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가입

변혁정치

> 변혁정치

사라진 개혁, 강해진 진영


이승철┃집행위원장



92_44.jpg




때로 싸움의 승패는 화력보다 싸움터에서 결정된다. 얼마나 잘 싸우는가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어디에서 맞붙느냐’가 관건이 되는 경우를 말한다. 요즈음에는 이를 ‘프레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조국 법무부장관(이 기사가 나가는 시점에는 더 이상 후보자가 아니라 장관으로 공식 취임했다)을 둘러싼 격전에서 자유한국당은 ‘도덕성’이란 전장에서 칼춤을 췄다. 더불어민주당과 조국을 지지하는 명망가들은 ‘진영논리’라는 평원에 싸움터를 잡았다.


조국과 그의 지지자들은 먼저 자신들이 파놓은 참호가 있는 평원으로 싸움터를 옮겨야 했다. 바로 ‘겨 묻은 개’ 전략이다. 조국 자녀의 입시 의혹에는 나경원 자녀의 입시 의혹으로 응수한다. 사모펀드를 비롯한 재산형성 논란에는 ‘300명 국회의원 다 털어보자’는 고함이 나온다. ‘전통기득권’의 집결체인 자유한국당에서 도덕성을 전장으로 잡은 것이 희극이었다면, 조국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를 모두 ‘기득권의 저항’으로 몰아세우며 다음 전장인 진영논리로 끌고 간 것은 비극이었다. “조국이 밀리면 문재인이 밀린다”는 논리는 이 진영논리의 핵심이다.


진영논리는 자성과 평가의 여지를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네 편과 내 편만 남는다. 이 정권이 내세웠던 핵심 가치인 ‘공정성’이 무너지는 위험성을 경고한 민주당 박용진 의원에게는 1만여 통의 문자메시지가 쏟아졌다. 조국의 언행 불일치를 지적한 같은 당 금태섭 의원도 문자 폭탄을 피할 수 없었다. 이 진영논리 속에서는 노동자든 농민이든 학생이든, 그 진영 밖에 서는 순간 과녁이 된다.


메시지를 독해하기보다 메신저를 검문하는 현상 역시 진영논리의 함정이다. 주장의 근거와 함의는 관심 밖의 문제가 됐으며, 어느 언론사인지, 어느 단체 소속인지가 타격 여부를 판단하는 핵심으로 떠오른다. 메신저에 주목하는 것은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거기까지만 활용해야 한다. 메신저의 정체 그 자체가 반대의 공식적인 이유가 될 경우 위험하다.



모든 것을 집어삼킨 진영논리의 덫


이 진영논리 덕분에, 인사청문회와 후보검증 과정에서 드러났어야 할 ‘정상적인 쟁점’은 설 곳을 잃고 사라졌다. 가장 뜨거운 논점인 자녀 입시문제의 경우, 서울대와 고려대 학생들이 학내 집회를 열자, 집회를 주도하는 세력의 정체와 배경이 도마 위에 올랐다. ‘낙마 요구는 곧 전통기득권 세력의 요구이기 때문에, 이 집회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집회’로 ‘명쾌하게’ 정의됐다. 집회를 주도한 학생들의 정치적 성향을 판가름하는 것은 진영논리에 도움이 되지만, 상황을 해결하는 데에는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문제는 보수정치에 기웃거렸던 이들이 당당하게 집회를 열고 참여를 호소할 수 있는 상황이다.


정치가 읽어야 할 핵심적인 문제는 ‘어느 세력이 집회를 여는가’라는 식의 메신저 검문보다, ‘평범한 이들의 박탈감’이라는 메시지였다. 자사고, 특목고, 대학서열로 이어지는 특권교육의 문제다. 경제력과 기득권의 카르텔 없이는 접근할 수 없는 이 특권의 상속이다. “불법은 없었다”는 조국의 해명이 평범한 학생들을 더욱 허탈하게 하는 이유는, 이제 기득권의 대물림에 더 이상 불법조차 필요하지 않게 된 현실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와 같은 박탈감을 인식해서인지 ‘입시제도 전반에 대한 재검토’를 주문했다. 하지만 이 주문을 받은 정부조직은 상산고 자사고 지정 취소를 거부하며 특권교육을 유지했던 이들이다. 단 하나의 자사고도 폐지하지 못한 정권에서 ‘재검토’를 이야기한들 무슨 권위가 있겠는가. 이 대통령 지시로 생겨난 변화라곤 수능 전문 입시업체인 메가스터디 주가가 급등한 것이 유일했다.


이것이 한국 교육체제의 현실이다. 입시 제도를 바꾼다 한들, 결국 변화된 제도를 빠르게 숙지하고 허점에 접근할 수 있는 이들은 ‘있는 사람들’이다. 철옹성 같은 대학 서열이 버티고, 이 성문을 열기 위한 값비싼 사교육 시스템이 빗장을 걸고 있는 지금의 체제에서, ‘입시제도의 공정성’은 허구적이다. 특권교육을 폐지하고 보편적인 국가책임의 양질 교육을 실현하지 않는 이상, 같은 시험을 치르더라도 출발선은 늘 다르다.



기득권과 기득권의 충돌


조국이 법무부장관으로서 추진하겠다는 ‘개혁정책’을 들여다보면 더 참담하다. 소위 ‘개혁의 아이콘’이란 이가 내놓은 정책치곤 빈약하다 못해 부끄러운 수준이다.


검찰개혁 방안의 경우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든 검경 수사권 조정이든, 결국 대중의 통제로부터 유리된 권력기구의 본질은 하나도 건드리지 못한 채, 검찰의 사정 기관을 유지하거나 오히려 강화하는 내용을 내놓았다. 오히려 인사청문 정국을 거칠수록 검찰개혁에 적절하지 못한 지위로 스스로를 밀어냈다. ‘부인 기소’라는 유리바닥을 깔아둔 채, 크고 담대한 걸음걸이를 하기란 쉽지 않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조국은 ‘문재인 정부의 아이콘’이기도 하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2년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 이렇다 할 개혁조치를 내린 것이 없다. 이미 지치고 다치며 이 정부의 개혁에 대한 기대를 잃은 사람들에게, ‘사실은 그도 그 기득권 중 한 명’이라는 민낯은 지지를 얻기에 옹색하다. 조국의 부인과 자녀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무리하고 이례적이며 정치적이란 것을 잘 알고 있는 이들이, 선뜻 조국을 지지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치검찰’이라는 기득권을 해체하는 싸움에서 ‘조국의 말’은 그를 적격자로 만들어 왔다. 하지만 ‘조국의 삶’이 그의 말을 배신한 상황에서, 조국 역시 기득권의 하나였을 뿐이라는 점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조국은 인사청문회에서 현존하는 차별을 긍정하고,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해서도 유보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동성혼 금지 유지 입장과 같이, 성소수자 인권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민변에서도 조국이 제시한 ‘범죄를 반복하는 정신질환자’ 정책공약에 대해 “정신장애인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확산시키는 등 혐오와 차별을 조장한다는 점에서 깊은 우려를 표한다”고 비판했다. ‘집회시위에 대한 단호한 법집행’ 정책공약 역시 집회와 폭력을 연관 짓는 구태 논리를 반복한 내용인 데다가, 과거 조국 스스로가 주장했던 “집회의 자유를 폭넓게 보장해야 폭력 시위가 줄어든다(2009년)”는 시각과도 배치된다는 점에서 오히려 후퇴했다는 평가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진영논리가 2020년 총선을 비롯한 정치 일반을 지배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와 경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를 두고 다투는 것이 아니라, ‘너는 누구 편이냐’는 선 긋기 속에 양강 구도를 조장한다. 재벌체제 청산에 대한 전망이나, 국회 논의를 코앞에 두고 있는 노동개악 등 여러 쟁점은 이 진영 다툼 속에 기지개조차 펴지 못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 모두는 최근 조국 사태를 정치적 이득으로 계산할 것이다. 진영논리는 양당 구조를 더욱 굳게 만들기 때문이다. 조국 인사청문 정국에서 다른 원내정당들은 이 두 세력 중 ‘어디에 가까운 정당인가’ 이상의 의미를 획득하지 못했다. 정의당이 보여준 ‘데스노트 딜레마’는 그 상징적인 사례다. 최근의 한국 정치는 그야말로 ‘기득권 정치’라 부를 만하다.



진짜 개혁을 원한다면


조국을 둘러싼 일련의 사태는 우리 사회에 두 거대한 기득권의 충돌을 보여줬다. 자유한국당-검찰-보수언론으로 상징되는 ‘전통기득권’과, 386-강남좌파로 상징되는 ‘신흥기득권’이다. 정말로 개혁을 원하는가. 이는 두 기득권 사이의 다툼으로는 깰 수 있는 카르텔이 아니다. 권력의 상층에서 서로를 견제하기 위한 다툼은 개혁이 아니다. 실제 민중의 삶과 연결되고, 기득권 일반을 타파할 수 있는 것이 개혁이다. 이를 위해서는 그것이 ‘전통기득권’이든 ‘신흥기득권’이든, 기득권 밖의 세력이 필요하다. 이제는 기득권 전쟁으로 변질된 ‘개혁’이란 단어가 아니라, 판을 뒤집는 한국사회 구조의 ‘변혁’이란 단어가 필요하다.


이를 문재인 정부에게 기대하는 것은 무망하다. 지금의 체제에서 소위 ‘꿀 빨아온’ 이들에게 구조변혁을 기대할 순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기득권 사이의 이전투구가 가져오는 박탈감과 피로감, 정치 냉소와 혐오에 주저앉는 순간, 정치는 계속해서 그들의 놀이터가 된다. 평범한 학생, 가진 것 없는 빈민, 몸뚱어리 하나로 하루를 버텨내는 노동자가 변혁의 정치를 만들어야 한다.

© k2s0o1d6e0s8i2g7n.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