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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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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19.06.18 18:30

장수잠자리



어린이 잡지 연재를 위해 물속에 사는 생물을 취재하러 개울로 갔다. 마을엔 아파트 사이를 흐르는 작은 개울이 있다. 자주 마르고 썩은 냄새가 났던 이 개울은 몇 해 전 생태하천조성공사를 한다면서 싹 파헤쳐 새로 바닥이 깔리고 끌어올린 중랑천 물이 흐르는 인공하천으로 바뀌어 버렸다. 청계천 이후 서울 대부분의 지천이 다 이런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펌프로 끌어올린 물이 흐르는 이 인공 물길을 개울로 불러야 하나 고민이다.


인공 물길로 바뀌지 않은 개울 위쪽으로 갔다. 아파트 바로 옆이지만 계곡 바로 아래인 이곳은 도시의 삶만큼이나 변화무쌍하다. 도랑물이 되었다가 드문드문 물웅덩이만 몇 개 남아 썩어가기도 하고 키를 넘기는 풀로 덮일 때도 있고 물기 하나 없이 바짝 말랐다가도 비가 오면 불어난 계곡물이 바로 흘러내려 맑은 개울로 바뀌곤 한다.


물이 흐르는 여울과 고인 웅덩이를 살피며 물속 벌레를 찾았다. 하루살이 애벌레나 날도래 애벌레 같은 물속 벌레는 크기가 작아서 손으로 그냥 잡을 수 없다. 붓으로 살살 떠서 잡아야 한다. 그래도 잠자리 애벌레는 크기가 커서 쉽게 손으로 잡을 수 있다. 잠자리는 애벌레 때 물속에서 살면서 물속 벌레나 올챙이, 어린 물고기 따위를 잡아먹는다. 이곳엔 잠자리 애벌레가 많다. 고추좀잠자리 애벌레가 가장 흔하고 쇠측범잠자리 애벌레도 많이 잡힌다. 어리장수잠자리 애벌레, 검은물잠자리 애벌레도 더러 잡힌다. 잠자리 애벌레는 웅덩이 바닥에 쌓인 낙엽과 개흙을 체망으로 떠서 손으로 헤집으면서 잡는다. 개흙 속에서 커다란 잠자리 애벌레가 꿈틀거렸다. 새끼손가락 크기만 한 이 잠자리 애벌레는 도감을 뒤져 찾아보니 장수잠자리 애벌레였다.


장수잠자리는 한국산 잠자리 가운데 몸집이 가장 크다. 어른벌레는 크기가 10cm에 이른다. 그런데 덩치가 커다란 잠자리가 이렇게 작은 개울, 조그만 웅덩이에서 사는 게 재미있다. 커다란 왕잠자리 애벌레는 넓은 연못이나 저수지에서 산다. 어째서 장수잠자리는 넓은 연못의 유혹을 뿌리치고 계곡의 작은 웅덩이를 택한 걸까? 큰 연못에는 먹이가 많지만 천적도 많을 게다. 계곡 웅덩이엔 먹을 게 적어도 감히 장수잠자리에 대적할 천적은 없다. 그래서 작은 웅덩이를 택한 걸까? 먹이가 많은 곳에서 잘 먹고 쑥쑥 자라는 대신 계곡의 작은 웅덩이 속에서 살아가는 장수잠자리는 낙엽을 뜯어먹고 사는 옆새우 따위를 먹으면서 천천히 느리게 살아간다. 다 자라려면 3~4년이 걸린다.


장수잠자리와 사는 게 닮은 잠자리가 있다. 그래서 이름도 어리장수잠자리다. 개울의 웅덩이에서 사는 게 닮았지만, 어리장수잠자리는 장수잠자리과가 아니라 측범잠자리과에 속하고 생김새도 전혀 다르다. 원통형인 장수잠자리 애벌레와 달리 어리장수잠자리 애벌레는 둥글납작하게 생겼다. 웅덩이 밑에 쌓인 낙엽 속에서 살아가다 생김새까지 낙엽을 닮아간 걸까? 측범잠자리 무리 가운데에서 몸집이 가장 큰 어리장수잠자리도 장수잠자리처럼 개울의 웅덩이에서 천천히 자란다. 다 자라려면 이태가 걸리는데 몸집이 장수잠자리만 했으면 어리장수잠자리도 3년 이상 걸릴 게다.


이 개울엔 더러운 물에 사는 물달팽이, 깔따구 애벌레, 실지렁이가 보이고 계곡에서 쓸려 내려온 날도래 애벌레, 어린 도롱뇽, 장수잠자리 애벌레도 보인다. 사는 곳이 다른 생물이 함께 불안한 동거를 하고 있다. 그래도 이곳은 생태가 살아있는 자연 하천이다. ‘생태하천’으로 조성된 개울 아래쪽은 이름만 생태하천이다. 진짜 생태하천을 만들려면 많은 시행착오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느리고 힘든 길 대신 비슷한 것을 빨리빨리 뚝딱뚝딱 만들어 내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나 이렇게 만들어진 ‘생태하천’은 비슷하지만, 생태하천과는 전혀 다르다. 하나는 진짜, 다른 하는 가짜다.


작고 느린 삶을 택한 장수잠자리를 웅덩이 속에 다시 놓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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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강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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