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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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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20.04.15 16:29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1872~1952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여성해방을 꿈꿨던 여성혁명가


선지현┃충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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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wikipedia]



여성해방을 위해 혁명을 선택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1872년 러시아에서 태어나 1894년 마르크스 사상을 공부하면서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녀를 혁명운동으로 이끈 것은 다름 아닌 여성노동자들이었다. 1896년 그녀가 목격한 직물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들의 참상은 훗날 ‘그날의 광경과 악취가 혁명가로서의 삶을 결정지었다’고 회고할 정도였다.


그녀는 여성억압 문제의 해결을 사회주의에서 찾았다. 이에 1898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해 활동을 본격화했다. 1905년 1차 러시아 혁명에서 여성노동자의 대규모 참여를 보면서 여성들의 독립적인 단체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1907년 “여성노동 상호부조협회”를 조직해 활동했다. 1908년에는 자유주의 여성운동에 맞서 사회주의 여성해방운동론을 정립했고, 이어 1910년 17개국 여성사회주의자들이 참여한 “사회주의 여성회의”를 통해 세계여성의 날을 제안하고 조직하면서 여성노동자들의 조직화를 시도했다.


콜론타이는 <여성문제의 사회적 기초(1908)>라는 저작을 통해 ‘여성 종속과 억압의 근본 원인은 생물학적 차이가 아니라 사회경제적 구조에 있으며, 진정한 여성해방은 여성의 경제적 독립과 사회질서(체제)의 전면적 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계급 문제를 초월한 여성의 연대’는 불가능하며, 사회주의를 통해 여성해방을 이뤄낼 수 있다는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을 정립했다.



사회주의와 여성해방은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녀는 여성 최초로 당 중앙위원이 됐고, “제노텔(여성국)”을 통해 혁명에 성공한 나라에서 여성해방을 본격화했다.


그녀는 사회주의와 여성해방은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고 봤다. 이를 위해서는 여성들이 혁명의 주체로 서는 것과 함께 여성 종속에 맞서 저항하고 독립적인 삶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사노동의 사회화, 가족법의 제정(△이혼의 자유 △부부의 법적 평등 △여성의 재산권 행사의 자유 △자녀 양육비의 책임 △미혼모 자녀에 대한 사회적‧법적 낙인과 차별의 철폐 등), 제노텔 설립 등을 통해 여성들의 독립된 삶의 토대를 놓았다.


소비에트 정부는 세계 최초로 여성부를 만들었고, 당시 유럽보다 더 빨리 여성의 참정권을 실현했으며, 진보적인 여성정책도 수립했다. 사회주의 혁명이 여성해방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 보였다.


콜론타이는 새로운 여성의 상도 제시했다. 그것은 바로 가부장제를 거부하고 독립적인 삶을 선택하는 여성이며, “국가, 가족, 사회 내 여성의 보편적 예속에 맞서 저항하며 여성이라는 대표자로서 그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여성(<신여성론(1918)>)”이었다.


그녀는 결혼과 성, 연애 역시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성 종속을 지속하는 전통적 결혼제도의 해체와 새로운 공동체의 구성을 말했다. 또한 그녀에게 참다운 사랑은 ‘남성 이기주의와 여성의 노예적 억압을 끝장낸 평등한 관계 속에서 가능하며, 타인의 마음은 이해하고 들을 수 있을 뿐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동지적 사랑’이었다. 그녀는 이를 “날개 달린 에로스”라고 불렀다. 그녀의 자유연애론은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펼쳐진 것이다.



외롭고 고단한 싸움의 연속


그녀의 주장과 실천은 매번 당 지도부를 비롯한 남성 사회주의자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1907년 여성노동자들의 독립적인 단체를 만들었을 때, 남성노동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그녀를 ‘분파주의자’라고 비난했다. 그들은 독립된 여성노동자들의 목소리와 조직화를 원하지 않았다.


제노텔을 설립하고 가족법 제정을 비롯한 여성정책이 수립됐을 때, 당 지도부와 사회주의자들은 그녀가 너무나 못마땅했다. 전통적인 가족체제의 해체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를 거부하는 것이었고, 여성이 독립적인 인격체로 서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억압의 종식에 찬성하면서도, 여전히 여성을 ‘남편과 자녀를 통해서만 존재가치가 드러나는’ ‘어머니’로 사고했다. 제노텔의 활동을 둘러싸고 당 지도부와 콜론타이는 격렬하게 대립했다. ‘사회주의 체제를 지키기 위해 여성들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며 체제 유지를 위해 여성을 동원하고 당의 하위부대로 전락시키려는 당 지도부의 태도에 그녀는 타협할 수 없었다. 성과 연애에 대한 그녀의 입장은 레닌을 비롯한 당 지도부의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그녀는 당 지도부에게 부르주아 여성관에 물든 일탈자였고, 사회주의 건설의 방해자였다. 결국 그녀는 해임되고 말았다. 그녀는 여성문제만이 아니라 당의 관료주의화에도 맞서 싸웠다. “노동자 반대파”에 참여해 당내 민주화와 노동조합의 정치적 자유를 주장하며 변질되는 혁명을 방어하고자 했다. 그녀의 여성해방에 대한 열정과 노동자혁명을 지키려는 태도는 당 지도부에게 거부됐으며, 1923년 그녀는 결국 외교관으로 러시아를 떠나게 된다.


“우리에게 여성해방은 꿈이나 원칙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 즉 매일 존재하는 사실입니다.”

“남성에게 기댈 필요도, 남성들에게 예속될 필요도 없는 새로운 인생의 가능성에 마음을 여십시오.”


그녀는 여성과 여성해방을 배제하고서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 실현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랬다. 혁명에 성공한 소비에트에서 그녀가 사라지자, 제노텔도 사라졌다. 낡은 가족제도는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지속됐다. 그리고… 소비에트연방공화국은 깃발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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