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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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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20.07.01 19:45

고명자 1904~?

고려공산청년동맹 재건의 전권위원


나영선┃노동자역사 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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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11월 14일,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는 조선 문제에 관한 결정을 내리기 전 모스크바에 체류하던 조선공산당 주요 의견그룹 대표자급의 입장을 청취했다. 12월 초순 마침내 코민테른은 <조선의 농민 및 노동자의 임무에 관한 결의(이하 ‘12월 테제’)>와 <조선공산당 당내 정세에 관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결의>를 채택하고, 조선공산당을 해산시켰다.1 코민테른은 기존 조선공산당의 조직방침을 비판하고 노동자‧농민에 기초한 당 재건을 지령함과 동시에, 이를 코민테른이 직접 지휘한다고 결정했다. 이에 따라 코민테른은 당 재건을 위한 활동가들을 조선에 파견하기로 했다. 이들은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출신으로, 규모는 20여 명이었다. “조선공산당 조직준비위원회”가 그들의 조직명이었다. 이들 중 고려공산청년동맹 재건을 위한 전권위원으로 선발된 사람은 활동명 “고사찰(高四察)”, 본명 고명자라는 조직원이었다.



대구에서 서울로, 그리고 모스크바로


고명자는 1904년 부여에서 태어났다. 고명자의 부친 고의환은 1917년에 판사직을 사임한 후 대구와 충남 강경에서 변호사로 활동했다. 이런 배경을 고려하면 고명자는 꽤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음을 알 수 있다.2 고명자는 대구신명학교 졸업 후 대구에서 여학교 교사로 근무하며 대구여자청년회(이하 ‘대구여청’)에 가입해 간부로 활동한다. 대구여청은 정칠성 등이 1923년 10월 조직한 계몽운동 성격의 단체였다. 정칠성은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에서 활동한 저명한 사회주의자였다. 고명자는 1924년 봄에 서울로 올라와 조선총독부 의원 조산부과에 입학, 1925년 가을에 졸업한다.


고명자의 상경 시점에 주목해보자. 1924년은 조선청년총동맹‧조선노농총동맹 같은 대중조직 전국화와 함께 여성운동의 전국화도 진행되고 있었다. 이에 발맞춰 대구여청의 정칠성, 이춘수, 고명자 등도 상경한다. 이들은 여성동우회에 가입해 경성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대구여청 활동가들의 상경이 ‘집단적 이전’이었음을 암시한다. 고명자는 여성동우회에서 적극적으로 사회주의를 수용하며 활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여성동우회는 1924년 짧은 동거를 끝내고 분화, 당 건설에 합의한 화요파‧북풍파 연합의 “경성여자청년동맹”과 서울파 계열의 “경성여자청년회”로 나뉜다. 특정 정파에 소속되지 않은 정칠성은 경북지역 도 단위 사상단체를 표방한 사합동맹 결성에 참여하면서, 경성여자청년동맹을 선택한 고명자와 조직적으로 결별했다. 한편 이 시기 고명자는 동지이자 연인으로 김단야를 만난다.


1925년 4월 18일 고려공산청년동맹(이하 ‘공청’)이 결성되고 고명자는 공청에 참여한다. 공청은 자질 있는 청년을 선발해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유학시켜 사상적‧조직적으로 훈련된 직업혁명가를 육성하려 했다. 고명자는 여기에 선발된 20여 명과 함께 비밀리에 상해를 거쳐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난다. 이때 함께 떠난 이들 중에는 권오직, 김명시 등도 있었다. 이들은 이후 사회주의 운동에 깊은 족적을 남긴다. 고명자가 선발된 것은 김단야와의 인연 때문이 아니었다. 1926년 일제와 동료 여성운동자에 따르면 고명자는 “장래 여성운동의 맹장”3, “이지가 강철같이 굳은 여성, 인내력과 활동성은 그 누구들에 부럽지 않게 민활하고 예민하였다”4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당 재건운동의 한복판


1929년 7월, 김단야를 필두로 당 재건 임무를 띤 활동가들은 속속 입국해 조직활동을 재개했다. 김단야와 고명자는 지금의 마포구 도화동에 아지트를 마련했다. 하지만 1급 수배자였던 김단야는 1929년 12월 2일 보안을 위한 조직의 결정에 따라 출국한다. 이게 둘의 마지막이었다. 이후 김단야는 소련에서 ‘일제의 밀정, 반혁명폭동 테러조직 지도자’라는 누명으로 1938년 2월 13일 처형됐다.


한편 조선공산당 조직준비위는 1930년 3.1 기념 격문 배포로 일경에 단서가 잡혀 2월부터 대대적인 검거에 휩싸였다. 고명자도 3월 15일 인사동에서 체포됐다. 이후 1931년 10월 2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당 재건 사건으로 집행유예를 받은 이는 고명자가 유일했다.


“콤뮤니스트 그룹”은 준비위와 마찬가지로 김단야‧박헌영 등으로 구성된 코민테른 직속 당 재건 기관이었다. 이들은 기관지 <꼼뮤니스트>를 발간하고, <12월 테제>를 지지하는 그룹을 사상적으로 통일한 뒤 당 재건을 목표로 했다. 고명자는 이 조직에서 1932년 메이데이를 맞아 김명시와 함께 격문 배포에 참여했다가 김명시가 먼저 잡힌 후 경성에서 체포된다. 그는 최소한 1933년까지는 조직과 선을 잇고 있던 것 같다. 상해에서 박헌영이 일경에 체포될 때, 김단야가 고명자에게 보내는 음어통신문을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향의 시대’와 해방 이후의 격랑에서


부모의 손에 이끌려 낙향한 고명자는 <조선중앙일보> 기자로 활동한다.5 <조선중앙일보>는 여운형이 1933년 사장으로 취임해 경영하던 신문사였다. 여기에는 이우적을 비롯한 사회주의 운동에 종사하던 많은 활동가들이 기자로 있었다.


이후 고명자는 일제 말 대표적 친일잡지 <동양지광>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친일논조의 글을 발표한다. 1930년대 말은 ‘전향의 시대’였다. 유수의 사회주의자들이 혁명운동의 전망을 상실하고 전향 대열에 끼어들었다. 고경흠, 박영희, 김한경 등이 대표적이다. 고명자가 어떤 계기로 전향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일제 말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과 “대화숙”에 속한 사회주의자들의 전향에 대해서는 위장 전향 논란이 남아있다.


해방 이후 고명자는 건국준비위원회를 시작으로 부녀총동맹 등의 대중조직 활동에 나서며 정치적으로는 여운형의 노선과 함께했다. 1947년 7월 여운형의 죽음 이후에도 근로인민당에 남아 활동을 지속했다. 1948년 4월 고명자는 근로인민당 대표로 평양에서 개최된 “전조선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 참석한 이후 북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1950년 1월 18일 ‘남한의 중간정당에 침투한 남조선노동당 특수부 사건’에 연루돼 서울시경 사찰과에 체포된 후, 행적은 물론 생사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6



1 신주백, 『1930년대 국내 민족운동사』, 선인, 2005년, 23~24쪽.


2 전병무, 「일제하 한국인 변호사의 자격 유형과 변호사 수입」, 『한국학논총』 제44집, 2015년.


3 「京鍾警高秘 第13691號ノ1, 高麗共産靑年黨員檢擧應援ノ件」, 1925년 12월 3일.


4 김옥엽, “階級戰線에서 ᄯᅥ러진 ᄭᅩᆺ들(계급전선에서 떨어진 꽃들)”, <신여성> 1933년 3월호, 48쪽.


5 이우적, “進步的 役割 다햇다(진보적 역할 다했다)”, <조선중앙일보> 1947년 7월 1일 2면. 고명자, “꼴키-翁 會見記(고리끼 옹 회견기)”, <조선중앙일보> 1936년 6월 22일 4면.


6 “高明子를 送廳(고명자를 송청)”, <남조선민보> 1950년 2월 7일 2면. <서울신문> 1950년 5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