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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RF(트랜스젠더 배제적 페미니즘)를

‘운동’으로 승인할 수 없다


지수┃사회운동위원회 여성사업팀


* <변혁정치>는 앞으로 “사회주의×페미니즘” 연재를 통해 그간 페미니즘운동의 궤적을 살펴보고, 지금 우리에게 어떤 페미니즘이 필요한지, 어떤 의제를 통한 실천이 필요한지 함께 고민해보고자 한다.



“그 누구도 항상 사회적 다수자일 수는 없으며, 그 누구도 항상 소수자인 것은 아니다. 사람 모두는 소수인 측면과 다수인 측면을 다층적으로 쌓아나가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간다. 자신을 늘 강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약자일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반대로 자신을 늘 약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어떠한 면에서는 강자일 수도 있음을 잊고, 다른 약자를 무시하기 마련이다. 이런 사고에서는 혐오만 재생산될 뿐이다.”

- 숙대 입학 포기를 선언한 트랜스젠더여성 A 씨의 입장문 중에서 -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요즘 페미니스트들의 공통된 고민일 것이다. 숙명여대 입학을 포기한 트랜스젠더여성 A 씨는 말했다. “대학을 가고자 하는 당연한 목표, 그 속의 꿈조차 누군가에게는 의심의 대상이고, 조사의 대상에 불과하다”고. 우리는 그 ‘의심과 조사’를 통해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지우고 이성애 중심적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강요하는 국가와 자본에 대항해 투쟁해왔다. 차별금지법을 만들어 소위 국가와 자본이 만든 ‘정상성’ 범주에 해당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멈출 최소한의 법‧제도를 만들라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성 소수자라는 이유로,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이주민이라는 이유로 진행되는 차별과 폭력을 멈추라고.


그런데 국가도 자본도 아닌 일부 여성운동세력이 그 ‘의심과 조사’의 주체로 등장했다. 트랜스젠더여성이 여성의 공간을 침범한다고, 법원의 성별 정정을 반대한다고, 생물학적 성별대로 살아가라고. 혐오세력의 입을 통해 너무나 익숙하게 들었던 그 이야기를 여성운동의 이름으로 발화하는 이들의 등장에 아찔하기만 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TERF(터프: 트랜스젠더 배제적 페미니즘)의 등장


메갈리아에서 시작된 미러링 방식의 등장은 젠더 위계를 전복하고 기존의 젠더 약자인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남성에게 적용해, 사회의 여성혐오를 돌아보게 했다. 넷페미니스트들의 등장은 페미니즘에 대한 접근성을 높였고, 강남역 여성살해사건을 여성혐오로 의제화해낸 여성들의 분노와 투쟁은 페미니즘의 양적 성장을 이끌었다. 여성에 대한 폭력에 분노하는 이들은 여성혐오와 불법촬영물 근절을 위해 적극적인 행동에 나섰고, 그들의 분노에 기반한 정치행위는 분명 ‘힘’이었다.


그들은 국가와 사회가 방치했던 ‘여성들의 안전’을 가장 중요한 요구로 등장시켰다. 그들 앞에 펼쳐진 현실 속에는 ‘화장실에 들어갈 때마다 불법촬영을 걱정해야 하는 공포’, ‘성범죄를 저지르고도 제대로 처벌받지 않는 가해자’, ‘불법촬영물을 범죄로 간주하지 않는 국회의원들’, ‘피해 호소에도 처벌하기 어렵다는 경찰과 기소유예를 밥 먹듯 하는 검찰’, ‘아동 성착취 영상 사이트 운영자에게 고작 1년 6개월 형을 선고하는 법원’이 있었다. 수많은 여성이 더는 참을 수 없다고 선언했고, 분노했고, 행동했다.


그런데 이들 중 일부가 출판사 <열다북스>를 만들어 쉴라 제프리스의 책을 국내에 소개하면서, 외국에서도 소수 입장이었던 TERF(터프: 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t, 트랜스젠더를 배제하는 래디컬 페미니스트)의 주장을 들여와 여성들의 ‘입장’으로 만들고 있다. 쉴라 제프리스는 섹슈얼리티 억압과 반성매매, 반트랜스젠더 입장을 중심으로 ‘젠더 개념이 여성의 이름과 권리를 지웠다’고 평가하면서 젠더 문제를 제기하는 성 소수자운동을 ‘트랜스젠더리즘’이라 명명해 비판한다. ‘권리 충돌’ 개념을 가져와 ‘성 소수자 인권과 여성 인권이 충돌하는 속에 여성 인권이 뒤로 밀려왔다’며, ‘생물학적 여성의 권리’가 우선시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이 ‘입장’이 진정한 ‘래디컬 페미니즘’이라 명명하며 ‘트랜스젠더 배제적 페미니즘’에 대한 ‘이론화’를 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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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 이데올로기인 소수자 혐오를 답습한 

자유주의적 관점


그러나 이들이 스스로 ‘래디컬’을 표방한 것과는 달리, TERF의 주장은 그간의 급진주의 페미니즘과 결을 달리한다. 서구의 급진주의 문화페미니스트들의 입장을 가져와 여성 억압의 원인을 가부장제(특히 생물학적 남성)의 억압으로 보고, 여성에 대한 폭력과 여성성을 강화하는 외모 관습을 중심으로 한 문화적 강요에 착목한다. 그러나 ‘여성의 안전’과 ‘외모 관습’ 두 가지만을 중심으로 모든 현상을 해석하면서 발생하는 과도한 규정이 ‘생물학적 여성’만을 투쟁 주체로 삼고 트랜스젠더는 위험세력, 곧 ‘전형적인 여성성을 강화하는 세력’으로 오인하게 만든다.


트랜스젠더가 여성 공간에서 여성의 안전을 위협하고 폭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주장 속에 위험은 과장되고, 근거 없는 공포는 커진다. 트랜스젠더를 단지 ‘여장 남자’나 ‘성도착증 환자’로 취급하는 것은 트랜스젠더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기반으로 한 ‘혐오논리’에 기인한다. 물론 그 혐오논리는 새로 생겨난 게 아니라, 이미 사회 속에 뿌리 깊게 자리한 성 소수자 혐오를 기반으로 한다. 또한 ‘외모 관습’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부여한 성 역할 강요 속에서 개별 주체들이 수행하는 현상이지, 억압의 근본 원인은 아니다. 트랜지션(성별 전환)은 단지 ‘표현의 욕구’로만 한정되지 않으며, 트랜스젠더가 수행하는 외모꾸미기는 ‘여성임을 증명하라’는 사회적 요구에 대응하는 ‘생존전략’에 가깝다.


또한 이들의 입장은 여성 억압을 만든 사회구조나 체제에 대한 저항의 방식이라기보다, 불법촬영 규탄 혜화역 시위 요구안이었던 ‘여성 경찰청장’ 혹은 ‘경찰 성비 여성:남성 9대1’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남성과의 동등한 파이’를 요구하는 방식, ‘국가기관 주요 보직을 여성으로 채우면 성평등한 국가가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에 머무른다는 측면에서 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의 관점을 내재하고 있다.



피해와 고통의 언어가 다시금 혐오로 발화하는 모순된 논리


이들은 ‘여성의 안전’을 이유로 트랜스젠더여성의 숙명여대 진입을 반대하는 흐름을 형성해 결국 그녀가 입학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여성이 차별받는 이유에 대해서도 ‘생물학적 여성으로 태어났기 때문이지 사회적 성별 때문이 아니’라고, ‘생물학적 여성이 아닌 사람은 여성이 살아온 고통이나 피해, 차별과 억압, 사유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고, ‘수술을 통해 외적으로 여성의 몸을 가졌다 해도 ‘진정한 여성’일 수 없다’고, ‘여성의 파이를 뺏으려 하지 말고 남성의 공간에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으려 노오력하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페미니즘 운동은 여성의 범주를 ‘사회적 여성’으로 확장하고, 가부장제에서 고통받는 주체들을 여성의 범주로 포괄하는 과정이었다. 트랜스젠더들은 성별 이분법에 도전하는 ‘사회적 여성’ 주체였다. 자신의 성별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사회적 편견 속에서 치열한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 여성의 피해와 고통을 무기로 한 무차별한 혐오 발화로 무너졌다. ‘여성되기’를 희망했던 이들에게 ‘여성의 이름으로 이뤄진 배제’만큼 고통스러운 상처는 없었다. 그러나 TERF는 ‘생물학적 여성’만을 ‘진정한 여성’으로 간주하며 범주를 좁히고, 해당 범주에 온전히 들어오는 이들 외엔 여성의 이름을 허락하지 않았다.


여성이 피해자로 등치되고 여성으로서의 ‘온전한 피해자성’을 획득하기 위한 전쟁은 과연 무엇을 남기게 되는가. 모든 순간 시스젠더(생물학적 성별과 심리적인 성별이 서로 일치하는 사람) 여성이 게이 남성에 비해, 트랜스젠더에 비해 소수자이고 피해자일 수 있는가. 여성이 이들에 비해 더 피해자임을 확인받는 과정이 어떤 면에서 운동일 수 있는가.



생물학적 여성 중심, 그 위험한 순환의 고리


‘생물학적 여성’ 담론은 여성을 자연화하고 본질화시키면서 여성들 간의 차이, 다른 계급과 인종 등 여성들이 서로에 대해 가지는 지배와 권력의 문제를 지운다. 여성들의 다양한 위치성, 여성들이 차이를 정치적인 의제로 만들어온 역사를 박탈한다. TERF의 입장은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보부아르의 명제를 다시 생물학으로 회귀시키는 논리이자, ‘남성은 억압의 주체이고 여성은 억압의 대상’이라고 고정시켜 이 억압 체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고리를 만든다. 이들은 가부장제를 반대하면서도, 생물학적 여성 담론을 통해 가부장제의 기반인 성별 이분법을 사실상 지지한다는 점에서 모순을 가지고 있다.


페미니즘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형성한 남성 중심 사회에서 배제된 이들의 여성해방투쟁이자, 성 소수자와 장애인, 이주민 등 소위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정상성 범주에서 배제된 주체들의 해방투쟁으로서의 의지이자 실천의 운동이었다.


그러나 TERF는 “젠더박살 프로젝트” 강연회 등을 통해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젠더가 차별금지법에 새겨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공공연히 주장한다. 탈코르셋으로 전형적 여성성을 거부한 TERF 옆에, 가부장제가 강요하는 여성성과 남성성의 틀을 깨고자 하는 TERF 옆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한다’며 함께 서 있는 이들이 ‘하나님이 주신 것은 이유가 있고 사람이 바꿀 수 없다’고, ‘태어난 성별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순리’라고 말하는 종교계와 보수세력, 혐오세력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권리를 ‘소유’하려는 관점이 가지는 폐해


여성의 권리와 성 소수자의 권리가 ‘경합‧충돌한다’고 보고 ‘여성의 권리를 먼저 챙기겠다’는 생각은 권리마저도 자본주의적 소유의 방식으로 해석한 결과다. ‘여성의 권리 확장’을 위해 ‘성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와 배제의 자유’를 주창하는 이들의 주장은 가장 자본주의적이고 가장 자유주의적 관점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트랜스젠더는 전형적인 여성성‧남성성을 재생산하는 위협세력이 아니라, 생물학적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분법 속에 가려진, 존재 자체를 위협받고 공격받는 피해자이자, 성별 이분법을 깨뜨리는 주체다. 남성 중심, 이성애 중심, ‘정상가족’ 중심의 사회에서 ‘무가치한 노동, 무가치한 존재’로 치부되는 주체들이 함께 연대해서 사회를 바꿔나가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권리부터 챙기겠다고, 저들의 권리가 여성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그 어느 구조에도 타격이 될 수 없다.


남성 배제, 트랜스젠더 배제, 비혼‧비출산을 이행하지 않는 기혼여성 배제와 같이 배제로 점철되는 흐름이, ‘생산성 있는 인구’만을 요구하는 자본주의와 전형적 이성애 중심성만을 강요하는 가부장제에 맞서 공통의 억압에 직면한 이들의 연대를 거부하는 흐름이 부조리한 사회를 어떻게 바꿀 수 있는 것인지, 어떻게 변화된 미래를 꿈꿀 것인지 이제는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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