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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사회주의자의 눈으로 본 2019년

사회주의가 필요했던 순간들


이주용┃기관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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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에도 자본주의의 폐해는 여지없이 곳곳에서 드러났다. 누군가에게는 고통과 좌절, 분노를 자아냈고, 누군가에게는 죽음까지 강요했다.


하지만 ‘사회주의’라는 말은 여전히 보수‧우익의 점유물로 남아 있는 듯하다. 실태생계비 수준도 안 되는 최저임금 인상조차 이들은 ‘사회주의’라고 아우성치며 비난한다.


그렇다면 이제 당당하게 “사회주의가 뭐 어때서?”라고 말할 때 아닐까. 2019년, 현실에 환멸을 느낀 순간들은 곧 사회주의가 필요한 순간들이기도 했다.



죽지 않기 위해


올해 벽두의 화두는 청년 비정규직 김용균의 죽음이었다. 노동자들은 위험을 알면서도 죽음의 일터로 내몰리고, 공기업의 다단계 하청과 위탁으로 민영화가 공공부문을 잠식했다.


사회주의라면 달랐다. 사회주의에서는 노동자들이 직접 작업과정과 환경을 통제할 권한을 갖는다. 죽거나 다칠 수 있는 위험한 공정에는 애당초 사람 대신 기계나 로봇을 투입해 노동자의 안전을 확보하는 동시에 노동시간을 줄이고, 불가피한 경우라도 故 김용균처럼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공간에 홀로 들어가 작업하지 않도록 충분한 인원을 고용한다.


또한, 사회주의에서 주요 기업은 국가나 사회가 소유하며, 고용 역시 국가와 사회가 직접 책임진다. 에너지 생산과 공급을 담당하는 발전소처럼 공공성이 강한 영역은 말할 필요도 없다. 여기에 민영화가 끼어들 곳은 없다.


문재인 정부 아래에서 여전히 하루에 5명의 김용균이 목숨을 잃지만, 사회주의에서 노동자들은 스스로 죽음을 막아낼 힘과 체제를 갖게 된다.



사립유치원 사태


새 학기가 시작하던 3월에는 학부모들이 뒷목을 잡는 일이 벌어졌다. 사립유치원들이 ‘회계를 투명하게 관리하라’는 정부 방침조차 거부하며 ‘개원 연기’로 맞섰기 때문이다. 이는 여론의 반발로 하루 만에 끝났지만, 이들의 요구 앞에 ‘유치원 3법’은 아직 국회에 갇혀 있다.


사회주의에서는 더 이상 학부모들이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다. 국가와 사회가 철저하게 보육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모든 유치원과 어린이집을 국공립으로 직영화하는 한편, 직장 안이나 인근에도 공공 보육‧교육시설을 완비하고 교사 인력을 확충해 지금처럼 ‘줄 서서 대기번호 기다리는’ 일 없이 누구나 안심하고 자녀를 맡길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춘다.


이미 지금도 보육은 국비와 학부모들의 비용 지출로 충당되고 있다. 그 돈으로 민간 사업자들의 주머니를 채워줄 것인가, 아니면 모두가 신뢰하는 공공 보육체계를 만들 것인가가 바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근본적인 차이다.



집값, ‘잡는다’ 해도 높다


올여름부터는 주택 가격이 다시 들썩이더니, 정부가 ‘분양가 상한제’를 거론하며 부동산 투기를 잡겠다고 작년에 이어 대책들을 발표했다. 하지만 규제 이후에도 집값은 청년이나 평범한 노동자에겐 꿈꾸기도 어려운 액수다.


사회주의에서는 국가와 사회의 책임으로 모든 사람에게 안정적인 주거를 공급한다. 허름하고 구석진 집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곳에 충분한 생활공간을 확보한 양질의 공공주택을 건립하고, 관리비 수준의 낮은 임대료로 영구히 임대한다. 거주하고 싶은 기간 동안 얼마든지 저렴한 비용에 안심하고 머물 수 있다.


사회주의에서 주택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이다. 감당하기 어려운 높은 금액을 지불해야만 안정적인 거주지를 확보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그에 상당하는 액수를 회수하면서 다시 그 주택을 판매하는 악순환은 사라진다.



지배자들의 민낯


9월부터는 조국 사태가 온 나라를 뒤흔들었다. 조국 사태는 자유주의자들의 ‘검찰개혁’ 공세와 맞물려 두 가지 이슈를 제기했다. ‘고위 공직자’에 대한 통제와, 교육을 통한 특권 세습 문제다.


자유주의자들은 ‘검찰개혁’으로 국면을 돌파하려 했지만, 실상 그들이 제기한 ‘개혁’의 내용은 권력기관 사이의 권한 나눠먹기였다. 사회주의에서는 지금처럼 특권을 누리는 ‘고위 공직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공무원을 선출로 뽑을 수는 없지만, 행정이든 사법이든 책임이 큰 직책은 민중이 직접 선출하고 언제든 소환할 수 있게 함으로써 민주적인 통제체제를 만든다. 동시에 이들에겐 노동자 평균 수준의 보수만 지급될 뿐 어떤 특혜도 없다.


한편, 조국 자녀 입시 문제로 촉발된 교육 불평등에 대해서도 사회주의는 답을 가지고 있다. 왜 양질의 교육을 ‘특정한 소수’만 누려야 하는가? 교육에 대한 대폭적인 공공 투자 확대로 학생 대비 교원 수를 늘리고 다양한 기초‧심화 교육 프로그램을 갖추는 한편, 사립학교 중심의 대학 체제를 국공립으로 전환하고 서열을 없애 원하는 누구나 수준 높은 고등교육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한다. 자본주의에서 ‘시험을 통한 공정성’은 출발부터 불공정하지만, 사회주의는 ‘모두를 위한 수준 높은 평등’이 가능하도록 실제 기반을 마련한다.



사회주의는 거창하면서도, 거창하지 않다. 자본주의의 일상을 살아가며 우리는 크고 작은 불만을 느낀다. 사회주의는 그 불만의 현실을 어떻게 바꿔낼지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시작한다. 2020년에도 우리의 삶 곳곳에서 사회주의는 더욱 필요해질 것이다. 이제 보수‧우익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필요로 하는 우리가 그 이름을 대놓고 외치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