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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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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경제 뜯어보기① 계획경제는 애초부터 틀렸다?

사회주의 중앙계획경제의 실제와 교훈


김정주┃충남대(경제학)



* 편집자: <오늘도 맑습니다> 꼭지에서는 이번 글을 시작으로 2~3회에 걸쳐 사회주의 경제체제에 관해 집중적으로 조망할 예정이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서 나타났던 ‘중앙계획경제’와 ‘시장 사회주의’ 시스템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미래의 사회주의적 대안으로서 ‘참여 계획경제’처럼 민주적 계획경제가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해서도 고민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이번 호에서는 그 시작으로 소련의 중앙계획경제를 다룬다. 소련에서 이런 경제 체제가 왜 자리 잡았고 어떻게 운영됐는지, 그 문제점은 무엇이었는지를 함께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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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7년 러시아 혁명 당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사진: Wikipedia]



사회주의라는 전인미답의 길과 중앙계획경제


1917년 러시아혁명은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사회주의라는 이상을 국가 단위의 거대한 사회적 공간에서 실현하려는 일대 사건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국가 혹은 사회주의 사회라는 것이 인류역사에서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기에, 그런 사회를 어떻게 구성하고 운영할 수 있는지에 대해선 누구도 분명히 알 수 없었다. 자기 삶의 대부분을 자본주의 비판에 쏟아부으며 방대한 지적 자산을 남긴 마르크스조차 사회주의에 대해선 극히 제한된 설명만을 남겼으며, 그것도 매우 추상적인 수준에서 ‘사회주의적 원칙’에 대해서만 언급했을 뿐이다.


굳이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더라도,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원칙에 근거한 새로운 사회가 어느 한 사람의 천재적인 구상을 통해 가장 이상적인 모습의 ‘완성된’ 형태로 주어질 수는 없다. 사회는 누군가의 발명품이 아니며, 인간 역시 그렇게 고안된 사회라는 발명품에 맞춰 조립되는 단순한 부속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등장한 지 300여 년 된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조차 수많은 시행착오와 불행한 사건들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완전하고, 여전히 많은 불행을 만들어내고 있다.


사적 소유의 폐지를 통한 계급 지배의 종식, 그리고 이윤이 아닌 사회적 필요를 위한 생산이라는 사회주의적 원칙에 따라 1917년 혁명 이후 러시아에선 모든 토지를 즉시 몰수해 농민들에게 분배했고, 모든 공장은 자본가의 경영이 아닌 노동자 자주관리를 통한 운영으로 전환했다. 그러나 혁명 이후 오랜 내전과 제국주의 국가들과의 전쟁이 벌어지며, 새로운 사회의 이상을 이야기하고 있기엔 너무도 절박한 절체절명의 상황이 펼쳐졌다. 사회주의로 나가고자 하는 첫 조치들은 원대한 이상의 구현보다는 지금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임시방편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그 효과 또한 불확실했다.


이처럼 혁명 직후의 혼란스럽고 불확실했던 상황은 ‘전시戰時 공산제’와 ‘신경제정책(NEP: New Economic Policy)’이라는 다소 일관성이 없는 정책들을 거치며 10여 년간 지속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사회주의적 축적’을 둘러싼 부하린과 프레오브라젠스키 사이의 논쟁 등 사회주의로 들어서기 위한 구체적 고민과 제안들이 있었다. 이들의 고민은 결국 여전히 자본주의적 공업화가 전면화하지 않은 농업 중심 사회였던 당시 러시아의 상황에서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방식’으로 사회주의로 이행할 것인지, 아니면 ‘좀 더 신속하고 전면적인 방식’으로 자본주의적 이행과 사회주의적 이행을 동시에 성취할 것인지로 수렴했다. 이런 고민은 스탈린 집권 이후 ‘일국一國 사회주의’ 노선(세계혁명 없이도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완성할 수 있다는 노선)을 통해 후자의 방식으로 귀결했다.


스탈린의 조치들은 무자비할 정도로 신속하고 단호했다. 소비에트를 비롯한 모든 자치조직과 국가기구를 당에 종속시킴으로써,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사실상 당의 독재가 됐다. 모든 공장을 국유화하고 농업에서 집단농장화를 단행함으로써 ‘사회주의적 소유란 곧 국가 소유’라는, 무모하리만큼 단순한 원칙을 모든 인민에게 각인시켰다.* 5개년 경제계획의 실행으로 중화학 산업 중심의 전면적 공업화가 사회주의 건설의 가장 중요한 조건임을 천명하면서, 당과 국가가 설정한 목표를 신속히 달성하기 위해 전 산업의 모든 경제조직을 중앙의 계획과 지시에 따라 운영하는 생산단위로 재편했다.


결국 스탈린 집권 이후 확립된 중앙계획경제는 △노동자 대중의 자주적인 소비에트 정치가 당과 국가의 정치로 협소해지고 △사회주의적 소유가 국가 소유라는 훨씬 협소한 형태로 귀결하면서, 소유의 유일한 주체가 된 국가가 모든 경제 과정을 통제하고 책임질 수밖에 없는 사태가 낳은 불가피한 결과물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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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8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행진하는 제국주의 연합군. 미국,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국가들은 1917년 사회주의 혁명 직후 신생 사회주의 러시아를 침공했다. [사진: Wikipedia]



중앙계획경제, 누가 어떻게 운영했나


러시아에서 확립된 중앙계획경제 하에서 생산단위인 기업의 모든 설비와 시설의 소유권은 국가에 있었다. 기업은 물적 자산이든 금융 자산이든 양도를 목적으로 한 어떤 자산도 소유할 수 없었다. 기업의 운영은 국가가 파견한 경영자가 맡았으며, 기업의 생산량은 계획과 목표에 따라 국가가 할당했다. 기업은 목표 생산량 달성에 필요한 자금을 국가에 청구할 수 있었지만, 자금의 소요에 대해선 국가의 엄격한 통제와 관리를 받았다. 생산한 재화의 가격과 노동자의 임금 또한 국가가 결정한 수준에서 고정됐으며, 재화의 판매로 얻은 기업 이윤의 대부분을 국가가 환수했다. 결국 중앙계획경제 하에서의 기업은 국가가 수립한 실물생산계획을 집행하는 실행단위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다.


전체 국민경제를 대상으로 한 실물생산계획의 수립은 국가계획위원회(GOSPLAN: 고스플란)가 담당했다. 국가계획위원회는 개별 산업 분야에서 시작해 개별 상품에 이르기까지 현재의 생산능력 및 과거의 생산실적 등을 고려해 세분화된 생산함수를 만들고, 여기에 해당 계획기간 동안 생산요소의 동원 가능성에 대한 예측치와 주요 경제발전 목표치를 대입해 산업별, 상품별 실물생산 목표치를 도출했다. 국가계획위원회가 수립한 산업별, 상품별 생산목표는 연방 및 지방정부의 관할 경제부처에 배분되고, 이것은 다시 품목별로 세분화해 각 부처의 관할 부서로 나누어져 개별 생산기업에 최종적인 생산목표치로 하달됐다.


한편 실물생산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선 기업들 사이의 원료 및 생산재 조달계획이 무엇보다 중요했는데, 국가조달위원회(GOSSNAB: 고스납)는 전국의 주요 기업을 연결하는 투입-산출표를 작성해 이를 바탕으로 개별 기업의 생산재 및 원료 조달경로를 계획하고 지시했다. 따라서 중앙계획경제 하에서 국가계획위원회의 생산계획과 국가조달위원회의 조달계획을 통해 모든 생산물의 수급을 조절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두 조직의 계획을 통해 실물단위의 수급을 조절한 품목 수는 5만여 개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앙계획기구를 통한 경제 운용은 스탈린 시대 이후 1960년대까지 매우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다. 1929년 대공황으로 서구 자본주의 경제는 파국에 직면했지만, 사회주의 러시아의 경제는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빠르게 변모하며 매년 놀라운 성장률을 기록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러시아는 그 어떤 나라보다도 치열하게 반파시즘 전쟁을 수행했고, 그 결과 다른 나라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를 보았다. 하지만 종전 후 그 어떤 나라보다도 빠르게 회복했으며, 주택‧교육‧보건 등에 걸쳐 전인민적 복지를 강화하면서 강대국의 지위에 올랐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많은 사람들이 습관처럼 지적하듯 중앙계획경제가 늘 비효율적이고 문제투성이였던 것은 아니었다. 반대로 그것은 성공적이었으며 시장 중심 자본주의 경제에 비해 훨씬 효율적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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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굴뚝의 연기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숨이다"라는 문구의 공업화 선전 포스터. 1920년대 추정. [사진: Wikipedia]



중앙계획경제의 한계: 왜곡된 ‘사회주의 정치’


하지만 중앙계획경제 내에서 무시할 수 없는 많은 문제가 발생한 것 또한 사실이다. 무엇보다 중앙계획경제 하에서 기업은 어떤 권한도 갖지 못한 채 할당된 목표 생산량을 달성해야 하는 실행단위에 불과했기 때문에, 생산에 대한 이들의 자발적 책임성을 끌어내기가 무척 어려웠다. 대부분의 기업은 가급적 적은 목표 생산량을 할당받으면서 더 많은 설비를 보유하길 원했다. 따라서 그들이 보유한 생산능력이나 설비에 대한 거짓 보고가 만연했다. 국가가 부과한 목표 생산량은 주어진 기간(1년) 안에만 만들면 되었기에, 가령 1년 가운데 4~5개월은 거의 작업을 안 하는 태업상태에 있다가 불과 6개월 만에 1년 치 생산물을 한꺼번에 만드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이런 상황에선 아무리 중앙계획기구가 상품의 수급계획을 맞춘다고 하더라도, 시장에서의 수급 상황은 늘 불안정하고 불규칙할 수밖에 없었다.


중앙계획경제 하에서 나타난 이른바 ‘연성 예산 제약soft budget constraint’ 또한 경제의 비효율성을 증대시킨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자본주의 기업이라면 주어진 비용(예산 제약) 하에서 최대한의 효율성을 발휘해 이윤을 내야 하는 강한 압력이 존재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기업은 손실을 보고 결국 파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앙계획경제 하의 기업은 이런 압력에서 상당히 자유로웠다. 기업은 국가가 부과한 생산량을 달성하기 위한 실행단위에 불과했기 때문에, 설령 가용 예산 안에서 이윤을 내지 못해 손실을 보더라도 국가가 해당 생산 자체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기업을 파산시킬 순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생산조직인 기업이 가용 예산에 대한 엄격한 제약을 느끼지 못한다면 당연히 비용을 절약할 유인도 없어지고, 그 결과 생산의 비효율성과 낭비가 만연할 수밖에 없었다.


사회주의 러시아의 경우 계획경제의 목표를 주로 중화학 산업의 집중적 육성을 통한 공업화에 맞추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 자원을 소비재 산업보다는 중화학 산업에 우선적으로 투입했다. 따라서 경제 규모가 커지는데도 소비재 부족 문제가 일상적으로 발생했다. 또한 중화학 산업 분야와는 달리 소비재는 종류와 가지 수가 워낙 많았기 때문에, 모든 소비재에 대해 중앙계획기구가 수급상의 균형을 일일이 맞추는 게 불가능해 보이기도 했다.


게다가 경제 규모가 커질수록 중앙계획기구 자체가 비대해지고 관료화됐으며, 그 결과 계획을 수립하기 위한 ‘계획 비용’ 자체가 어마어마하게 증가했다. 결국 1970년대 들어 커지는 경제적 비효율성이 드러나면서 사회주의 러시아의 경제는 점차 활력을 잃고 침체 국면에 들어서게 된다.



계획경제는 불가능한 것인가?


보수적 자유주의 경제학자였던 하이에크는 계획의 ‘계산 불가능성’을 들어 사회주의 실험은 실패할 것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계획상 어느 산업에 더 높은 비중을 부여할지가 늘 문제이긴 했어도, 5만여 개가 넘는 재화에 대한 생산계획과 조달계획을 통해 70여 년간 경제를 운영했던 사회주의 러시아의 경험은 사회적 수요 및 필요의 계산과 그에 따른 생산계획의 수립이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더욱이 최근 각광받는 빅테이터 분석처럼 IT기술과 인터넷망의 발달로 개인의 신용카드 사용기록에 담긴 모든 소비정보와 패턴을 분석하고 계산하는 게 가능한 사회적 조건 속에선, 사회적 수요 및 필요를 계산하고 그에 따라 생산계획을 수립하는 일이 100년 전 러시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수월할 것이다.


기업 단위에서 나타난 무책임성과 거짓 보고, 인센티브의 결여로 인한 태업, 연성 예산 제약으로 인한 낭비와 비효율성 등 분명 중앙계획경제 또한 숱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하지만 시장 중심의 자본주의 경제에서 나타나는 주기적이고 파괴적인 공황, 만성적 실업, 만연한 빈곤과 불평등, 투기적 행위가 불러오는 통제 불가능한 불균형과 경제적 거품, 그리고 미국의 경제학자 갈브레이스가 정확히 지적했듯이 오직 이윤을 얻기 위해 새로운 소비 욕망을 만들어낼 목적으로 끊임없이 기존 상품들을 폐기하고 새로운 상품들을 만들어내는 자본주의의 엄청난 자원 낭비와 생태적 비효율성과 비교했을 때, 중앙계획경제에서 드러난 문제들이 과연 더 심각하고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이었다 할 수 있을까?


결국 중앙계획경제가 안고 있던 문제는 계산에 기초한 계획 그 자체의 난점이라기보다, 계획의 정당성과 사회적 계획에 참여할 동기의 부족에 있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러시아혁명 이후 확립된 중앙계획경제는 결국 소비에트 정치가 당과 국가의 정치로 협소해지고 사회주의적 소유가 국가 소유로 귀결하면서, 모든 인민의 의지를 오직 ‘국가만이 대신할 수 있다’는 ‘사회주의 정치’에 대한 왜곡이 낳은 결과물이었다. 따라서 인민의 의지를 자처했던 국가의 계획은 반대로 국가에 귀속되어버린 인민들이 소외당하는 문제를 낳았다. 국가가 인민의 의지를 독점하면서, 혁명을 위해 그토록 뜨겁게 소비에트로 결집했던 노동자 대중은 중앙계획경제 하에서 그토록 무관심하고 무책임한 존재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계획경제의 문제들을 개혁하기 위해 1960년대 소련 경제학자 리베르만의 제안에 기초해 단행된 ‘코시킨(당시 소련 수상) 개혁’이나 1980년대 후반 소련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가 제안한 페레스트로이카(러시아어로 ‘개혁’을 의미) 등 국가기구 내 관료집단이 주도했던 개혁과정은 번지수를 잘못 짚은, 따라서 실패가 예견된 것이었다. 그들 모두는 중앙계획경제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면서 ‘이윤’이라는, 사회주의적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잘못된 자본주의적 인센티브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중앙계획경제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왜곡된 사회주의 정치로부터 파생했기에, 진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스탈린 시대 이후 국가에 의해 밀려나 형식화되어버린 소비에트를 실질적으로 강화했어야만 했다.



사회주의와 새로운 인간의 발견


이윤이라는 자본주의적 인센티브와 보상체계로는 결코 사회주의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것은 결국 사회주의라는, 미래를 향해 끊임없이 형성해 가야 할 새로운 형태의 사회에서 다시금 과거의 자본주의적 인간을 불러내는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다.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와는 다른 사회적 원칙으로 구성되는 사회라면, 그 사회에서 주어지는 인센티브의 내용과 보상체계는 당연히 자본주의와는 다를 수밖에 없고, 또한 달라야 한다.


레닌이 소비에트에 관해 끊임없이 고민했던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문제, 곧 사회주의적 인민의 형성을 통해 소비에트를 실질적인 사회주의 정치의 구현체로 완성해가는 문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또한 짧은 기간에 완성될 수도 없다. 불가피하게 존재하는 이러한 시차 때문에, ‘형성되어가는’ 사회로서 사회주의는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에 봉착할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인간의 형성 역시 결코 순탄치 않았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과 계몽주의 철학을 통해, 그리고 수많은 농민반란과 내전을 통해 끊임없이 피를 흘리며, 결국 자본주의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이윤체계에 적응한 새로운 인간형을 만들어냈다.


사회주의 또한 과거의 자본주의적 관습과 제도로부터 자유로운 새로운 인간형을 발견해내야 한다. 오랜 시간 온갖 피와 오물을 뒤집어쓰고서야 지금의 자본주의가 등장할 수 있었듯, 사회주의 역시 오직 빛나는 영광만 함께할 수는 없는 그 오랜 시간의 싸움과 상처를 결코 회피해선 안 된다. 사회주의의 길에 놓인 어쩌면 고통스러울 수도 있는 미래의 시간을 결코 ‘이윤’이라는 자본주의적 보상체계가 단축시켜주거나 대신해줄 수는 없다.



* 스탈린 시대에 생겨난 집단농장(kolkhoz: 콜호즈)은 농민들의 협동조합 형태로 구성됐기 때문에 국가가 운영하는 국영농장과는 다른 것이었다. 따라서 농업의 집단농장화는 엄격히 말해 개별 농민이 소유하던 토지를 협동조합을 통해 집단소유로 전환한 것이지, 국유화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집단농장의 모든 생산활동과 운영방식 또한 국가의 엄격한 통제 하에 있었다는 점에서, 토지 사용에 관한 모든 권한은 실질적으로 국가에 귀속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