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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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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적완화, 

위기 대응은 더 큰 위기를 부른다


홍석만┃참세상연구소



금리정책의 포기


경제위기나 침체 시 거시경제 대응으로 대개 중앙은행의 통화정책과 정부의 재정정책이 고려된다. 지금 상황은 적극적 재정정책이 요구되지만, 국가부채 문제로 중앙은행이 국채매입 등을 통해 재정을 지원하지 않는 이상 적자재정은 어렵다. 통화 정책에서도 가장 중요한 금리정책은 사실상 포기했다. 현재 주요국 기준금리는 0~1%대로, 경기부양을 위해 더 낮출 수준도 못 되며, 경기침체 대응을 위해 미리 금리를 올려놓을 경제상황도 되지 못한다. 미국조차 양적완화로 몇 배나 부풀어 오른 연방준비제도(연준: 미국 중앙은행)의 대차대조표를 축소하려고 출구전략과 금리인상에 나섰지만, 결국 2.5%까지밖에 올리지 못하고 9월에 다시 2%로 기준금리를 낮췄다. 이런 저금리 상황에서 금리정책은 적어도 위기 대응책으로는 쓸모가 없다. 경제는 이른바 유동성 함정에 빠졌고, 각국 금리는 제로금리 하한에 고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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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이제는 ‘마이너스 금리’가 종종 거론된다. 금리를 계속 인하해 제로금리 밑으로 유지하는 것을 마이너스 금리라고 하는데, 모든 금리에 적용하는 게 아니라 주로 시중은행이 중앙은행에 예치한 초과지준*에 대해 적용한다. 마이너스 금리는 금리인하처럼 경기부양이 목적이다. 시중은행이 남은 자금을 중앙은행에 예치하지 말고 대출 등을 확대해 돈을 풀라는 의미다. 현재 유럽중앙은행ECB, 일본, 스위스 등에서 제한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이 정책은 기준금리가 제로 하한에 잡힌 상태에서 경기가 수축할 때 검토할 수 있다. 그러나 은행 수익성이 악화할 우려가 있어, 침체가 본격화하면 은행 위기가 확대되기 때문에 마이너스 금리를 유지할 수가 없다. 그래서 대부분 기준금리 자체를 마이너스로 조정하지는 않고(일본만이 단기정책금리를 –0.1%로 설정했다) 은행의 초과지준이나 대기성 수신**에 대해서만 적용한다. 즉, 마이너스 금리는 은행 수익성이 악화하지 않는 조건에서 제한적 경기부양 조치로서만 작동하고, 은행이 경기 침체에 따른 각종 부실 위험에 빠지면 거꾸로 양적완화 등을 통해 은행 구제에 나서게 된다.


이런 점 때문에 시중은행에서 고객 예금을 상대로는 마이너스 금리를 적용하지 못한다. 일반 예금에 마이너스 금리를 적용하면 뱅크런을 촉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기수축 국면에서 위기의 도화선이 될 가능성이 커 일반 예금에 대한 마이너스 금리 적용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반면, 미국은 (마이너스 금리를 적용할 경우) 은행의 금융채널 기능이 왜곡될까봐, 중앙은행에 예치된 시중은행의 초과지준에 대해 오히려 기준금리 수준의 이자를 더 붙여준다. 유럽과 일본의 마이너스 금리와는 정반대인데, 현재 연준은 은행의 신용창출 확대에 여념이 없다. 초과지준이 많아질수록 위기 시 시중은행에 다시 공급할 명분이 높아지겠지만, 초과지준부리(시중은행이 예치한 초과지준에 대해 중앙은행이 지급하는 이자)는 일상 시기에도 중앙은행이 시중은행에 화폐를 거저 주는 것이라 논란이 되고 있다. 현재 미국 초과지준액이 1조 3천억 달러(약 1,500조 원)로 추정되는데, 이자율이 연 2.20%면 이자가 연간 330억 달러(약 40조 원)다. 연준은 지난 위기에서 은행이 보유한 MBS(주택저당증권: 2008년 금융위기의 도화선) 같은 부실자산을 가장 안전한 자산인 미국 국채와 서로 바꿔주었고, 투자은행까지 상업은행으로 바꿔 유동성을 공급했다. 그 결과 돈을 더 풀 데가 없었던 시중은행은 남은 돈을 연준에 대거 예치했다(초과지준). 여기에 연준이 이자까지 붙여주니, 은행에 돈을 사실상 공짜로 주면서 쓰고 남은 돈에 이자까지 얹어 준 꼴이다.



양적완화의 정치경제학


결국 2008년 금융위기 대응 과정에서 비전통적 수단으로 거론된 양적완화 외에는 뾰족한 통화정책 수단이 없다. 미국 연준은 금리정책보다 양적완화를 공식수단으로 자리매김하려 하고, 이를 믿고 9월부터 기준금리 인하에 나섰다. 유럽중앙은행도 9월부터 마이너스 금리의 추가 인하는 물론 양적완화에 나서겠다고 밝혔고, 경기침체가 본격화하면 양적완화 규모를 더 늘리는 방식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양적완화는 몇 가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 양적완화는 보편적이기보다는 선별적(차별적)이다. 중앙은행의 정책은 거시경제 주체들에게 고른 영향을 미쳐야 한다. 그런데 2008년 금융위기 대응에서 양적완화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특히 연준의 양적완화는 그동안 중앙은행이 금기시했던 일을 매우 선별적으로 진행했다. 금융위기의 직접적 촉매였던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라더스의 파산을 용인한 반면, 다른 투자은행들은 은행법을 바꾸면서까지 직접 지원해 구제했다. 게다가 파산에 이른 자동차기업 GM과 세계 최대 보험사 AIG를 국유화했다. 그리고 금융위기의 직접적 동인이 된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 등 부실 MBS를 미국 국채와 선별적으로 교환해 사실상 살생부 역할을 주도했다. 그 결과 기업 구조조정과 통폐합을 진두지휘하면서 살아남은 기업을 중심으로 독점이 공고해졌다. 금융회사 이외에 지원을 받지 못한 기업이나 노동자, 서민들은 경제위기의 쓰나미를 그대로 겪을 수밖에 없었다(월스트리트 점거 운동의 발발 원인).


둘째,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양적완화로 장기불황과 경기침체의 근본 원인인 과잉자본을 퇴출·축소시키는 게 아니라 더 양산한다는 점이다. 너무 많이 먹어 고도비만이 된 환자에게 계속 고열량 음식과 영양제를 공급하는 셈이다. 2007년 말까지 8,372억 달러였던 본원통화(중앙은행이 발행해 풀린 화폐공급)가 양적완화를 종료한 2014년 10월에는 4조 15억 달러로 4.8배나 늘었다. 연준Fed은 1913년 미국 중앙은행이 됐는데, 지난 100년 동안 발행한 돈의 4배가 넘는 액수를 단 5년 만에 풀었다. 현재 이를 줄이기보다는 오히려 공식적으로 더 늘리겠다고 한다(통화정책수단으로 양적완화의 공식화). 미 연준의 대차대조표가 3~4배 커졌다는 것은 그만큼 시중의 부채도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금융팽창을 용인하면서 화폐적 자본 총량을 확대하는 것이기 때문에, 생산자본은 물론 사회적 총자본의 과잉을 더욱 부추긴다.


셋째, 미국, 유럽, 일본 등 기축통화국의 양적완화는 선진국의 부실을 신흥국에 전가하고 금융거품을 더욱 키운다. 양적완화가 이뤄질 때에는 선진국에서 흘러넘친 돈이 신흥국으로 몰려 금융과 자산시장의 거품을 키우고, 위기가 본격화하면 신흥국에서의 자금유출로 외환위기를 겪게 만든다.



양적완화는 더 큰 위기를 낳는다


지난 10여 년의 양적완화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회복은커녕 다시 위기에 빠져들고 있다. 풀려나간 돈 때문에 주식과 부동산 등 자산시장은 일시적 호황을 맞았지만 여전히 생산성은 침체해 저성장의 늪에 빠졌다. 정상적 경기회복 조건인 과잉자본 퇴출이나 한계 기업 청산도 일어나지 않는다. 매년 이자도 못 갚는 한계 기업들은 죽지도 않고 낮은 금리로 차입을 늘려 목숨을 부지한다. 이런 ‘좀비기업’은 2008년 세계대공황 이전보다 2배 이상 늘었다. 또한 미국, 유럽, 일본, 중국 등 기축통화국이 아니라서 양적완화조차 하지 못한 신흥국들은 양적완화의 피해를 온 몸으로 떠안고 있다.


부채를 줄이고 환부를 도려내는 것(이른바 ‘창조적 파괴’) 외엔 지속된 위기를 벗어날 계기조차 잡지 못한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양적완화와 같은 선별적, 차별적 대응은 국내적으로는 노동자와 서민들에게, 국외적으로는 신흥국으로 피해를 전가시키며, 기업부채도 역사상 가장 큰 규모로 확대되고 있다. 노동자와 서민을 희생시켜 자본을 구제하려는 것은 결국 더 큰 위기와 침체를 낳게 된다.




* 초과지준: 은행이 예금액 가운데 대출 등으로 내보내지 않고 일정 비율로 보유하고 있어야 하는 금액을 ‘지급준비금(지준)’이라고 한다. 그런데 각국이 지정한 비율을 초과해 은행이 지급준비금을 보유할 경우, 이를 ‘초과지준’이라 부른다.


** 대기성 수신: 중앙은행이 개별 금융기관을 대상으로 일시적 여유자금을 예금할 수 있게 해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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