장하면, 양승태 대법원 재판거래 사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대중의 통제를 전혀 받지 않는(그 누구도 선출되지 않는) 사법기구에 대한 불신도 이미 상당하다. 배심원 제도처럼 제한적으로 판결에 참여할 수 있는 절차가 있기는 하지만, 결국 재판권은 판사 개인의 몫으로 남아 있다. 시민들이 판사에 대한 선출권과 함께 언제든지 그를 소환하고 파면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


물론 이 체제에서 민주적이고 대중적인 통제가 온전히 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공직이 곧 특권이 되는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열망을 실현하는 데 있어, ‘특권을 없애겠다’는 빈말이 쓸모없는 만큼이나 지금과 같은 또 다른 권력기구의 설치 역시 큰 기대를 갖기는 어렵다. 특권을 새로운 특권으로 막을 수는 없다. 권력자에게 책임지고 권력자에게 통제받는 공직의 구조를 영혼부터 바꾸려면, 그들이 대중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 새로운 체계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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