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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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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하 1905~1950


화전민의 아들, 적색노조 조직가,

남로당의 마지막 지도부


나영선┃노동자역사 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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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3월 27일 새벽 1시. 아직 새벽의 서울은 봄기운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차가웠다. 이날 최저기온은 3.7도를 기록했다.1 서울 경찰국 사찰과 형사 10여 명은 종로6가 김삼룡의 비밀아지트를 급습했다. 하지만 김삼룡은 뒷담을 넘어 도주한다. 경찰은 차순위 비밀아지트로 유력한 예지동의 한 가옥을 수색하다가 새벽 4시경 한 사람을 체포한다. 그가 바로 이주하였다. 비합법 전위조직 최고지도자의 아지트와 용모는 일급보안 사항이었다. 이 상황은 내부의 변절 혹은 자백이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남로당 최고지도부의 체포에는 김삼룡의 사업비서 김내영과 남한 총집행책 김형육의 체포가 결정적이었다. 혹독한 심문과 고문 끝에 김삼룡과 이주하의 은거지를 알아냈을 것이다.2


이주하의 얼굴은 체포하러 간 경찰들도 몰랐다고 한다. 체포한 이주하의 신원은 바로 얼마 전 변절한 남로당 경기도당 부위원장이었던 홍민표의 대면증언으로 확정됐다. 체포를 피했던 김삼룡은 변절한 줄 미처 몰랐던 연락세포 안영달의 집에서 당일 오후 6시경 체포된다. 한편, 남로당의 또 다른 지도자였던 정태식도 10여 일 뒤인 4월 초에 체포되고 만다. 이로써 남한 내부의 남로당 지도부는 붕괴하고 말았다. 이들 셋 중 정태식만이 징역 20년의 형기를 받았고, 이주하와 김삼룡은 1950년 6월 26일 남산 기슭에서 처형된다.


이주하는 1905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화전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1908년경 의병과의 연루혐의로 관헌의 추적을 받자 원산으로 이주했다. 이 시기 함경도 지방의 홍범도 부대는 북청 후치령 전투에서 승리하고 갑산 삼수 읍성을 점령하는 등 절정의 시기였다.


가난한 소년 이주하는 아버지 몰래 광성학교에 입학, 졸업하고 상급학교인 보광중학에 재학 중 3.1 운동에 참여한다. 3.1운동 참여는 다른 많은 민족해방운동 투사들처럼 그의 삶을 뒤흔든 계기가 됐을 것이다. 이 일로 그는 형이 일하는 광산으로 도피해 체포를 면한다. 그 후 여러 직업을 옮기며 일하던 이주하는 집안 형편이 나아지자 서울의 휘문고보에 입학하지만, 3학년이 되던 해인 1924년에 발생한 동맹휴학으로 교장을 퇴진시켰지만 이주하 본인은 퇴학당한다. 가난으로 학업을 마치지 못했지만, 이듬해, 일본의 니혼대학에 진학한 이주하는 이곳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하고 치바에서 공산청년동맹에 가담하다 체포되기도 한다.


1928년 5월 귀향한 원산은 1년 전 원산노련의 승리 경험으로 노동운동의 힘이 커가고 있던 땅이었고,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인 청년 이주하에겐 가슴 뛰는 현장이었을 것이다. 1929년 역사적인 원산총파업은 그가 노동자 운동의 조직가로 살아가며 사회주의 혁명을 조선해방의 전망으로 삼는 계기가 됐다. 총파업은 패배했지만, 이주하는 현장 노동자로 일하며 조직을 추스르면서 운동을 재건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당 재건 임무를 띠고 김단야를 책임자로 코민테른에서 파견한 “조선공산당재조직준비위”의 일원인 조두원과의 접촉으로 당 재건 사업에 참여하다 붙잡혔다. 그러나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기도 했다. 서대문형무소를 나서자 다시 프로핀테른(적색 노동조합 인터내셔널) 산하 태평양노동조합의 함남지역 책임자가 됐다가 1931년 ‘1차 태로 사건’으로 검거, 징역 5년 형을 받고 1936년 출옥한다.


출옥 후에도 이주하는 운동을 멈추지 않고 원산의 철도노동자를 중심으로 적색노조를 조직했다. 뿐만 아니라 1937년에는 세칭 ‘성대파’3로 불리는 이강국, 최용달 등과 함께 “원산공산주의자그룹”을 결성하고 기관지 <노동자신문>을 발간하며, 흥남, 원산, 평양, 진남포 등지의 공업지대를 중심으로 지하조직사업을 벌이다 해방을 맞았다. 이 과정은 훗날 김태준이 “남조선에 박헌영, 이관술 두 동무와 북조선에 이주하 동무는 조선 지하운동의 레코드를 깨뜨리고 있던 것”4이라 평할 만큼 조선 남부의 “경성콤그룹”과 더불어 일제 말기 국내조직 운동의 양대산맥이었다.


해방 이후 1945년 9월 11일 재건된 조선공산당은 총 28명의 당 중앙위원 명단과 순위를 결정했다. 박헌영, 김일성, 이주하, 박창빈, 이승엽, 강진, 최용건, 홍남표, 김삼룡, 이현상 등이었다.5 이주하는 김일성에 이어 당 서열 세 번째였다.


1945년 12월 이주하는 당 중앙의 요청에 따라 원산을 떠나 서울로 근거지를 옮겨 조선공산당 서기국장, 남로당 중앙위원, 민전(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으로 활동했다. 1948년 남로당의 2.7 구국 투쟁 이후 5.10 단선반대투쟁을 앞둔 4월에는 김삼룡과 함께 남로당을 지도했다.


한국전쟁 중인 서울에서 복간된 <조선인민보> 1950년 8월 5일 자 신문에 이주하와 김삼룡의 시신 발견과 학살 경위가 실린다. 발굴된 시신은 조선노동당 주관으로 주요 인사가 참석해 노동자들의 애도 속에 엄숙히 장례식을 치른 다음, 남산의 남쪽 한 기슭에 안장했다는 기사였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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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삼룡과 이주하의 체포를 알리는 당시 신문기사. 



마지막까지 남로당과 운명을 같이했던 세 사람과 지리산에서 유격투쟁을 벌이던 이현상은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엄혹한 일제 말기, 전향과 백색테러가 횡행했다. 민족주의자는 말할 것도 없고 사회주의자들도 상당수가 운동을 쉬거나 침묵했지만, 이들은 굽힘 없이 조직과 투쟁을 병행했다. 특히 이주하와 함께했던 함남 출신 공산주의자들은 1948년 북조선로동당 2차 당대회 시기에 김일성으로부터 ‘종파주의’라는 강력한 비판을 받았다. 이 비판은 5년 후 남조선로동당 출신자들 특히 경성콤그룹 출신자들에게로 향한다. 이들은 대부분 ‘미제의 간첩’, ‘공화국의 전복 음모’라는 가당찮은 누명을 쓰고 숙청‧처형된다. 1948년 입산해 5년간 퇴로도 해방구도 보급도 없이 투쟁하던 이현상도 예외는 아니었다. 남로당 숙청과 비슷한 시기에 그는 평당원으로 강등되고, 지리산 빗점골에서 전사한다.



1 <자유신문> 1950년 3월 28일 자 “천기예보”


2 <자유신문> 1950년 4월 2일 자 기사 “김삼룡‧이주하 체포 경위”


3 경성제국대학 출신 사회주의자들을 지칭하는 당시의 말이다. 최용달, 이강국, 김재갑, 박문규 등이 대표적인 활동가들이다.


4 김태준, 「李舟河論(이주하론)」, 심지연, 『이주하 연구』, 2007, 백산서당, 228쪽.


5 박헌영, 「조선공산당의 재건과 그 현 상황」, 1946년 3월.


6 김성동,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 2014, 박종철출판사, 113~1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