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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20.11.02 16:17

기획┃소비에트, 볼셰비키, 사회주의 혁명(上)


혁명의 신질서 소비에트,

다른 세상을 펼치다


이주용┃기관지위원장



많은 이들의 뇌리에 러시아 혁명은 잿빛으로 응고된 듯하다. 전체주의, 관료적 통제, 음침하고 경직된 사회, 그리고 잔혹한 숙청까지…. 당장 1917년 10월 혁명의 한가운데 있었던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정치국 성원 7명 중 5명이 스탈린 집권기에 벌어진 1930년대 대숙청에 휘말려 처형되거나 암살당했다. 1924년에 먼저 세상을 떠난 레닌을 제외하면, 이 7명의 볼셰비키 중앙지도부 가운데 자연사한 사람은 스탈린 한 명뿐이었다.


그러나 10월 혁명이 그 시작부터 파멸적 독재로 귀결할 운명을 타고났던 것은 아니다. 물론 평상시엔 상상하기 어려웠던 가공할 에너지가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혁명의 소용돌이에서, 각 행위주체 안팎에 온갖 위험요소가 상존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준비 속에 기회를 포착해 떨쳐 일어서 길을 만들어낼 것인가, 아니면 ‘이런저런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가만 기다려보자’는 변명 뒤에 숨어 ‘조건들’만 따지다 반동기를 맞을 것인가의 교차로에서, 볼셰비키와 소비에트는 선택해야 했고 그 결단을 실행에 옮겼다.


혁명 러시아는 탄생과 함께 반()혁명 세력이 일으킨 내전과 더불어 제국주의 국가들의 봉쇄와 군사적 침략을 온몸으로 겪었다. 그토록 간절히 바라고 지원했던 독일 혁명 등 국제적인 노동계급의 반란은 피어린 패배로 끝났다. ‘일단 살아남아야 한다’는 지상 과제와 상황 논리, 그리고 그 속에서 자라난 관료주의가 점점 혁명 러시아를 질식시켰다.


그러나 전국을 쑥대밭으로 만든 3년간의 내전이 끝난 후 레닌이 비통하게 “러시아에서 노동계급은 사라져버렸다”고 술회했음에도, 그 모든 고난에서 혁명을 지켜낸 것은 러시아 노동자민중이었다. 혁명에 약동하는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 역시 그들이었다. 봉기와 권력장악은 ‘시작’이었을 뿐, 사회주의 혁명은 대중의 원동력에 근거해 그들의 열망을 이뤄낼 일련의 대개혁을 실현하려는 과정으로 이어졌다. 그 노력이 좌절된 원인과 후과, 교훈에 대해선 다음 호(117호: 11월 15일 자)에서 다루겠지만, 그 전에 혁명 러시아가 만들어가고자 했던 새로운 질서의 편린을 몇 가지 공유하면서 그것이 품고 있던 다채로운 가능성을 나누고자 한다.



소비에트, 

신질서의 조직적 근간


대개 ‘소련’이라고 불린 이 나라의 공식 명칭은 “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방”이었다. 여기에서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라는 낱말은 보통명사로 어렵지 않게 감을 잡을 수 있지만, 문제는 ‘소비에트’다. ‘소련’이라는 줄임말에 가려졌지만, 기실 소비에트야말로 혁명이 낳은 신질서의 핵심이었다. ‘자유민주주의’(정확히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혹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의회제를 넘어 노동자민중이 상시적으로 통제하고 그들 스스로 국가의 주체가 되는 새로운 공화국의 조직적 근간이 바로 소비에트였다.


우리말로 ‘평의회’를 뜻하는 소비에트는 러시아 혁명 와중에 탄생한 노동자민중의 자치기구였다. 1905년 1차 러시아 혁명 당시 수도를 비롯한 몇몇 산업도시에서 “노동자 대표 평의회(=소비에트)”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하며 산발적으로 조직된 초기 소비에트는 어찌 보면 오늘날 노동조합총연맹의 지역본부‧지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역할을 맡기도 했다. 곧, 특정 도시나 지역 내 여러 사업장의 노동자 대표들이 모여 공동파업을 전개하고 지휘하는 기구였던 것이다. 이는 노동조합 등 기본적인 결사체조차 인정하지 않았던 짜르 전제정의 결과물이기도 했는데, 제도적인 대중조직‧조합이 뿌리내리지 못한 가운데 혁명의 열기 속에 탄생한 소비에트는 일차적으로 해당 지역 노동자들의 정치‧경제적 요구를 대표하고 투쟁을 조직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대중 반란의 파고가 상승할 때 그들의 구심이 되는 결사체의 등장은 대중의 에너지를 응집하고 이를 결정적 행동으로 표출하는 데 중대한 요소로 작용한다. 한국에서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며 민주노조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듯, 1905년의 기억을 갖고 있던 러시아 노동계급은 1917년 2월 혁명이 발발하자 이번에는 러시아 전국에 걸쳐 소비에트를 건설했다(다만, 소비에트는 기업 단위가 아니라 주로 도시와 지역, 혹은 도시 내 구역 단위로 결성됐다).


이제 소비에트는 노동조합의 위상에 머물지도, 심지어는 혁명 투쟁의 구심 역할에 스스로를 한정하지도 않았다. 수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를 위시한 각지의 소비에트는 전국 조직인 ‘전() 러시아 소비에트’를 구성하고, 도시 내 구역‧소도시‧마을 - 대도시‧광역 지방 단위 - 전국 단위 등에 이르는 조직적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2월 혁명 이후 기존의 의회는 물론이고 대중의 선출도 없이 수립된 부르주아적 임시정부는 노동자민중의 실제 대표체인 소비에트의 승인 없이는 사실상 어떤 일도 하지 못했다. 소비에트는 이미 새로운 국가를 예비하고 있었고, 각 지역 소비에트는 10월 혁명 전부터 실질적인 통치권을 발휘했다. 10월 봉기는 소비에트가 비로소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국가권력을 접수한다는 최종적 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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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7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회의장 [사진: wikipedia]


‘우리의 조직, 우리의 나라’


소비에트는 도시와 농촌, 그리고 병영에서 노동자민중이 선출한 대표들로 구성됐고 대중의 통제력도 막강했다. 1917년 2월만 해도 소수파였던 볼셰비키가 10월 혁명 이전에 소비에트 대표자의 다수를 점하게 된 것 역시(볼셰비키가 봉기에 나선 것은 자신들이 다수파가 되었음을 확인한 후였다), 혁명의 한가운데서 임시정부와 타협하는 온건파들에게 등을 돌린 대중이 곳곳의 소비에트에서 자신의 대표자를 볼셰비키로 갈아치웠기 때문이었다. 소비에트 대표자들은 대중에게 자주 소환됐고, 그만큼 새 대표자를 뽑는 선거도 수시로 이뤄졌다.


소비에트 대표자들은 노동자민중의 삶과 노동에 밀착한 공간에서 선출된, 그 스스로 민중의 일원인 사람들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이미 2월 혁명 이후 철도‧우편‧전신 등 주요 공공행정 분야에서 실질적 통치권을 발휘하던 소비에트는 10월 혁명을 거쳐 국가기구로 전환하며 권력의 모든 요소에 민주적 통제를 도입하고자 했다. 소비에트는 ‘삼권분립’(그 속에서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지배력을 획득하고 권력에 대한 대중의 접근을 차단한다)의 허상을 거부했는데, 행정권력 집행자들은 소비에트가 선출하거나 임명했고, 레닌과 볼셰비키는 노동자들을 대거 국가행정에 참여케 독려함으로써 관료의 특권화를 제어하려 했다. 러시아 노동자민중에게 소비에트는 자신들의 조직이었고, 신생 소비에트 공화국은 진정한 자신들의 나라였다.


아래로부터의 통제는 일반행정에 국한되지 않았다. 10월 혁명 직후부터 소비에트는 기존 사법기구를 해체하고 판사 역시 대중이 선출토록 함으로써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고고한 ‘법복귀족’이 설 자리는 없었다. 또한, 1917년 혁명의 핵심 요소 중 하나는 병사들이 스스로 대표를 뽑아 소비에트를 조직해 군에 대한 민주적‧자주적 통제에 나섰다는 점이다. 각급 부대에서 병사들은 위원회를 구성하고 대표자를 선출해 새로운 지휘권을 부여했다. 이렇게 형성된 병사 대표 소비에트는 구질서를 무너뜨리며 혁명의 일원이자 혁명을 수호하는 병사 자치기관으로 자리매김했다.


생산에 대한 노동자들의 통제도 10월 혁명 이후 급진전했다. 경제에 대한 지배력을 갖출 때 비로소 노동자민중의 온전한 정치권력이 발현될 수 있음을 소비에트는 알고 있었고, 노동자들은 각자의 현장에서 이를 실천했다. 여기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한 건 ‘공장위원회’였다. 노동자 소비에트가 지역 단위로 여러 사업장의 노동자 대표들이 모인 곳이라면, 공장위원회는 개별 기업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더 세밀한 단위였다. 공장위원회 역시 10월 혁명 이전부터 존재했지만, 이제 노동자들은 공장위원회를 통해 파업과 투쟁을 넘어 자기 사업장에 대한 직접적인 경영을 시도했다.


다만, ‘노동자 통제’라고도 불린 공장위원회의 경험은 항상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 사회 전체의 필요에 대한 고려 없이 개별 사업장의 경영권을 해당 기업 노동자들이 접수하는 것‘만’으로는 집단이기주의를 방지하거나 ‘필요를 위한 생산’을 달성하기 어렵다는 점도 확인됐다. 그럼에도, 공장위원회와 노동자 통제의 실험은 노동계급이 체제의 물질적 토대 자체를 스스로 지배하겠다는 집단적 권력의지의 표출이었고, 이러한 에너지를 어떻게 사회 전체의 필요 충족과 연계할 것인지에 관한 과제를 사회주의자들에게 던진 계기가 됐다.



혁명이 분출시킨 

개혁의 열망


이렇듯 민주적 원리에 근거한 소비에트는 노동자민중의 삶을 구성하는 제반 영역을 획기적으로 개혁하려는 여러 시도로 나아갔다.


1917년 2월 혁명의 문을 열어젖힌 여성노동자들은 10월 혁명 이후 여성해방을 향한 발걸음도 주저 없이 내디뎠다. 소비에트는 당시 서유럽보다도 훨씬 진보적인 정책들을 과감히 내놓고 집행했는데, 정부 수립 1개월 만에 즉각 선포한 게 ‘이혼할 권리’였다. 이는 더 이상 여성을 ‘가족’의 굴레에 속박시키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였다. 온전한 여성 참정권, 남성과 동일한 임금‧취업의 권리를 보장한 것은 물론이고, 선도적으로 임신중지의 권리를 인정하면서 여성이 자기 몸에 대한 결정권을 갖도록 하는 동시에 유급 출산휴가와 보육 수당 지급으로 출산 여성에 대한 지원책도 마련했다. 나아가 여성이 가사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보육‧세탁‧식사를 비롯한 전통적인 가사노동을 사회화하는 여러 공동시설도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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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비에트 체제 초기에 정부는 여성의 임신중지 권리를 보장하면서, 안전하지 않은 전통적 방식으로는 임신 여성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안전한 환경에서 전문적인 의사에게 임신중지 시술을 받을 것'을 권고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사진은 이 캠페인 당시 활용된 1925년의 포스터. [사진: wikipedia]



한편, 대중교육 분야는 신생 소비에트 체제가 무엇보다 중시한 것 중 하나였다. 노동자민중 자신의 통치권을 안정적으로 담보하려면 보편적인 양질의 교육이 필수적이었다(레닌은 관료주의의 병폐를 차단하기 위해서라도 대중교육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공공도서관과 초‧중등학교를 대대적으로 확충하는 한편, 양질의 도서를 출판해 대중에게 저렴하게 보급했다. 뿐만 아니라 교육 프로그램과 시스템 전반을 일신했는데, 가령 모든 시민에게 기본 교양교육을 제공하고 일선 학교에 광범한 자율성을 부여해 다양한 교육적 실험을 가능케 하는 한편, 학교 노동자와 학생들이 대표자를 선출해 민주적 운영을 담당케 했다. 이와 함께 시험제도와 대학의 학위증서를 폐지하고, 무상교육을 실시함으로써 교육의 기회를 대거 확장했으며, 진정 창의적인 교육이 뿌리내릴 기반을 닦고자 했다.


내전 이후 피폐함에 시달리면서도 소비에트 공화국은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 역시 멈추지 않았다. ‘문화 검열’은 이 당시와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소비에트가 선출한 초대 교육인민위원이자 볼셰비키였던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를 비롯해 소비에트 정부의 초기 문화예술 정책 담당자들은 한편으로는 당시 혁명의 열기를 타고 유행하던 좌파 전위예술이나 현대예술가들을 지원한 것 못지않게, 이 예술가들이 공공연히 ‘반동적’이라고 비난했던 고전예술과 다양한 경향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보호하고 보급하며 “예술 활동을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옹호”하는 게 자신들의 임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물론 이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는 소비에트 공화국의 결말을 알고 있다. 혁명은 해방을 향한 풍성한 개혁이 첫발을 디딜 수 있도록 해주었지만, 이 노력들이 채 결실을 보기도 전에 체제는 변질되기 시작했다. 그 원인을 분석하고 비판적으로 평가함으로써 새로운 사회주의의 길을 정초하는 것은 오늘날 사회주의자들에게 피할 수 없는 숙제다. 그와 동시에, 사상 첫 사회주의 혁명을 만들어냈던 러시아 노동자민중과 볼셰비키의 열망, 그리고 그들이 온갖 질곡 속에서 만들고자 했던 새로운 질서의 단초들이 건넨 영감 역시 잊어선 안 될 것이다. 그렇기에, 1917년은 여전히 계급의 기억으로 복원해야 할 소중한 이정표다.



* 참고자료


- 마르셀 리브만(정민규 옮김), 『레닌의 혁명적 사회주의』, 풀무질, 2007.

- 오스카 안바일러(박경옥 옮김), 『노동자 농민 병사 소비에트』, 지양사, 1986.

- 하니 로젠버그(최광렬 옮김), 『소련 여성과 페레스트로이카』, 한울,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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