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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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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19.12.02 21:22

해광解光 김사국金思國 (1892~1926)


조선 사회운동의 선구자


나영선┃노동자역사 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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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죄판결을 받은 ‘독립단’의 모든 성원은 1921년에 형기를 마치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문화주의자들’ ‘테러리스트들’ ‘마르크스-공산주의자들’ 등 독자적 사상을 가진 3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졌다. 문화주의자들은 혁명적 활동의 방법을 부인하였고, 진화론을 선전하였다. 테러리스트들은 조직적인 테러와 점령기관의 파괴를 위해 크고 작은 테러의 시도를 적극 옹호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지하조직을 강화하고 주로 산업노동자와 혁명 지향적인 청년들의 조직사업을 수행하였다.”


이 글은 1924년 3월 17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 보고된 <조선 내 공산주의조직의 발생과 활동 약사>의 일부다. 이 보고서의 작성자는 ‘고려공산동맹’이 코민테른의 지부 승인을 위해 대표자로 파견한 김사국이었다. 김사국은 위 보고서에서 식민지 조선 사회주의 운동의 발생 연원을 3.1운동에 참여했던 혁명적 민족주의자들로 보고, 3.1운동 퇴조기에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세력들의 사상적 분화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이는 사실에 부합했다. 3.1운동 평가에 따라 일부는 민족개량주의로, 일부는 의열단으로 대표되는 테러리즘으로, 일부는 사회주의자로 분별 정립됐다. 그것은 보고서 작성자인 김사국 본인에게 가장 부합되는 설명이었다. 3.1운동 이전 혁명적 민족주의 성향의 조선민족대동단에서 활동하던 그는 출옥 이후 가장 열렬한 사회주의자로 변모했다. 김사국뿐 아니라 20년대 조선 사회주의 운동을 열었던 활동가 대부분이 이와 같은 경험을 공유했다.



3.1운동 이후 열렬한 사회주의자로 변모


김사국은 1919년 4월 ‘국민대회사건’으로 구속돼 1920년 9월에 만기 출옥했다. 국민대회사건이란 임시정부 수립을 목적으로, 서울 13개도 대표자들로 조직된 국민대회를 개최하기 위해 대규모 시위를 실행한 사건이다. 시위를 주도했던 김사국은 그 대담한 기획으로 이미 주요한 지도자로 주목받는다. 1921년 서울청년회 창립 임원으로 참여하고, 동시에 황해도와 서울을 중심으로 강연 활동을 벌인다. 강연회는 당시 사회운동단체의 일반적인 활동방식이었다. 그가 동경으로 건너간 것은 10월경이다. 동경에서 김사국은 일본 유학생을 중심으로 사회혁명당을 결성하고, 1922년 1월 2차 대표자회의를 서울에서 개최한다. 대표자회의를 서울에서 열었다는 것은 서울청년회 내부 이영의 공산주의 소그룹과 통합해, 활동의 근거지를 동경에서 서울로 옮겼음을 의미한다. 1921년 10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조직 정비를 마친 이 그룹은 정책을 결정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나선다.


김사국, 이영, 임봉순 등을 주요 지도부로 한 이 그룹은 1922년 1월 ‘김윤식 사회장’ 반대를 시작으로 그 존재를 드러냈다. 이를 통해 김윤식의 사회장을 무산시켰으며 청년연합회 내부의 ‘문화운동’ 세력에게 타격을 가했다. 성과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이들 그룹과 다르게 조직된 국내 공산주의 그룹이었던 조선공산당*과 3월에 통합해 표면단체로 무산자 동맹을 출범하게 된다. 이는 커다란 진전이었다. 이 통합의 성공으로 조선청년연합회나 조선노동공제회 등에서의 세력 대결이 가능해졌다.


4월에는 조선청년연합회 3차 정기총회를 통해 청년운동의 상층에 포진한 문화운동 노선에 대한 비판, 청년단체가 1천여 개가 넘는데도 조직화율은 10%밖에 안 되는 부진한 사업, ‘사기공산당사건’ 등을 폭로하며 격렬한 내부투쟁을 전개한다. 비록 청년연합회에서의 제명에는 실패했지만, 6월에는 공개적인 투쟁으로 청년연합회의 중핵단체인 서울청년회에서 장덕수 세력을 제명하는 데 성공한다. 여기에 멈추지 않았다. 당시 최대 노동단체였던 조선노동공제회에서도 임시총회를 개최해 장덕수와 그 동료들을 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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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일보 1926년 5월 10일 자 기사



비밀결사 공산주의 그룹 ‘서울파’ 결성


김사국을 대표로 하는 그룹은 당시 조선 사회운동의 양대 대중조직이었던 청년연합회와 조선노동공제회 내부투쟁을 통해 대중운동 내부의 개량주의적 입장과 분별 정립하는데 성과를 거둔다. 하지만 이러한 조직적 성과를 내는 데 기반이 되었던 조선공산당은 10월 ‘베르흐네우진스크 통합 당대회’와 관련해 분열되고 만다. 결렬 직후인 1922년 10월 김사국은 독자적인 공산주의 단체를 조직하고 1923년 2월에 ‘고려공산동맹’으로 조직 명칭을 변경한다. 바로 당대와 훗날 ‘서울파’로 불리게 되는 그룹의 탄생이었다. 고려공산동맹은 코민테른과의 상설 연락기관 설치와 조선공산당의 승인을 받기 위해 김사국을 블라디보스토크에 파견했으나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 이유는 코민테른 방침과는 다른, 서울파가 견지한 당 조직 방침에 있었다.


서울파 공산주의 그룹은 독자적인 강령과 세포단체, 중앙기관, 정치적 규율을 가진 비밀결사였다. 이 그룹은 1922년 10월에 조직돼 1929년 8월 서울청년회 해소결의 이후, 1929~1931년 당 재건 운동의 일환이었던 ‘조선공산당 재건설 준비위원회’와 ‘좌익노동조합 전국평의회’가 일경에 의해 파괴되고 다수의 활동가가 구속됨으로써 서울파로서의 활동은 그치게 된다.


서울파 그룹의 주요지도자였던 김사국은 1926년 5월 8일 지병인 폐병으로 사망한다.



* 1925년 4월 17일 결성된 조선공산당과는 다르다. 국내 사회주의자들이 해외 운동과 거리를 둔다는 의미에서 ‘중립당’이라고 불렸던 세력으로, 김한, 신백우, 원우관, 정재달 등이 대표적인 활동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