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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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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19.11.18 18:01

로자 룩셈부르크

Rosa Luxemburg 1871~1919


독일 혁명의 붉은 독수리


백종성┃조직‧투쟁연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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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대전이 세계사에서 전환기라는 점 한 가지는 분명하다. 나중에 명랑하게 이전의 습관에 다시 젖어들기 위해 덤불 아래에서 천둥번개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토끼처럼 이 전쟁에서 그저 살아남기만 하면 될 거라는 식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 1915년 4월, 로자 룩셈부르크


1914년 8월 4일, 독일 사회민주당 의원단 전원은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전쟁공채 발행에 찬성했다. “우리는 위험의 순간에 조국을 외면하지 않는다”는 선언과 함께. 제2 인터내셔널(각국 사회주의 정당의 연합체)의 기둥이었던 독일 사민당이 독일 황제와 나란히 섰다는 소식은 레닌을 비롯한 전 세계 사회주의자들에게 날벼락이었다. 뒷날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죽음을 맞이한 동료 혁명가 칼 리프크네히트조차 반대도 아닌 ‘기권’을 택했을 정도로, 사민당은 세계대전이 낳은 민족주의 광풍에 굴복했다.


1889년 창립 이래, 거의 모든 대회에서 거듭된 제2 인터내셔널의 반전反戰 결의는 이날 허무하게 파산했다. 열강의 격돌은 거대한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고, 이 전쟁은 인류를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의 갈림길에 서게 할 것이라는 점은 사회주의자들에게 명백했다. 그러나 정작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인터내셔널은 독일 사민당의 배신과 함께 내부로부터 붕괴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이미 1차 대전 당시 독일 사회민주당은 100만에 달하는 당원, 독일의 모든 도시에 유통되는 일간지, 소비조합, 노동자 스포츠클럽을 가지고 있었으며, 260만 조합원이 속한 노동조합의 지지를 받는 거대정당이었다. 지속되는 호황은 노동조건의 점진적 개선을 가능하게 했다. 모든 조건이 노동계급에 유리해 보였다.


이런 조건 속에, 당내에는 ‘대체 혁명이 왜 필요해?’라고 묻는 수정주의가 득세하게 된다. 혁명가보다 행정가에 가까운 사람들이 당 요직을 꿰차기 시작한다. 1900년, ‘혁명이라는 목표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점진적 개혁뿐’이라고 주장한 당내 우파 베른슈타인은 이론적으로는 패배했으나, 사민당의 실천은 이미 체제에 길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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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7년 군중에게 연설하는 로자 룩셈부르크



사민당을 거슬러


로자 룩셈부르크는 전쟁 이후 비로소 당을 거슬러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간 ‘개혁이냐 혁명이냐’를 둘러싼 숱한 논쟁에도 사민당 안에 머물던 로자 룩셈부르크였으나, 독일 사민당의 정치적 파산은 이제 명징한 현실이었다. 그녀가 보낸 300통의 전보에 클라라 체트킨이 응답했다. 이것이 훗날 “스파르타쿠스 동맹”이라고 불릴 사민당 내 급진 분파의 기원이자, 1918년 독일 혁명과 함께 건설된 독일 공산당의 맹아였다. 칼 리프크네히트, 프란츠 메링, 레오 요기헤스 등이 그녀와 함께했고, 이들은 <인터내셔널>, <스파르타쿠스 통신> 등 기관지를 발행해 반전운동을 지속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대중의 불만도 커졌다. 1917년 4월, 독일제국의 전쟁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한 에베르트가 이끄는 사민당 다수파를 제외한 좌파와 중앙파가 “독립사회민주당”을 창당했고, 스파르타쿠스 동맹은 독립사민당 내 좌파로 활동한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전쟁과 동원체제에 대중의 환멸이 쌓였다. 병사들에게도 패전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1918년 11월 2일, 독일 군부는 수병들에게 출정을 명했고, 수병들은 자살과도 같은 출항 명령을 거부한다. 독일혁명의 시작이었다. 독일 주요 도시 전역에 노동자·병사 평의회가 수립되기까지, 11월 9일 황제 빌헬름 2세가 폐위되기까지 고작 1주일이 걸렸을 뿐이다. 1년 전 러시아처럼, 대중의 분노는 일순간에 제정을 무너뜨렸다.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사민당 지도자 에베르트는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이라고 불릴 국가를 예비하는 임시정부의 초대 총리가 되었다. 이제 사민당은 제정시대의 관료들과 함께 자본주의 체제를 안정화시키고, 노동자‧병사 평의회의 권력을 해체하는 역할을 떠맡았다. 부르주아 공화국이냐, 사회주의 공화국이냐의 갈림길이었다. 대립은 격화했다.



붉은 로자도 사라졌네


1918년 12월 30일, 마침내 로자 룩셈부르크와 동료들은 갈지자 행보를 거듭하던 독립사민당을 떠나 독일 공산당을 창당한다. 독일 공산당은 상황을 이끄는 당이라기보다, 상황이 만든 당이었던 셈이다. 1차 대전이 터지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도 사민당 내 비판적 지식인 그룹에 머물렀던 로자 룩셈부르크와 그녀의 동료들은 노동대중과 융화해 혁명을 이끌 탄탄한 조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1919년 1월 5일, 임시정부의 도발에 대한 반사적 대중행동이자 뒷날 “스파르타쿠스 봉기”로 불리게 될 섣부른 대중행동에 룩셈부르크는 반대했다. 그러나 그녀의 동료 리프크네히트에게는 사회주의 공화국의 승리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보였고, 그는 고집스럽게 봉기를 주장했다. 결국 봉기는 실패하고,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는 사민당원이자 임시정부의 군사업무 담당인 구스타프 노스케가 이끄는 “자유군단”에게 살해당해 운하에 버려진다. 1917년 7월, 준비되지 않은 봉기와 함께하는 동시에 퇴각을 설득할 수 있었던 그녀의 러시아 동지들을 생각할 때, 또한 독일혁명을 그 누구보다 기다리던 러시아 노동계급을 생각할 때, 더욱 비극적인 죽음이었다. 혁명 시인 브레히트는 다음과 같이 그녀를 추모했다. “붉은 로자도 사라졌네, 그의 몸이 쉬는 곳조차 알 수 없으니.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유를 말했고, 그 때문에 부자들이 그를 처형했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