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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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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19.07.02 15:40

밤나무혹벌



숲속을 걷다 두 차례 벌레들의 떼죽음을 보았다. 숲속엔 줄기가 굵은 참나무 둥치마다 시커먼 끈끈이 트랩이 둘려 있다. 참나무시들음병을 막으려고 해놓은 것이다. 참나무시들음병을 옮기는 광릉긴나무좀은 6월부터 10월까지 날개돋이를 하고 어른벌레가 되어 나무 밖으로 나와 새로운 참나무를 찾아가서 알을 낳는데, 끈끈이 트랩은 광릉긴나무좀 어른벌레가 나무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고 새 참나무에 알을 낳는 것을 막으려고 둘러놓은 것이다.


끈끈이 트랩에는 벌써 시커멓게 벌레들이 들러붙어서 죽어가고 있다. 나뭇가지로 살살 헤집어보니 여러 종류의 무당벌레, 하늘소, 잎벌레, 방아벌레, 비단벌레, 거위벌레, 노린재, 풀잠자리, 맵시벌, 기생벌, 갖가지 벌과 파리매, 각다귀, 파리와 나방들... 아직 광릉긴나무좀이 제대로 활동을 시작하지 않아서일까, 방제하려는 광릉긴나무좀은 보이지 않고 애꿎은 숲속의 온갖 벌레들이 끈끈이 트랩에 붙어있다. 손바닥만 한 넓이에 붙어있는 벌레가 대충 헤아려도 백 마리를 훌쩍 넘긴다. 나무 한 그루에 둘러친 끈끈이 트랩에는 수만 마리 벌레가 붙어서 죽어간다. 숲을 둘러보니 끈끈이 트랩을 두른 나무가 수십 그루다. 이 조그만 숲에 참나무시들음병 방제를 위해서 참나무시들음병과 상관없는 수십만 수백만 마리의 벌레가 죽어가고 있다. 이미 이 숲에선 십년 가까이 이런 방제를 해왔다. 이젠 참나무 스스로 내성이 생겨서인지 참나무시들음병에 걸린 참나무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까지 방제작업을 하는 걸까? 광릉긴나무좀을 한 마리도 남김없이 씨를 말리려는 것일까? 방제 탓에 숲속 벌레들이 떼죽음을 당해도 괜찮을 걸까?


무거운 마음으로 다시 숲길을 걷다 두 번째 떼죽음을 보았다. 숲길 여기저기 밤나무 아래에 푸릇푸릇한 잎이 수북하게 떨어져 있다. 밤꽃이 이제 막 졌으니 밤을 딴 흔적은 아니다. 떨어진 잎사귀 끝엔 조각난 밤나무혹벌 벌레혹이 붙어있다. 갈라진 벌레혹 조각을 보니 애벌레나 번데기가 있었을 작은 방이 서너 개 드러나 보이지만, 그 방엔 애벌레나 번데기가 보이지 않는다. 누가 벌레혹을 쪼개서 애벌레와 번데기를 먹은 걸까? 밤나무혹벌 벌레혹 한 개 안에는 혹벌 애벌레가 1~7마리쯤 자란다. 밤나무 아래 떨어진 벌레혹 흔적을 보면 이 밤나무에서 자란 수백 마리 혹벌 애벌레나 번데기가 먹혔을 것으로 짐작된다. 벌레혹을 쪼개서 애벌레와 번데기를 먹은 건 직박구리와 청설모였다.


6월 하순에서 7월 하순 벌레혹을 뚫고 나와 짝짓기를 한 밤나무혹벌 어미는 밤나무가 막 만든 겨울눈에 알을 낳는다. 알을 까고 나온 애벌레는 겨울눈 속에 애벌레 방을 만들고 그 속에서 겨울을 난다. 봄이 되면 애벌레는 빠르게 자란다. 혹벌에 기생당한 밤나무 겨울눈은 가지로 자라지 못하고 대신 벌레혹으로 자란다. 가지 대신 자란 벌레혹에는 마치 가지인 양 밤나무 잎이 몇 장 붙어 자라서 벌레혹을 가려준다. 밤나무혹벌이 어른벌레가 되어 벌레혹을 빠져나가면 벌레혹은 말라 죽는다. 벌레혹이 많은 나무는 나무 전체가 말라죽기도 한다.


완벽한 집 같던 벌레혹은 밤나무혹벌을 직박구리와 청설모로부터 지켜주지 못했다. 직박구리와 청설모에게 먹혔지만 그래도 밤나무 가지엔 여전히 벌레혹이 많다. 밤나무혹벌은 직박구리와 청설모만 먹는 게 아니다. 작은 밤나무혹벌 애벌레에 기생하는 더 작은 남색긴꼬리좀벌, 노랑꼬리좀벌 따위 여러 기생벌의 먹이가 되기도 한다. 밤나무혹벌이 이런 천적들에게 먹히지 않고 모두 다 어른벌레가 된다면, 숲속 밤나무는 금세 사라지고 말 것이다.


숲에서 본 밤나무혹벌의 죽음은 숲이 스스로 수를 조절하고 균형을 이루어가는 것이지만, 끈끈이 트랩으로 인한 또 다른 죽음은 자칫 숲의 균형을 깨뜨릴 수도 있다. 광릉긴나무좀은 참나무시들음병이 발병하기 시작한 2004년 이전에도 숲에서 오랜 세월 참나무와 함께 살아왔다. 숲에서 죽은 나무를 분해하는 역할을 했던 광릉긴나무좀이 무엇 때문에 갑자기 살아있는 참나무를 공격하게 되었는지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한다. 숲을 살리려는 게 오히려 균형을 찾아가는 숲 생태를 더 교란하는 게 아닌지 우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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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강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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