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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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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경제 뜯어보기② 사회주의에서도 시장경제는 가능한가?

시장사회주의와 노동자평의회


김정주┃충남대(경제학)



* 편집자: <오늘도 맑습니다> 꼭지에서는 지난 100호부터 3회에 걸쳐 사회주의 경제체제에 관해 집중적으로 조망한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서 나타났던 ‘중앙계획경제’와 ‘시장사회주의’ 시스템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미래의 사회주의적 대안으로서 ‘참여 계획경제’처럼 민주적 계획경제가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해서도 고민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소련 중앙계획경제를 다룬 100호에 이어, 이번 호에서는 유고슬라비아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났던 시장사회주의를 다룬다.



1917년 러시아혁명을 통해 등장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은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였고, 따라서 혁명 이후 소련이 확립했던 ‘국가 소유에 기초한 중앙계획경제 체제’는 이후 등장한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하나의 표준적인 사회주의 모델로 받아들여졌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사회주의 진영으로 들어오게 된 여러 동유럽 국가들은 물론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과 중화인민공화국(중국), 그리고 오랜 내전을 끝내고 다소 뒤늦은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사회주의 진영에 합류한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베트남) 또한 건국 초기에는 공통적으로 소련식 중앙계획경제 체제를 자신들의 경제체제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들 사회주의 국가 가운데 유독 소련식 중앙계획경제를 거부하고 일찍부터 자신만의 독자적인 사회주의의 길을 추구했던 국가가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유고슬라비아)”이었다.



유고슬라비아: 시장사회주의로 가는 길


유고슬라비아는 다른 동구권 국가들과는 달리 2차 세계대전 기간 강력한 반나찌 투쟁을 전개하면서 소련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사회주의 정부를 수립하고 독립을 쟁취한 국가였다. 이러한 이유로 유고슬라비아는 건국 초기부터 소련으로부터의 정치적 독립성과 자율성을 지켜왔다. 특히 강력한 정치적 지도력을 발휘했던 티토Josip Broz Tito를 중심으로 한 유고슬라비아의 정치지도자들은 당시 소련의 지배자였던 스탈린과 그에 의해 확립된 소련식 중앙계획경제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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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 티토. [사진: Marxists Internet Archive]



물론 유고슬라비아 또한 건국 초기에는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처럼 국가 소유와 더불어 농업 부문에서의 집단농장화에 기초한 소련식 중앙계획경제 체제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사회주의 국가들 간의 평등성을 인정치 않으려는 소련의 정치적 개입주의가 노골화하면서, 두 나라의 지도자였던 스탈린과 티토 사이에 정치적 갈등이 깊어졌다. 마침내 유고슬라비아는 소련식 사회주의 체제와 결별하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노선을 모색하게 된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소련의 중앙계획경제 체제와 대비되는 유고슬라비아의 시장사회주의 노선은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을 상대로 정치적 개입주의에 반대하면서 상대적 약소국인 자신의 정치적 독립성과 독자성을 지키고자 했던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자들의 단호한 투쟁의 결과물로서 등장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련과의 정치적 갈등이 유고슬라비아에서 시장사회주의 노선이 등장하게 된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다. 1945년 사회주의 정부 수립 이후 짧은 기간 동안 소련식 중앙계획경제를 실험해본 결과,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자들은 이러한 체제가 과도한 관료주의의 문제를 낳을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자본가를 대신해 국가가 노동자를 동원하고 착취하는 체제로 귀결할 수밖에 없음을 일찍 간파했다. 따라서 이들은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더불어 사회화된 생산수단을 국가 내 관료기구의 수중으로부터 해방시켜 노동자에게 돌려주지 않는 한 진정한 사회주의를 성취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 결과, 1950년 관계 법령의 제정을 통해 유고슬라비아식 시장사회주의 노선의 핵심인 ‘노동자 자주관리 기업’ 제도가 도입된다. 1951년에는 국가 차원의 계획기구였던 연방계획위원회가 폐지됨으로써, 시장 가격기구가 소련식 중앙계획경제를 대신해 사회적 자원 배분의 핵심 기제로 도입되기에 이른다. 한편, 콜호즈kolkhoz 같은 농업의 집단농장화는 유고슬라비아 농민들의 불만과 저항을 낳음으로써 농업생산의 저하를 가져왔는데, 이 같은 농업부문의 정체 또한 1950년대 유고슬라비아의 사회주의 정부가 농지에 대한 사적 소유를 일정 부분 인정하면서 스스로 경제개혁에 나서게 된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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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년 선포된 유고슬라비아 연방인민공화국(1963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으로 개칭) 제헌 헌법 1면. 서명 중 왼쪽 맨 위가 티토. [사진: wikipedia]



‘노동자 자주관리 기업’, 어떻게 운영했을까


유고슬라비아에서 도입한 노동자 자주관리 기업은 생산수단을 사회적 소유로 하되, 기업에 속한 노동자들이 사회적 자산을 위탁받아 스스로 경영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이를 위해 피고용자 수가 5인 이상인 모든 기업에서 기업 내 최고 의사결정기구로서 “노동자평의회”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이 노동자평의회를 통해 경영위원회 위원의 선출과 해임, 노동자의 해고, 기업이윤의 분배, 기타 기업경영과 관련된 모든 기본 정책 등이 결정되었다. 노동자평의회는 기업 내 노동자들이 비밀투표로 선출한 15~20명의 대표로 구성했는데, 임기는 2년으로 최소한 6주에 한 번씩 회의가 소집되었다. 노동자평의회 회의에는 경영위원회 위원과 기업장이 참석하고, 노동자평의회 의원의 다수결에 따라 모든 의사결정이 이루어졌다.


한편 노동자평의회에서의 비밀투표로 선출된 경영위원회는 기업 내에서 노동자평의회의 결정사항을 실행하는 일종의 집행기구였다. 이 위원회는 기업장을 포함해 임기가 2년인 3~10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었다. 기업 외부에서 추천된 외부인이 경영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될 수도 있었지만, 경영위원회의 관료화를 방지하고 기업 내 노동자들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경영에 반영하기 위해 경영위원회 위원의 3/4 이상은 반드시 기업 내 생산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노동자들로 충원해야 했다.


기업을 대표하면서 노동자평의회의 결정에 따라 기업경영을 책임지는 기업장은 기업 외부에서 추천된 여러 명의 후보 가운데 노동자평의회 대표와 지방정부에서 추천한 대표들로 구성된 합동회의에서 선출했다. 노동자평의회와 기업장은 서로 각자의 영역에 간섭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지만, 만일 둘 사이에 의견 불일치나 충돌이 발생할 경우에는 지방정부의 동의를 얻어 노동자평의회가 기업장을 해고할 수 있었다.


소련의 중앙계획경제에서와는 달리, 유고슬라비아의 노동자 자주관리 기업 제도 하에선 기업 이윤이 국가에 귀속되지 않았다. 기업은 단지 자신이 얻은 이윤의 일부를 국가에 세금으로 납부하면 그만이었고, 세금을 납부하고 남은 순수익은 노동자들의 소득으로 분배하든가 혹은 투자를 위해 기업 내부에 유보했다. 기업의 순수익 가운데 어느 정도를 기업 내 노동자들의 소득으로 분배할지 혹은 투자를 위한 유보금으로 보유할지는 전적으로 노동자평의회가 결정했다. 따라서 유고슬라비아의 노동자 자주관리 기업 제도 하에선 국가의 명령이나 지시 없이 개별 기업이 자율적으로 자신의 생산량을 결정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 소득과 기업의 투자활동 또한 국가적 통제 없이 오직 기업 내 노동자평의회의 의결을 통해서만 자율적으로 결정되었다.


결국 유고슬라비아의 노동자 자주관리 기업은 경제적 기능과 역할에 있어선 자본주의적 기업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할 수 있다. 단지 기업경영에 참여할 권리가 주식 소유를 통해 소수 자본가에게만 배타적으로 주어졌던 것이 아니라, 노동자평의회를 통해 기업 내 모든 노동자에게 평등하게 주어졌다는 점이 자본주의적 기업과는 다른 점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유고슬라비아의 노동자 자주관리 기업은 모든 조합원에게 1인 1표의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는 오늘날의 협동조합 조직과 매우 유사한 기업조직이었던 셈이다.



중앙계획경제와는 다른 새로운 실험


지금껏 간략히 살펴본 것처럼, 1950년대 이후 유고슬라비아가 추구했던 시장사회주의는 △국가 소유가 아닌 사회적(혹은 협동조합적) 소유에 기초하면서 △시장기구와 노동자 자주관리 기업을 도입해 △노동자의 자율성과 자발성, 사회적 의사결정의 분산과 민주성, 그리고 사회적 생산조직인 기업의 수익성과 효율성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소련식 중앙계획경제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또 다른 사회주의의 길을 보여주었다.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과 관련해 유고슬라비아의 시장사회주의 노선은 사적 소유 폐지와 자본가계급의 소멸이 곧 소련에서와 같은 ‘모든 인민에 대한 국가의 전면적 지배’를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전인민적 소유에 기초해 노동자평의회 같은 노동자들의 자발성과 자율성을 보장하는 ‘노동자 꼬뮨’ 혹은 ‘노동자 소비에트’를 통해 생산을 조직하고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한편, 유고슬라비아 시장사회주의는 사적 소유가 폐지된 상황에서도 시장을 활용해 개별 생산물에 대한 수요와 공급 간 균형을 달성하고 각 생산부문 사이에 경제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일이 가능하며, 따라서 사회주의 경제를 조직하기 위해 소련식 계획체계나 명령체계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란 점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폴란드 경제학자인 랑게Oscar lange는 이미 1930년대에 ‘국가가 모든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상태라면 소련에서처럼 개별 생산물의 물적 균형을 맞추기 위한 국가기구 차원의 계산이나 계획 없이 단지 중앙계획위원회와 같은 중앙집권적 통제기구가 시장가격을 사후적으로 조정하는 것만으로도 소비자 선호를 반영한 수요-공급 간 균형 달성이 얼마든지 가능하며, 따라서 국가기구 차원의 계산이나 계획이 사회주의 경제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란 점을 그의 “시행착오 모형”을 통해 이론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에서 시도한 시장사회주의는 랑게의 이론에서 한발 더 나아가 사적 소유가 폐지된 시장을 활용하면서 사회적 생산조직인 노동자 자주관리 기업 스스로가 이윤 극대화를 통해 생산의 효율성을 추구하기만 한다면 개별 생산물의 수요-공급 간 균형을 달성하면서 경제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게 가능하며, 따라서 사회주의 경제에선 랑게가 언급했던 중앙계획위원회를 통한 시장가격의 조정조차 불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사회적 소유에 기초해 노동자 자주관리 기업과 시장을 활용한 유고슬라비아식 사회주의 경제모델은 1970년대 들어 바넥Jaroslav Vanek 등의 경제학자에 의해 “참여경제 모형”으로 이론화되었는데, 국가의 직접적 계획과 통제에 의존하지 않고도 사회주의 경제가 어떻게 안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시장사회주의 노선과 바넥의 “참여경제 모형”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대한 관심을 이끌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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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장사회주의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폴란드 경제학자 오스카 랑게. [사진: wikipedia]



‘시장’과 ‘사회주의’의 충돌


하지만 시장사회주의 모델에는 사회주의 경제의 새로운 가능성만큼이나 사회적 이행을 방해하는 심각한 장애물 또한 내재해 있다는 점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


우선 노동자 자주관리 기업 제도 하에서 노동자의 소득은 ‘기업이 얻은 순수익 가운데 얼마만큼을 노동자 자신의 소득으로 분배할 것인가’에 관한 노동자평의회의 결정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노동자평의회를 구성하는 노동자 스스로는 당연히 기업의 순수익 가운데 더 많은 부분을 ‘투자를 위한 사내유보금’이 아닌 ‘지금 당장 자신들의 소득’으로 분배하길 원했고, 따라서 노동자 자주관리 기업 하에선 늘 저축과 투자의 필요성보다는 더 높은 소득과 소비에 대한 욕구가 우선시되었다. 이는 결국 노동자의 소득 수준이 점점 높아짐에도 불구하고, 과도한 소비에 따른 인플레이션과 더불어 사회 전체적으로 투자재원 조달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경제적 모순을 심화시켰다. 물론 이 과정에서 ‘노동자 꼬뮨’인 기업 내 노동자평의회가 점점 더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즉자적 경제주의에 매몰되어 갔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노동자 자주관리 기업 제도 하에서 개별 노동자의 소득은 전적으로 시장을 통한 기업 성과에 따라 결정되었기 때문에, 노동자들 사이의 산업‧기업‧지역 간 소득 격차도 불가피한 현상이었다. 비록 사적 소유 자체를 폐지했다곤 하지만, 개인소유를 인정하는 사회에서 노동자들 사이에 나타나는 심각한 소득 격차와 불평등은 노동자 국가로서의 통합성을 유지하는 데 심각한 걸림돌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기업의 신규채용을 통해 새로운 노동자를 충원할 경우 기존 노동자평의회의 구성과 성격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기에 노동자 자주관리 기업은 고용 확대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이는 노동자평의회의 폐쇄성을 강화하면서, 기업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사회 전체적으론 높은 실업률이 좀처럼 해소되지 않는 문제를 낳았다.



‘호모 에코노미쿠스’, 대체 언제까지?


유고슬라비아의 시장사회주의는 소련식 사회주의와는 다른 새로운 사회주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분명 높이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윤 극대화 논리에 제약당한 채 오직 더 높은 소득을 얻기 위해 노동자평의회가 경제주의에 매몰되어 갈 때 ‘타락한’ 노동자평의회가 사회주의 국가 내부에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시장기구 자체는 그러한 문제를 정당화하면서 악화시키기는 했지만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는 측면에서, 유고슬라비아의 시장사회주의는 사회주의로의 이행과정에서 일종의 과도기적 모델로 고려해볼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완성된 사회주의 모델이 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사회주의로의 이행과정에서 핵심은 ‘노동자 꼬뮨’ 혹은 ‘노동자 소비에트’로서 노동자평의회가 유고슬라비아의 예에서처럼 시장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시장 그 자체를 흡수하는 데 있을 것이다. 물론 노동의 목적이 오직 ‘더 많은 소득’을 얻는 데 있으며, 따라서 노동자들로 구성되는 노동자평의회의 목적이 오직 ‘자신이 속한 기업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에 맞춰져 있는 한 이러한 과제는 달성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적 소유가 폐지된 사회에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노동해야 하는가? 더 많은 생산물, 더 많은 이윤, 더 높은 소득에 종속되지 않는 노동이란 과연 어떤 사회적 조건 속에서 가능한가? 애석하게도, 시장사회주의의 길을 고민했던 랑게나 바넥의 이론과 유고슬라비아의 경험은 이러한 질문에 여전히 답을 주지 못한다.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이들 모두는 사적 소유가 폐지된 사회적 조건 속에서도 여전히 노동자를 ‘자신의 편익을 위해 끊임없이 계산하는 존재’, 즉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적 존재로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노동자평의회는 단지 ‘호모 에코노미쿠스’라 불리는 경제적 인간들의 꼬뮨에 불과할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적 소유의 폐지나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 그리고 수익성이나 효율성 같은 모든 경제적 장치들이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기 위한 필요조건은 될 수 있을지언정 결코 충분조건이 될 수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노동자평의회가 ‘호모 에코노미쿠스적 꼬뮨’으로 남아 있는 이상, 사회주의는 여전히 요원한 이상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 우리가 유고슬라비아의 경험을 통해 ‘사회주의 경제’와 더불어 ‘사회주의 주체’의 문제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 1950년대 들어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10정보 미만의 농지에 대한 사적 소유를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소련에서와는 달리 집단농장을 탈퇴할 수 있는 개별 농민의 권리 또한 인정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