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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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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19.09.16 18:54

왕귀뚜라미



초가을 저녁 어스름, 상가가 늘어선 찻길을 지나 골목을 돌고 공원을 가로질러 텃밭까지 걷는다. 가는 내내 귀뚜라미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더위가 한풀 꺾이고 매미 소리가 잦아들자 묻혀있던 귀뚜라미 소리가 비로소 낭랑하게 들린다. 천천히 걸으면서 가만가만 귀뚜라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섞여 있던 몇 가지 소리가 조금씩 구별이 되어 들리기 시작한다. 건물 구석과 길가에선 “뤼익뤼익뤼익...” 계속 이어지는 극동귀뚜라미 소리와 “찌리릿 찌리리릿 찌리리리릿” 중간중간 끊기는 알락귀뚜라미 소리가 들린다. 공원과 텃밭 쪽으로 가면 “히르르르리리링링링” 맑게 떨리는 왕귀뚜라미 소리가 들린다. 텃밭 둘레에서는 온갖 벌레들이 합주를 한다. 잘 들어보면 “찌잇 찌잇”, “삐이이이이”, “쓰쓰쓰 씌”, “씨익 씨익” 작은 풀벌레 소리도 들리지만, 왕귀뚜라미 소리가 가장 도드라진다.


텃밭 창고 위 전망대처럼 꾸며 놓은 곳에 돗자리를 깔고 모두들 하늘을 보고 누웠다. 별은 몇 개 보이지 않지만, 사방은 온통 왕귀뚜라미 소리로 그득하다. 도시가 개발되고 산업화하면서 귀뚜라미가 점점 사라져서 귀뚜라미 울음소리 듣기가 힘들어졌다고들 하지만 귀뚜라미는 도시에 잘 적응해서 도시 틈새나 둘레에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 아파트 앞뜰에서 극동귀뚜라미가, 길가에는 알락귀뚜라미가 울고 아파트 옆 텃밭에선 왕귀뚜라미가 울어대지만 도시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귀뚜라미들이 사라진 게 아니라 사람들의 삶에서 귀뚜라미 소리를 들을 여유가 사라진 게다. 귀뚜라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저녁이 있는 삶이 사라진 것이다.


얼마 전 왕귀뚜라미는 가축이 되었다. 지난 7월에 농림축산식품부는 축산법 시행규칙으로 왕귀뚜라미를 장수풍뎅이, 넓적사슴벌레, 애반딧불 따위와 함께 가축으로 지정했다. 말린 왕귀뚜라미는 사료용으로, 살아있는 왕귀뚜라미는 학습 애완용으로 축산 농가에서 키워질 것이다. 농촌 진흥청은 이미 10여 년 전부터 왕귀뚜라미 기르기를 권장해왔고 한 해 한번 발생하는 왕귀뚜라미를 한 해 내내 기를 수 있는 기술도 개발했다.


왕귀뚜라미를 기르면 노인 우울증이 나아지고 인지기능이 개선된다고 알려지면서 왕귀뚜라미를 애완용으로 구입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귀뚜라미 소리를 들을 여유조차 사라진 사람들은 몸과 마음이 병들고 메말라 갈 수밖에 없었고 그걸 치유하려고 왕귀뚜라미를 가축으로 만들어 애완용으로 팔고 산다. 돈을 주고 왕귀뚜라미를 사서 집안에 들여놓지 않아도 문을 열고 나서기만 하면 왕귀뚜라미가 ‘나 여기 있소’ 하며 울고 있다. 문제는 왕귀뚜라미가 아니라 저녁이 있는 삶이 아닌가. 저녁이 있는 삶은 여전히 멀기만 하다.


왕귀뚜라미란 이름은 부드러운 울음소리와 달리 딱딱하고 권위적이다. 왕귀뚜라미는 귀뚜라미 가운데 가장 몸짓이 커서 붙은 이름이다. 생물이름 가운데 크기가 커서 ‘왕’자가 붙은 게 많다. 왕바랭이, 왕고들빼기, 왕팔랑나비, 왕팔랑나비보다 커서 대왕팔랑나비, 왕팔랑나비보다 작아서 왕자팔랑나비 그리고 왕잠자리, 왕사마귀... 이미 북한은 봉건잔재를 없앤다면서 생물이름에서 ‘왕’자를 다르게 바꾸었다. 크기가 큰 생물이름 가운데 ‘왕’자 대신 ‘큰’ 자가 붙은 것들도 있다. 큰방가지똥, 큰줄흰나비 같은 게 그렇다. 왕귀뚜라미도 큰귀뚜라미 쯤으로 바꾸어 부르면 좋을 텐데. 생물이름이란 한 번 정해지면 쉽게 바뀌지 않는 게 문제다.


땅바닥을 살펴보니 귀뚜라미들이 발소리에 놀라 이리저리 튀어 달아난다. 이렇게 돌아다니는 귀뚜라미는 대게 수컷 울음소리에 이끌린 암컷 귀뚜라미들이다. 수컷 귀뚜라미들은 돌 틈이나 땅을 파서 만든 굴에 자리를 잡고서 부지런히 앞날개 두 쌍을 비벼 소리를 내어 암컷을 유인한다. 소리를 더 크게 키울 수 있는 좋은 자리를 잡은 수컷이 짝짓기에 유리하다고 하니까 함께 걷는 이가 말한다. “30평보다 60평 가진 사람이 더 유리한 것과 같구나, 귀뚜라미나 사람이나 다 같구나.” 정말 그런가. 귀뚜라미는 사람보다 얼마나 더 공정한가. 멋진 노래로 짝을 부르는 귀뚜라미를 보고 우리는 얼마나 더 나은 삶을 사나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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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강우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