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부터 살처분까지,
곳곳에 탐욕이 흐른다
한혁┃서울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이 한국에서도 최초 발생해 세간의 관심이 쏠리던 시점, 또 다른 화젯거리가 전국을 휩쓸었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 용의자가 특정된 것이다. ‘건국 이래 최대 미제 사건’이었던 흉악범죄 용의자를 30여 년 만에 DNA 분석으로 밝혀 뜨거운 이슈가 됐다.
치료제도 백신도 없는 최악의 가축전염병 아프리카돼지열병의 ‘범인’을 찾으려는 노력도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수십 년 전 사건의 범인도 밝혀내는 마당에 최근 사태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쯤이야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는데, 진범(?)을 찾는 것은 여전히 난항을 겪고 있다.
아프리카돼지열병은 1921년 저 멀리 아프리카 케냐에서 처음 보고됐다. 발열과 출혈이 대표적인 증상이고, 급성형은 치사율 100%에 달하는 질병이다. 덩치가 큰 바이러스에 의한 병인데, 이 바이러스가 200종 넘는 단백질을 만들어내 변이가 다양하게 일어난다. 여러 단백질이 복합적으로 질병을 유발하니 백신 개발이 어려워 치료제도 아직 만들지 못했다.
아프리카에서 최초 발생한 지 36년 후 유럽으로 넘어간 이 병은 여러 나라를 괴롭히다 1990년대 중반에야 박멸됐다. 그러나 2007년 동유럽 국가 조지아에서 다시 발병했고, 이어 중앙아시아·러시아·중국·동남아시아로 퍼졌다. 그리고 올해 5월 북한 자강도에서 발생이 공식 확인된 지 4개월여 만에 한국에서도 확진됐다.
아프리카돼지열병의 피해는 어마어마하다. 중국은 1억 3천만 마리의 돼지를 살처분했고, 경제적 피해 규모는 1조 위안(약 170조 원)에 달한다고 한다. 게다가 여전히 진행 중이기 때문에 피해는 더욱 불어날 것이다. 올해 5월 발병이 확인된 북한의 경우, 국정원에 따르면 평안북도 돼지가 전멸했다고 한다.
한국 양돈업계는 2018년 기준 돼지 1,735만 두를 출하했고, 여기에 수입량 45만 톤을 더하면 국내 돼지공급량은 137만 톤에 달한다. 2016년 돼지생산액은 6조 7,702억 원으로, 쌀을 제치고 농업 생산액 1위 품목이다. 이 수치는 돼지생산량만을 파악한 것이고, 외식업과 축산물가공업 등 연관 산업을 더하면 훨씬 크다. 정부가 바짝 긴장하며 원인분석과 대책 마련에 부심하는 것은 당연하다.
△ 이달 초 검역본부가 배포한 아프리카돼지열병 교육자료다. 이 자료에 따르더라도 발생원인에서 야생 멧돼지가 차지하는 비율은 미미하고, 대부분이 축산물 이동이나 잔반 사료로 발생한다.
정말 ‘야생 멧돼지’가 범인일까
현재 한국 내 아프리카돼지열병 전파의 주범으로 ‘야생 멧돼지’가 계속 거론되고 있다. 한돈협회(구 양돈협회)는 아프리카돼지열병 발생을 막기 위해 국내 서식 야생 멧돼지 70%가량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내 야생 멧돼지 개체 수 추정치가 30만 마리인데, 이를 10만 마리까지 낮춰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으로 치면 강릉 규모의 도시 하나를 통째로 몰살하는 셈이다. ‘동물복지 선진국’이라는 독일과 프랑스도, 인접국 벨기에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이 발생하자 군 저격병까지 동원해 1년여 만에 야생 멧돼지 130만 마리를 사살했다.
그렇다면 실제로는 어떨까? 유럽식품안전청에 따르면, 2008~12년 아프리카돼지열병 전파요인 중 야생 돼지에 의한 전염은 전체 284건 가운데 4건에 불과했다. 비율로는 1.41%다. 오히려 잔반 사료와 축산물 이동에 의한 감염이 70% 이상을 차지한다(원인불명 22.89%). 세계적으로 야생 멧돼지에 의한 감염사례는 러시아에서 보고된 2건밖에 없다.
한국에서도 작년부터 천 마리 넘는 야생 멧돼지 추적조사 결과 아프리카돼지열병 감염사례가 없었고, 국방부도 월경한 야생 멧돼지는 없었다고 보고했다. 야생 멧돼지의 질병을 태풍 링링이 임진강을 따라 퍼뜨렸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지난 27일 환경부가 임진강 등 접경 지역 하천수에서 바이러스가 검출되지 않았다며 반박했다. 하지만 여전히 야생 멧돼지는 ‘범죄자’ 혐의를 벗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초래한 ‘부실 검역’
바이러스 전파요인 중 1.4%에 불과한 야생 멧돼지가 아니라, 70% 이상을 차지하는 축산물 이동과 잔반 사료에 관심을 기울여보면 어떨까? 9월 17일 농림부는 아프리카돼지열병이 발생한 파주 농가에서 잔반이 아니라 ‘사료 회사 공급 제품’을 사용한 것으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어떤 회사의 어떤 제품인지는 불분명하다. 한편, 지난해 10월 동아일보는 “해외수출용 중국 돼지 혈액 원료 사료서 아프리카돼지열병 바이러스 검출”이란 제하의 기사를 보도했다. 한국에도 납품하는 중국 업체가 해외에 수출하려던 사료용 돼지 혈구 단백분粉에서 이 바이러스가 나왔다는 것이다. 잔반이 아닌 사료를 썼다고 안심할 수 없는 이유다.
해외 축산물의 국내유입도 살펴봐야 한다. 검역본부가 연간 적발해 불합격 처리하는 축산물은 비 휴대용 1만 6천~2만여 건, 휴대 축산물은 2018년 한 해에만 10만 2천여 건에 달했다. 중국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이 발생한 뒤, 올 상반기에만 5만 4백여 건의 불법 휴대 축산물이 단속됐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 검역 조사 건수는 2019년 상반기 155건에 그쳤고, 이 중 7월 초까지 14건의 아프리카돼지열병 양성 판정이 나왔다. 단속된 불법 유입 휴대축산물의 0.36%만 검사했는데, 이 가운데 9%에서 바이러스가 발견된 것이다.
왜 검역이 이토록 부실했을까? 검역 인원이 대폭 줄어든 탓이다. 지난 2013년 박근혜 정부는 불량식품을 4대 사회악으로 지정해 척결하겠다며 농림부 소속 수의직 공무원 164명을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로 이동시켰다. 그런데 이후 식약처는 식품 안전관리업무를 다시 농림부에 위탁했다. 검역 전문 인원 절반을 빼간 뒤, 업무만 다시 돌려준 것이다. 이런 조건이니 검역이 제대로 가능했을 리 없다.
‘야생 멧돼지’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문제다
역학조사에서 처음 구체적인 감염경로를 확인한 것은 2007년 조지아 사례일 것이다. 남부 아프리카에서 사람의 선박 잔반을 통해 동유럽에 전파됐고, 매년 350km씩 동북진했다. 작년 중국 랴오닝성 선양시에서 발생한 아프리카돼지열병은 4달 만에 중국 전역에 창궐했다. 돼지를 고깃값이 높은 지역으로 2,000km 이상 장거리 이동 시켜 매매하는 관행 때문이다.
100여 년 전 아프리카에서 발생한 질병을 아시아 동쪽 끝 한국까지 옮긴 주범은 누구일까? 여전히 야생 멧돼지가 의심스러운가? 물론 가능성은 있다. 그리고 이번 사태의 최초 원인이 영원히 미제로 남을 수도 있다. 30여 년 전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을 밝혀내는 현대 과학기술로도 이 흉악한 질병의 균이 어떻게 침투했는지 밝혀내지 못할 가능성도 높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다. 더 많은 육식을 향한 인간의 욕심, 더 많은 이윤을 쫓는 자본주의의 탐욕이 아프리카돼지열병을 지구적 재앙으로 만든다는 점이다. 필연은 우연을 통해 제 모습을 드러낸다. 자본주의에서 괴물처럼 거대해진 축산업, 과잉생산을 위한 공장식 축산과 국경을 뛰어넘는 이윤 추구가 없었다면 아프리카돼지열병이 이토록 빠르게 지구상 여러 나라를 떠돌지도 못했을 것이며, 수억 마리의 농장 돼지와 야생 멧돼지가 생목숨을 잃지도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야생 멧돼지가 아니라 자본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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