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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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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그람시(1)  1891~1937


혁명은 구질서의 파괴이자

신질서의 건설이다


백종성┃조직‧투쟁연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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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wikipedia]



1차 세계대전과 이탈리아 노동계급


1차 세계대전 전후로 이탈리아 노동자 투쟁은 성장하고 있었다. 우선 당시 이탈리아는 1차 대전에 참전하며 전시 동원체제를 형성했고, 그에 따라 대중은 정치적 억압과 물자 부족의 고통을 겪고 있었다. 이에 더해, 1917년 2월 발발한 러시아혁명은 이탈리아 노동자들의 용기와 상상력을 자극했다. “러시아를 따르자!” - 이는 당시 이탈리아에서 불리던 혁명가였다. 이 조건이 맞물려 급진적 대중투쟁이 벌어졌다. 1917년 8월, 이탈리아 북부 산업도시 토리노에서는 생존권을 요구하는 봉기가 일어났다. 대중의 요구는 ‘빵’에서 ‘전쟁 중단’으로 급격히 정치화했고, 이탈리아 국가는 이를 가혹하게 진압했다. 50명이 죽었고, 200명이 부상당했으며, 800명이 투옥됐다.



이탈리아 사회당의 상태


전쟁 전후 이탈리아 사회당 역시 급격히 성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1914년 5만 8천 명을 약간 넘긴 당원은 이제 30만을 바라보고 있었고, 1918년 말이면 소속 국회의원도 3배로 늘어 159명이나 됐다.


그러나 외형적 성장 뒤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결정적 투쟁 없이도 노동계급은 결국 승리할 것’이라는 사고가 번지고 있었고, 이런 진화주의적 환상이 지배한 이탈리아 사회당에는 (그 선례인 독일사민당과 마찬가지로) 전술적 무능력과 관료주의가 움트고 있었다. 다음은 이탈리아 사회당 기관지 <전진 Avanti> 1918년 10월 17일 자에 실린 글이다.


“국가의 돈이 드는 요구는 이룰 수 없다. 전쟁으로 가용할 돈이 없기 때문이다. 국가의 방어력이나 공격력을 약화시키는 요구도 이룰 수 없다. 전쟁으로, 국가는 자신의 힘을 강화할 모든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본가의 이윤을 줄이라는 요구 역시 이룰 수 없다. 자본이 싸우지도 않고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며, 전쟁으로 당분간은 계급투쟁이 금지될 것이기 때문이다.”



신국가의 핵, 공장평의회


1918년, 이탈리아는 승전국으로 1차 대전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이제 다른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노동계급에 대한 억압은 변하지 않았고, 마침내 1919년에 이르러 억눌린 분노는 다시 폭발했다. 이후 “붉은 2년(Biennio Rosso)”이라고 불릴 격돌의 나날이 시작됐다. 이탈리아 북부 공업도시, 피아트 공장이 위치한 토리노 금속노동자들은 공장평의회를 건설해 공장을 장악하고 생산을 통제했다.


공장평의회는 공장 전체 노동자를 포괄한바, 각 영역 대표자를 선출해 공장 대표위원회를 조직하고, 다시 공장 대표위원회가 구역별 지구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과정을 통해 지구위원회는 구역에 속한 모든 노동자 대표를 포함했다. 급격히 성장한 북부 공업지대는 가혹한 노동규율로 노동자들을 복속시켜왔고, 그 결과 노동자들의 요구는 임금을 비롯한 경제적 요구를 넘어 생산통제권으로 발전했다.


1891년 이탈리아 남부 사르데냐에서 태어난 사회당 소속 청년혁명가 안토니오 그람시가 동료들과 함께 <신질서>를 창간한 것이 이때의 일이다. 그람시는 공장평의회 운동의 혁명적 성격을 포착했으며, 1919년 6월 <신질서> 첫 호를 발간한 이래 공장평의회 운동의 의미를 설명하고 그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그에게 공장평의회는 단순한 투쟁기구 이상의 것이었다. 그람시는 공장평의회를 “신국가의 핵”이라고 불렀다. 그람시에게 혁명은 ‘새 세상을 만들 노동계급의 능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과정’이었기에, 노동계급이 스스로를 지배계급으로 조직하는 권력기관이 바로 평의회였다.


“모든 권력이 평의회에 장악되었다.… 생산을 재개하되, 그 노동은 공장평의회가 규제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피아트 중앙공장은 하루 37대의 자동차를 생산했다. 보통 때는 하루 67대 정도였다. 대다수 기술자와 많은 사무직원이 나오지 않았으나 그만한 수준이 유지됐던 것이다.”*



공장평의회의 패배와 파시즘의 서막


그러나 이탈리아 사회당 다수는 공장평의회 운동의 의미를 포착하지 못했다. 오히려 ‘생디칼리즘(전투적 조합주의)’이라는 딱지를 붙여 ‘무책임하고 무규율적인 운동’이라고 폄하하기까지 했다. 반면 그람시는 ‘위대한 역사 과정의 시작’이라며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그 운동 자체와 명운을 함께 했다. 그에게 혁명은 단지 구체제를 타도하는 것뿐만 아니라 새로운 체제를 건설하는 과정이었으며, 공장평의회 운동은 그 전형이었다.


“첫째, 혁명이 부르주아 국가를 전복하는 데 착수하고 그러한 전복에 성공한다고 해서 반드시 프롤레타리아적인 것은 아니다. 둘째, 또한, 혁명이 중앙정부가 부르주아 정치권력을 집행하는 수단인 대의제도와 행정조직을 제거하는 데 착수하고 실제로 그렇게 한다고 해도 그 혁명이 반드시 프롤레타리아적이고 공산주의적인 것도 아니다. 셋째, 민중봉기가 자신을 공산주의자라 부르는 자들(또한, 실제로 신실한 공산주의자들)의 수중에 권력을 쥐어준다고 해서, 그것이 프롤레타리아적이고 공산주의적인 것도 아니다. 혁명은, 자본가계급이 지배하는 사회의 깊은 곳에서 발전하는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의 생산적 힘을 해방하는 정도만큼만 프롤레타리아적이고 공산주의적이다.”**


결과적으로 공장평의회 운동은 관료적 산별노조의 비협조와 방해, 사회당의 무관심 속에 패배했다. 혁명적 시기가 지나가고, 파시즘이라는 반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람시와 토리노 그룹에게, 전체 이탈리아 노동계급에게 겨울이 오고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 주세페 피오리(신지평 옮김), 『그람시』, 두레, 1991.


** 그람시, 「두 혁명」, <신질서> 1920년 7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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