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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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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20.03.03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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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설 1897~1930

6.10 만세운동 기획자


나영선┃노동자역사 한내



사건은 엉뚱한 곳에서 시작됐다. 1926년 6월 5일 종로경찰서 사법계 형사들은 중국화폐 위조범 이동규를 그가 살던 경성 도렴동 집에서 검거했다. 이동규의 집에서 찾아낸 것은 위조지폐뿐만이 아니었다. 안방 재떨이에서 대한독립당 명의의 불온유인물도 발견했다. 일경은 6월 6일 천도교당을 급습해 교당 내 모든 천도교 간부와 개벽사(천도교 기관지 <개벽>을 발간하던 언론사) 직원을 연행하고, 비밀리에 인쇄‧보관 중이던 5만여 매의 유인물도 압수했다. 이것이 2차 조선공산당 검거의 도화선이 됐다.


권오설은 1925년 4월 17일에 조직된 조선공산당의 당원이었으며, 조선공산당 산하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공청)의 조직부를 책임지는 중앙집행위원이었다. 1925년 11월 신의주 사건으로 공청과 조선공산당 핵심 간부들이 체포됐을 때, 7인의 공청 중앙집행위원 중 검거를 피한 2명이 김동명과 권오설이다. 이제 남은 것은 조직을 복구하고 비상상황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박헌영 등 체포된 중앙이 63개 세포단체에 정회원 284명, 후보회원 229명에 달하는 공청 조직을 40여 명으로 축소해 진술함으로써* 권오설은 조직 안정과 확대 사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조선공산당은 이 사건으로 피해를 봤지만, 운동사회의 주목과 선전 효과도 얻게 됐다. 위기는 기회였던 셈이고, 권오설에게는 기회를 살릴 줄 아는 능력과 대담한 열정이 있었다. 위축된 분위기를 일신하고 코민테른과의 연락선을 복구했으며, 자신감을 높이기 위해 합법조직 중심의 행사를 진행했다. 이후 6.10 만세운동의 주력이 되는 학생운동 진영에 대한 정비와 조직에도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다. 학생부를 통해 합법단체인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지도했다. 이 단체 출신 정달헌, 조두원, 윤기현, 박용규, 한일청, 이현상, 강병도 등은 6.10 만세운동에 뛰어들었고, 해방 이후까지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다.



고려공산청년회 2대 책임비서


당이 정비되자 책임비서 강달영은 만주총국 설치와 더불어 조선공산당이 헤게모니를 쥐고 민족주의 세력과 좌우합작을 통한 반일反日 통일전선체를 결성한다는 국민당 구상을 내놓았다. 어려움을 겪던 이 구상의 실행 기회는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의 죽음으로 우연히 주어졌다. 망국 군주에 대한 애잔함과 더불어 반일감정이 고양되고 있던 대중적 정서를 바탕으로, 조선공산당과 공청은 대규모 투쟁을 계획했다. 하지만 신중한 판단이 필요했다. 대규모 검거로 이어져 조직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기에, 당과 분리된 별도의 기구가 필요했다. 5월 2일 중앙집행위원회에서 ‘6.10운동 투쟁지도특별위원회’를 구성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특위 책임자는 중앙집행위원이자 공청 책임비서인 권오설이 맡았다.


권오설은 투쟁을 성사시키기 위해 즉시 정력적인 활동에 돌입했다. 통일전선 실현의 파트너는 전국적인 조직망과 비타협적 민족주의의 기풍이 있고 당원이 프락션 사업을 하고 있던 천도교 구파로 했다. 자금‧유인물‧국내연락은 상해임시부 김단야가, 격문 인쇄는 서울 인쇄직공 청년동맹의 핵심 박래원이 맡았다. 배포는 조선일보 지사, 개벽 지사, 천도교 교구, 기타 전국의 청년단체가 여러 잡지 속에 소량씩 넣어 보내도록 계획했다. 당일 서울 가두에서 만세 고창과 격문살포는 학생조직인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중심으로 맡았다.


준비는 계획대로 진행되는 듯했다. 박래원은 6~7명의 인쇄노동자와 함께 5월 31일까지 손으로 5만여 장의 격문을 무사히 인쇄했다. 학생조직에서도 통동계로 불린 미조직 학생그룹까지 가담해 당일 역할조정을 마쳤다. 하지만 운은 여기까지였다. 6월 6일 천도교당에서부터 검거가 시작됐다. 요시노 도조吉野藤藏가 해 질 무렵부터 날이 새도록 고문과 취조를 계속하자, 죽음을 각오한 박래원마저 1급 수배자인 권오설의 행방을 자백하고 만다. 7일 오전 10시, 형사대가 출동했다. 순종 장례 예행연습으로 혼잡한 서울 시내를 통과해 장사정의 목욕탕 건물 옆 잡화상이 목표였다. 형사대가 막 도착한 순간 상복에 백립을 쓴 남자가 나오고 있었다. 형사가 크게 소리치니 그 사내가 돌아보았다. 권오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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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오설의 체포를 알리는 신문기사.



전술‧조직 사수 후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


바로 가혹한 심문이 시작됐다. 공청 중앙집행위원을 체포한 요시노 도조는 집요했다. 잔혹한 고문으로, 숙련된 혁명가였던 권오설도 이틀이 지난 6월 9일 “눈물과 장탄식을 흘리며”** 강달영 책임비서의 거처를 진술하고 만다. 하지만 6월 10일 당일 시위를 이끌 학생조직에 관해서는 끝내 발설하지 않았다.


투쟁지도부의 와해와 검거 선풍에도 공산당 책임일꾼들은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 당원과 공청원들은 다시 격문을 인쇄하고 태극기를 제작, 6.10 만세운동을 헌신적으로 이끌었다. 일제 경찰은 조선공산당에 대한 전면적인 검거에 들어갔다. 4개월간 조선공산당 피의자와 6.10 만세운동 관련 혐의로 체포된 사람은 2천 명이 넘었다. 체포된 사회주의자들은 목숨을 걸고 심문투쟁을 벌이다 옥중에서 사망하거나 병을 얻었다. 1930년 4월 17일 권오설마저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했다.


1926년 7월 17일 책임비서 강달영 체포, 7월 22일 당원명부와 보고서 등 핵심문서 발견으로 71명이 체포됨으로써 조선공산당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조선공산당 운동은 폐허를 딛고 다시 시작했다. 2차 조선공산당의 살아남은 중앙집행위원 김철수는 동지들의 피를 딛고 3차 당 중앙을 조직하고 있었다.



* 박헌영, 1925.12.12, 『한국공산주의운동사 - 자료편』 1, 「박헌영 외 10인 조서」(『이정 박헌영 전집』 1권 2부 “일제 사법기관에서의 진술”, 역사비평사, 2004).


** 요시노 도조(吉野藤藏),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과 그 검거의 전모”, 『조선 사상범 검거 실화집』, 돌베개,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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