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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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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19.12.18 19:57

프랑수아-노엘 바뵈프 (1760~1797)


프랑스 혁명의 계승자,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가


이한서┃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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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은 우리가 살아가는 근대 사회의 신호탄 격인 사건이다. 근대 사회로 접어들며 계몽사상가들에 의해 자유니, 평등이니, 권리니 하는 개념들이 윤곽을 드러내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책 속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프랑스 혁명 당시 민중의 정치적 진출로 말미암아 비로소 그 뜬구름들이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로 임재했다. 그만큼 프랑스 혁명은 민중운동이 어떻게 정치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는지, 사회주의 운동의 뿌리는 무엇인지 짐작하는 데에도 중요한 사건이다.



“누가 이름만의 평등에 애착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바뵈프는 프랑스 혁명 중에서도 민중혁명과 깊은 관계를 맺고 ‘평등’, ‘우애’ 따위의 언어를 부르주아지에게서 빼앗아 민중의 무기로 벼려낸 혁명가다. 특히 그는 불평등의 근원으로 사유재산을 지목한 첫 근대사상가로 유명하다. 후일 그가 최초의 원형적인 공산주의자로 불리게 된 까닭이다.


혁명이 발발하고 1789년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 선포됐지만, 자유와 평등을 선언하던 그 와중에도 하층 민중은 하루하루 생활고에 시달렸다. 소유권이 “불가침의 신성한 권리”로 강조되었으니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을 테다. 바뵈프는 “누가 이름만의 평등에 애착을 느낄 수 있겠”냐며 부르주아 혁명의 모순을 꼬집었다. 그리고 혁명으로 구성된 입법의회에 “일자리가 없는 대다수의 민중에 생계수단을 마련해주어야 하는 의무”를 강조했다.


‘그라쿠스’*라는 별명답게 바뵈프가 집중했던 부분은 토지개혁이었다. 토지대장 기록원이었으며 한때 농촌공동체의 계원으로 일한 적 있던 그는 혁명 이전부터 경작 이익 분배와 집단농장으로 불평등을 타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본가적 대차지농**의 팽창과 빈농의 예속 경향을 생생히 보았기 때문이다. 혁명으로 입법의회가 구성되자 그는 토지 균분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나중에는 토지 사유제 폐지를 제기했다.



최초의 공산주의 봉기 모의


1792년 이후 프랑스 혁명이 부르주아혁명에서 민중혁명 국면으로 접어들며 민중과 반혁명 세력의 갈등이 격화했다. 로베스피에르를 필두로 한 혁명정부는 징발제, 공정가격제를 도입하는 등 통제경제를 실시했다. 산업재해 피해자 급여 지원, 다자녀 극빈 가구 사회보장급여, 식민지 노예제 폐지 등 각계 민중의 사회적 권리를 향상하는 조치를 시행했다.


그러나 혁명정부는 계급적으로 부르주아 정부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다. 정부는 민중운동을 통제하고 길들이기 시작했다. 구민총회, 혁명군 등 민중조직을 해산하고 좌파 정치세력인 에베르 파를 단두대로 보냈다. 민중과 혁명정부의 골이 깊어지고 생 쥐스트의 표현마냥 “혁명이 얼어붙은” 틈에 1794년 열월 반동***이 성공, 혁명정부가 무너졌다. 이후 반동세력과 새 정부인 총재정부 치하에서 보수적 질서가 자리 잡았다.


바뵈프는 이러한 정치적 위기와 물가앙등 같은 경제난 속에서 반란을 통해 사회체제를 전복하려는 구상을 실행에 옮겼다. 바뵈프를 비롯한 혁명가들은 1796년 ‘반란위원회’를 구성하고 강령을 갖추었으며 지휘부를 중심으로 파리 각 구와 지역으로 동심원처럼 퍼져나가는 조직 형태를 취했다.


한편 이들은 반란으로 권력을 장악한 후 새로운 체제를 출범하는 데 필요한 기간에 혁명적 독재가 불가피하다고 지적했다. 또한, 비록 구체적인 형태로 옮기진 못했지만 대중과의 연관도 이전 혁명정부의 실패에서 비롯한 중요한 과제로 상정했다.


‘평등주의자의 음모’로 불린 이 반란은 바뵈프를 비롯한 주요 인사들의 체포와 처형으로 막을 내렸다. 사건 자체로 보자면 실패한 봉기였지만, 민중혁명의 교훈을 정리해 새로운 시도에 반영함으로써 이후 혁명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공동 생산과 균등 분배를 강조했던 바뵈프의 사상은 훗날 생시몽 등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계승했으며 이는 맑스의 과학적 사회주의가 태동하는 거름이 됐다. 반혁명 세력의 지배하에서 혁명조직의 중요성, 혁명적 독재, 대중과의 연계라는 구상과 과제 또한 블랑키와 맑스가 물려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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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등주의자들이 '공화국의 등'을 치기 전 발각된 것으로 묘사된 삽화



근대 혁명운동의 진정한 계승자


우익 역사학자들은 프랑스 혁명에서 민중혁명의 역할과 의미를 들어내는 데 안간힘을 쓴다. 이들은 점진적으로 근대국가와 대의제를 확립하던 과정에 난데없이 민중의 난동이 발생해 잠시 혁명의 궤도를 이탈했다고 주장한다. 이는 자유주의의 역사만으로 지난 300년 세계사를 해석하려는, 지극히 부르주아 계급적 시각이다.


허나 근대사는 계급의 형성과 민중운동의 역사이자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이기도 하다. 민중혁명의 전통은 당장 프랑스 식민지에서 노예제 폐지 운동으로 번졌고, 바다 건너 영국의 러다이트 운동으로, 반세기 뒤 최초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자 국제혁명인 1848년 혁명으로, 러시아로, 세계 각지의 식민지 해방투쟁으로 끊임없이 이어졌다. 지배계급의 질서와 통치에 침묵하지 않고 나서기 시작했던 사회주의 혁명운동이야말로 프랑스 혁명 이래 끊이지 않는 역사의 주류이다.



*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고대 로마 공화정의 호민관으로, 토지개혁을 주도했으나 이에 반발한 원로원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처형됐다. 그의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뒤이어 토지개혁을 추진했으나 마찬가지로 처형됐다.

** 대차지농(大借地農): 농촌의 부르주아지로 불리며 농업의 자본주의적 전환을 주도했다. 이들로 인해 프롤레타리아화한 농민들은 날품팔이, 농촌공업을 전전해야 했다.

*** 1794년 7월(혁명력 ‘열월熱月’) 반(反)로베스피에르 파가 일으킨 쿠데타의 결과 로베스피에르를 비롯한 공안위원회 인사들이 숙청당했다. 국민공회 내 분란을 틈타 보수주의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는 단초를 제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