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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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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20.02.14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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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조레스 

1859~1914


노동계급과 국가를 

모두 품고자 했던 정치가


이한서┃서울



유럽의 유력 정당들은 저마다 정당 역사의 뿌리나 기둥이 되는 인물의 명칭을 차용한 재단과 관련을 맺고 있다. 독일혁명을 무참히 짓밟고 바이마르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의 이름을 딴 재단은 독일 사회민주당의 유관 재단이다. 로자 룩셈부르크 재단은 독일 좌파당과 연계해 있다. 옆 나라 프랑스 사회당의 유관 재단은 장 조레스 재단이다. 조레스가 창간에 참여한 신문의 제호 「위마니테L’Humanitè」는 훗날 프랑스 공산당의 기관지 제호로 사용됐다. 이처럼 조레스는 20세기 초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정치가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 인물 중 하나다.


30여 년에 걸친 정치 인생은 유명세만큼이나 특색이 있었다. 그는 20대 중반 공화파 의원으로 정치무대에 등장했다. 30대 중반, 그는 카르모 광부 파업 등 일련의 노동쟁의를 계기로 노동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기 시작해 사회주의 진영으로 전향했다. 그는 ‘인간 중심의 사회주의’라는 방향성을 내걸고 정치활동을 전개했으며, 사회주의 정당 통합 운동의 중추로 활약했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을 앞둔 1914년, 반전운동을 벌이던 중 암살당했다.


조레스가 당대 프랑스 사회주의 운동 최고의 지도자였다고 하기는 어렵다. 프랑스 사회주의 운동은 혁명적 노동조합주의, 혁명적 사회주의, 개량주의, 아나키즘 등 수많은 정파로 나뉘어 있었다. 그럼에도 조레스가 오래 회자되는 정치인이 된 이유는, 그가 당대의 모순을 하나둘 파헤쳐가며 때로는 자신의 신념을 바꾸고 때로는 단호한 결단을 내렸기 때문일 것이다.



공화주의자이자 사회주의자로


노동계급이 체제 변혁의 중추임을 믿었던 그는 대중운동에 직접 참여하며 밀접한 관계 맺기를 끊임없이 시도했다. 카르모 광부 파업부터 유리병 공장 파업과 철도 파업에 이르기까지, 조레스의 친화력은 동료들을 뛰어넘었다.


조레스의 존재감이 더욱 부각된 이유는 그가 사회주의를 노동자주의나 집산주의*에 가두지 않고, 폭넓은 의제에 대응할 수 있는 정치사상임을 입증한 데 있다. 특히 드레퓌스 사건**에서 보여준 태도는 그의 존재감을 단적으로 드러냈다.


당시 몇몇 중진 사회주의자들은 드레퓌스 사건을 노동자-자본가 사이의 대립과는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외면했다. 이런 태도에는 드레퓌스가 노동자가 아니라는 사실도 한몫했다.


그러나 조레스는 사회주의가 프랑스 사회의 보편적 정의를 외면해선 안 되며, 우익 민족주의 세력에 적극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드레퓌스 사건만이 아니라 그는 ‘인간 중심의 사회주의’를 역설하면서 사회주의가 보편적 정의를 포괄할 수 있는 사상임을 입증하고 이로써 지지를 확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드레퓌스 사건부터 반전운동에 이르기까지 노동계급을 목전의 경제적 사안에 천착하는 존재가 아닌 지적 존재, 정치적 존재로 상대하려는 태도를 견지했다. 조레스는 자신이 편집장을 맡아 동료들과 「위마니테」를 창간하는 등 “적대적인 세력이 혁명적인 세력을 통제하는 것”을 막기 위한 노동계급의 교육과 선전 활동에 주력했다.



노동계급과 공화국을 향한 이중의 사랑


그러나 노동계급만이 아니라 공화국의 혁명성을 함께 신뢰한 점은 그의 사상에 내재한 긴장 요소였다. 그는 부르주아 계급을 청산 대상으로 보았으며, 노동계급의 혁명적 역할을 인정했다. 총파업이라는 전술에 부정적이었던 기존의 태도를 1905년 러시아 혁명을 계기로 바꾸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총파업보다는 보통선거’라는 신념을 유지했다. 보통선거에 기대감을 가진 이유는 프랑스 공화국이 혁명적 성격을 띤 국가라는 판단에 있었다. 프랑스 혁명의 성과를 부르주아지가 차지했을지언정 그 주축은 민중이었다. 그는 공화정이 마침내 왕당파와 귀족의 잔재를 일소하고 민중적 성격의 공화정으로 뿌리내렸다고 보았다.


긴장이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은 1899년 급진공화파 정부에 사회주의자 밀랑이 입각할 것인지 여부를 둘러싼 논쟁 때였다. 드레퓌스 사건 이후 극우 민족주의 세력이 발흥하며 공화정부에 우익세력이 참가할 수 있다는 이유로 조레스는 밀랑의 입각을 찬성했다. 조레스는 프롤레타리아가 자본주의 중심세력에 침투해 혁명적 힘으로 주도권을 잡으리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물론 그 중간평가는 그의 사후 세계를 휩쓴 제국주의 전쟁으로 나타났고,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자는 구호가 그의 환상을 대체했지만 말이다.


조레스는 1848년 혁명이나 1871년 파리코뮌 같은 격동기가 아니라, 1870년대 후반 공화파가 의회를 장악한 시대에 고등교육을 받고 성장했다. 독일 등 다른 유럽 국가에서도 노동계급의 급격한 성장과 의회 진출로 자신감이 솟구쳐 올라 보통선거와 의회를 통해 사회주의 이행이 곧 이뤄지리라는 희망이 팽배했다. 동시대의 게드, 바이양, 라파르그 같은 사회주의자들은 파리코뮌 시절의 망령에 발목 잡힌 구태의연한 세력처럼 묘사됐다.


‘인간 중심의 사회주의’는 코뮌과 세계대전 사이에 유럽 사회주의 운동이 팽창하던 시절 그 규모에 걸맞게 풍부해진 운동의 결실이다. 도식과 관념을 넘어 대중과 밀착하는 보편적 언어를 어떻게 구사할 것인가? 유력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사회주의 세력이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사회적 사안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지만 세련되고 새로운 통찰이 꼭 완전한 통찰은 아니다. 노동계급과 공화국을 동시에 품고자 했던 이중의 사랑은 결국 사회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전후 호황기를 다시금 풍미했고, 조레스는 그 원류로 추앙받았다.



* 집산주의: 공상적 사회주의 시절부터 이어진 경향으로, 권력 일반에 대한 비판과 생산수단의 집산화에 집중하는 사조였다. 계급투쟁이나 운동으로서 공산주의와는 거리가 있다.


** 드레퓌스 사건: 프랑스군 장교 드레퓌스가 유대인이라는 출신성분으로 인해 간첩으로 몰렸던 사건과 이를 둘러싼 사회적 논쟁을 함께 일컫는다. 프랑스의 기독교 세력과 보수파가 부추긴 반유대주의가 촉발한 부당한 재판이었는데, 사건 초창기 사회주의 세력 내에서 이 사건에 대한 대응 여부를 둘러싼 논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