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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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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pixabay]



봉쇄,

교환이 중단된 세계와 

사용가치


사용가치 생산과 

계획경제(1)


홍석만┃참세상연구소



코로나 봉쇄, 

교환가치의 휴지기 

: 물신성의 한계


어느 날 갑자기, 변화된 세계에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텅 빈 거리, 닫힌 가게, 치솟은 사망자 수…. 유난히 맑은 하늘 아래 유례없는 일이 눈앞에 펼쳐졌다. 2월에는 국경이 통제됐고, 3월에는 통행‧이동을 제한하며 거리와 광장, 학교 그리고 시장이 봉쇄됐다. 코로나19는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날카롭고 깊은 경제 위축을 유발했다. ‘세계화’는 역행했고, 글로벌 공급사슬은 무너졌다. 무역은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했고, 여행 특히 해외여행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며칠 사이에 수천만 명의 노동자가 실업자가 되고, 수백만 개의 사업체가 직원, 고객, 공급자, 신용한도를 잃었다. GDP 감소는 시간이 갈수록 커졌고, 거의 모든 부문에서 정부에 구제 금융을 요청했다. 도소매 자영업자는 말할 것도 없고 증권, 철도, 항공사, 공항, 관광, 공연예술계, 대학도 파산 위기에 몰렸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봉쇄로 시장은 멈춰 섰고, 교환가치의 형성은 잠시 중단됐다.


시장에 기반한 교환이 더 이상 가치의 주요 척도가 되지 않을 때, 세계는 다르게 보인다. 코로나19 위기에서 시장은 안과 밖이 뒤집힌 모습으로 나타났다. 코로나 확산은 상품과 노동()을 화폐로 교환하는 것이 사람을 서로 지속적인 사회적 접촉으로 이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게 만들었다. 상품의 생산과 교환은 결국 사람들의 사회적 관계라는 사실이 두드러졌고, 이런 이유로 시장은 가능한 한 제한되거나 봉쇄되거나 디지털화해야 했다. 이제 ‘출근’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했다.


맑스는 자본주의에서의 가치 관계가 ‘인간 대 인간’이 아니라 ‘시장에서 교환되는 화폐와 상품에 의해 결정된다’며 이를 ‘물신숭배(fetishism)’라고 불렀다. 이러한 물신숭배는 상품 관계를 일종의 ‘신비로운 것’이라 의식하게 하고, 결과적으로 ‘물질적인 것이 인간보다 더 큰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게 하는 상황을 초래한다. 이로써 사람들은 주관적이고 추상적인 경제적 가치가 객관적이고 고유한 가치인 것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코로나 확산으로 많은 교환 영역이 중단됨에 따라, 이 물신성은 잠깐이지만 깨졌다. 봉쇄로 인해 인간과 함께 상품의 교환도 갇히면서, 이제 상품과 인간은 서로 비슷한 위치에 있게 됐다.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만이 가치 있는 게 아니라, 인간에게 필수적인 여러 숨은 가치(사용가치)들이 시장 외부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양한 가사‧돌봄노동, 창조적인 여가 활동, 광장, 커뮤니케이션, 깨끗한 공기 등 사람들은 상품 영역뿐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사용가치들을 느끼고, 생산하고, 교류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품 관계 내부에서도 화폐와 교환되는 교환가치보다 상품 자체의 사용가치가 더 부각되기도 했다. 가령, 값비싼 명품 옷보다도 두루마리 휴지 하나를 사기 위해 육탄전을 벌여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사용가치의 우위


코로나19 대유행과 봉쇄 속에서 이렇듯 사용가치가 사회적으로 부상하는 가운데 노동에 대한 가치평가도 다른 시각으로 볼 기회가 생겼다. ‘얼마나 이윤을 많이 남기는가’를 기준으로 하는 이윤에 따른 노동력 가치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필요한’ 일과 일자리에 대한 노동력 가치로 시각을 변화시킬 여지를 열어 줬다. 우리 사회에서 기본 생활에 필요한 필수재의 생산‧유통‧운송, 공공 설비의 유지‧관리, 의료와 방역 등 필수 서비스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그동안 존재감 없이 당연한 듯 존재해 오랫동안 노동력 가치조차 인정받지 못한 채 저임금에 시달렸다. 그러나 팬데믹은 이런 노동이 우리가 그간 경험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가치가 있다는 것을 확인시켰다. 또한 가사와 돌봄 등 ‘비경제적 노동’으로 취급받던 재생산 노동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도, 밖에 나가지 못해 짜증 난 아이들을 돌보느라 녹초가 되면서 알게 됐다.


비록 일시적이더라도, 코로나 봉쇄로 상품의 물신성이 깨지고 교환가치보다 사용가치의 우위가 부분적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이는 매우 특수한 봉쇄 상황에서 인위적으로 발생한 것이며, 사용가치의 우위가 드러났다고는 하지만 생활의 불편함이 이만저만 아니다. 이 상황이 유지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데, 사회의 생산이 이윤 축적을 전제로 한 상품생산 곧 교환가치 생산이 아니라, 사회적 필요에 따른 ‘사용가치’ 생산으로 전면적으로 전환되면 어떻게 될까? 가능할까? 봉쇄와는 달리, 불편함 없이 생산이 발전하고 노동에 대한 착취나 자연에 대한 수탈 없이 사회가 운영될 수 있을까? 이것이 가치론 측면에서 살펴볼 사회주의 생산체제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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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pixabay]



사용가치 생산경제


교환가치는 서로 다른 사용가치를 지닌 상품들의 교환비율로 표현된 가치다. 그 실체는 노동이며, 상품의 생산(또는 재생산)에 드는 사회적 필요노동시간만큼 가치가 응고돼 있다. 이 상품의 가치는 현상적으로는 평균이윤이 포함된 생산가격으로 나타난다.


반면, 사용가치는 생산물의 물리적 속성에 의해 주어지는 유용성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의 사용가치는 교환가치의 물적 담지자이기도 하다. 사용가치는 교환이 아니라 사용 또는 소비에 의해서만 실현된다.


교환가치가 아니라 사용가치를 생산하고 이용한다는 것은 두 가지 사실을 의미하는데, 우선 사용가치를 생산한 모든 노동은 생산적 노동이 된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서는 이윤(또는 잉여가치)을 생산하는 노동만을 ‘생산적 노동’이라 규정하고, 상품의 판매와 거래 등에 투여되는 노동은 잉여가치를 생산하지 않기에 ‘비생산적 노동’이라고 구분한다. 그러나 잉여가치가 아니라 사용가치 생산이 목적인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사회적 유용성을 창출하며 생산과정에 등장하는 모든 노동이 생산적 노동으로 전환된다.


이에 따라 사용가치 생산관계는 교환가치를 갖는 상품생산관계보다 훨씬 더 넓은 범위에서 가치를 규정한다.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만이 가치를 갖는 것에서 벗어나, 사회적으로 유용한 모든 노동생산물이 가치를 갖고 생산체계 내부로 들어온다.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이뤄진 (사회적 수요로 포함되는) 자가 노동, 가사‧돌봄노동 같은 재생산 노동 등 상품으로 거래되지 못했던 비자본주의 영역의 노동뿐만 아니라, 상품의 (일부) 유통‧판매‧거래 등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영역에 존재하지만 ‘비생산적 노동’이었던 노동이 가치생산 노동으로 전화한다. 의료‧교육‧환경 및 국가 부문의 비자본주의적 생산영역도 가치생산으로 포함된다(국가의 역할 중 일종의 사회적 공비로 취급되는 국방‧안전‧행정서비스가 가치생산영역인지는 별도의 판단이 필요하다). 이런 가치생산영역은 사회관계에 따라 구성된다. 가령, 기후위기가 심화하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 탄소 발생을 저지하거나 대체하는 (생산관계 내부로 들어온) 노동은 더 큰 사회적 효용을 낳고 더 큰 사용가치를 생산한다.



사회주의 경제의 

가능성 찾기


이러한 가치생산영역의 확대와 이전에 상품이 되지 못했던 것들이 사회적 생산물로 전환되는 것은 생산관계의 사회적 발전을 담보하는 것이다. 또한 생산과정에서의 착취는 물론이고 자연에 대한 수탈, 특히 재생산 노동을 생산관계에서 배제함으로써 여성에 대한 수탈을 불러온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비착취-비수탈적 생산체제로 전환함을 의미한다. 자본주의에서는 ‘노동 일반’의 절약이 아니라 ‘자본을 위한’ 필요노동의 절약(즉, 잉여노동의 증대)을 목적으로 기계를 사용하고 노동 강도를 강화함으로써 (가치)생산성을 확대한다. 반면, 사용가치 중심의 생산에서는 잉여가치 증대가 목적이 아니므로, 노동시간 일반을 절약하기 위해 기계가 사용되고 이에 따른 생산성 증대와 생활수준의 향상이 이뤄진다.


사용가치 생산 경제체제는 이처럼 자본주의 생산관계와 생산력의 한계를 뛰어넘으며, 기후위기와 지구적 물질대사의 균열을 가져온 자연 수탈적 경제구조를 ‘재생가능하고 친환경적인 생산체제’로 전환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사용가치 생산체제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소련 등 기존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교환을 배제하고 중앙계획당국의 계획에 따른 사용가치 생산을 진행했으나, 생산관계가 발전하기는커녕 관료적인 형태로 퇴보했다. 생산성이 발전하지도 않고 만성적인 공급부족에 시달렸으며, 특히 소비재 생산이 자본재 생산에 밀리면서 국민 생활수준은 나아지지 않았다.


사회주의에 관한 맑스나 엥겔스의 언급은 별로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매우 추상적이다. 이에 따라 사회주의의 상과 경제체제에 대해서는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수많은 논쟁이 있다. 나아가, 사회주의 경제 구성에서 핵심인 사용가치가 정확히 무엇이고 가치의 측정 또는 계산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도 있다. 1920~30년대 주로 오스트리아 경제학자들 중심으로 진행된 ‘사회주의 계산 논쟁’처럼 경제계획과 가치의 계산 및 생산자원의 적절한 분배를 이룰 방법에 대한 숱한 논쟁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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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Marxists Internet Archive]



사용가치와 추상노동


사용가치는 어떻게 측정하고 계산할까? 가령 볼펜의 사용가치와 물컵의 사용가치를 어떻게 헤아릴 것이며, 이질적인 두 노동을 어떻게 (비교 가능한) 균일한 추상노동으로 볼 수 있을까?


“사용가치로서의 상품은 무엇보다도 질적으로 구별되지만 교환가치로서의 상품은 오직 양적인 차이를 가질 뿐이고 따라서 거기에는 사용가치가 조금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만약 상품의 사용가치를 무시한다면, 거기에는 요직 하나의 속성, 즉 그것이 노동생산물이라는 속성만 남는다…. 따라서 노동의 상이한 구체적 형태도 사라진다. 이들 노동은 더 이상 서로 구별되지 않고 모두 동일한 종류의 노동, 즉 추상적인 인간노동으로 환원된다.”

- 『자본론』 제1권 제1장, 47쪽.


자본주의 생산양식 분석에서 맑스는 상품의 가치가 사용가치와 결합돼 있다고 하면서도, 이와 분리하고 사용가치를 무시한 교환가치만을 분석대상으로 삼았다. 이는 사용가치에 대한 일반적 무시라기보다는, 교환가치만을 살펴봄으로써 구체노동이 어떻게 추상노동이 되고 이를 통해 노동이 가치의 실체가 되는지, 그리고 노동시간이 가치의 기준이 되는지를 규명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 분석은 사회주의에서의 가치나 경제분석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사회주의에서 생산물의 가치는 사용가치이며, 맑스는 『자본론』이나 그 이전 저작에서도 사용가치에 대해선 거의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았다. 사회주의에 관해서도 추상적으로만 언급했을 뿐이다. 특히 사회주의에서도 가치법칙이 존재하는지, 존재한다면 자본주의에서와는 어떻게 다른지에 관한 문제는 여전히 논쟁적이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철폐된 뒤에도 사회적 생산이 유지되는 한, 가치규정은 다음과 같은 의미–즉 노동시간의 규제, 각종 생산분야로의 사회적 노동의 분배, 그리고 이것에 관한 부기가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여전히 지배적이다.”

- 『자본론』 제3권 제49장, 1035쪽


교환가치에서는 서로 다른 두 상품의 교환비율을 정할 수 있고, 상품생산에 투여된 추상노동의 양으로 비교와 교환이 가능하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상품의 가치와 교환가치는 추상노동을 통해 결정되는데, 이 추상노동은 일반적 이윤율의 존재와 이윤율 균등화 과정, 즉 자본주의적 생산과 경쟁을 통해 정규화‧동기화되고 상품과 화폐의 등가교환 속에서 동질화된다. 추상노동은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필연적 산물이며 가치의 실체이므로 추상노동시간이 가치의 기준으로 등장하고 상품의 가치량을 측정할 수 있다.


그런데 교환가치가 폐지된 사회주의에서, 여전히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산물인 가치(필요노동시간)를 그대로 규정하고 유지할 것인가? 사용가치의 실체가 노동이라 하더라도, 이것을 교환가치처럼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으로 측정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다. 전자는 구체노동이며, 후자는 추상노동이기 때문이다. 사용가치는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추상노동과는 전혀 다른 사회적 관계의 노동이기 때문에, 상품생산에 추상화된 노동시간으로 비교할 수 없다. 노동력의 가치 역시 재생산에 필요한 재화의 가치를 측정할 수 없기 때문에 계산할 수 없게 된다. 추상노동을 가치의 실체로 보더라도, 사회주의 사회는 자본주의와 달리 교환과 경쟁, 화폐와의 등가교환이 배제되며 일반이윤율이 형성되지 않고 이윤율 균등화도 이뤄지지 않는다. 이런 사회에서 추상화된 노동을 자본주의의 추상노동과 똑같다고 할 수도 없다.


이것은 실제 사회주의 경제를 수립할 때 중요한 문제로 떠오를 수밖에 없다. 만약 사용가치를 교환가치(=상품)의 실체인 추상노동량(사회적 필요노동시간)으로 환원한다면, 사용가치의 본질적 측면이 무시된다. 앞서도 강조했듯 자본주의 상품생산에 필요한 추상노동은 사용가치의 속성을 완전히 배제한다. 그래서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생산은 사용가치가 얼만큼 만족스럽게 사용되는지와 관계없이 생산량을 달성하는 문제로 치환됐다. 이처럼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추상화된 노동이나 노동시간을 가치 기준으로 삼는다면, (자본주의에서 교환가치의 양적 측면만을 고려한 것처럼) 사용가치의 양적 측면만을 고려하기 때문에 생산물의 사회적 효용 실현을 장담할 수 없게 된다. 교환가치 경제였다면 아예 교환되지 못해 상품가치를 갖지 못하는 노동이었을 수도 있지만, 사용가치 생산에서는 그렇지 않다. 생산물은 소비되고 가치량대로 가격이 매겨지지만, 사용가치의 질적인 측면 곧 효용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사용가치,

어떻게 측정하고 

계산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 ‘사회주의 경제의 사용가치 생산에서는 추상노동이 필요 없다’는 입장, 즉 ‘구체노동이라도 그 노동시간만큼만 계산하면 된다’는 입장과, 자본주의적 방식과는 다른 추상화, 곧 ‘사회주의적 추상화를 거쳐 노동을 균질화‧균일화할 수 있고 이것이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처럼 가치를 측정하는 노동시간으로 기능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이 갈린다.


먼저, ‘추상노동이 아닌 구체노동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주장은 과학이 아니라 신화에 가깝다. 구체노동은 양적‧질적으로 사람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에, 구체노동이 가치의 실체가 된다면 같은 시간에 생산에 들어가는 노동의 질과 양이 모두 다르다. 즉, 노동시간의 가치량이 상대적이라서 가치 기준을 확정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만약 구체노동이 가치의 실체가 된다면 누가 일을 제대로 할 것인가? 누구든 같은 노동시간만 들이면 어떤 상품이든 같은 가치를 담지한다고 간주하니, 제대로 된 제품을 만들고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애를 쓸 필요가 없다. 때문에 이런 주장을 내세우는 논자들은 대개 ‘무제한적 풍요를 보장할 정도로 생산력이 고도화했다’는 가정을 깔거나, ‘연대와 협동 정신’ 혹은 ‘사회주의적 인간형’ 같은 인간 본성에 호소한다. 일종의 ‘보이지 않는 손’ 같은 자동조절기능이 사회적 관계 변화에 따른 인간본성에 응축돼 있다는 주장이다.


다른 한편, 자본주의와 다른 ‘사회주의적 추상화’로서 현실에 존재했던 사례, 곧 중앙계획당국이 임의로 ‘설정’하던 가치(가격)를 살펴보자. 정확히 말하자면, 이는 ‘임의’라기보다는 ‘노동량’으로 측정한 가치였다. 실제로 소련에서는 광부노동처럼 물리적 노동량을 많이 지출하는 쪽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간호사 등 여성이 주로 맡는 일에 대해서는 ‘노동량과 에너지 소비량이 적다’는 이유로 더 적은 할당이 돌아갔다. 중앙계획당국에 의해 생산물의 가치가 ‘지시가격’으로 표시되는 것은 중앙계획당국에 의해 노동이 추상화됐음을 의미한다. 소련에서는 ‘생산자 도매가격’ 설정이 매우 중요했는데 이 가격에는 생산물마다 노동력 가치가 포함돼 있었으며, 중앙계획당국이 설정한 노동의 추상화를 노동시간 기준으로 가격으로 표시한 것이었다. 이런 형태의 추상화는 가치의 왜곡을 불러와 만성적인 공급부족과 인플레이션이 나타났으며 (자본주의적인 화폐가 없기 때문에) 부족한 물건을 사기 위한 긴 줄, 암거래, 주기적인 계획의 실패를 야기했다. 잘못된 추상화, 가치의 양적 측면만을 고려한 노동량(노동시간) 기준의 가치체계(이는 자본주의 교환가치와 같다)가 불러온 재앙이다.


교환가치의 측정을 위해서는 추상노동량의 양적 측면만 고려해도 되지만, 사용가치를 측정하려면 동일한 형태의 추상화 과정으로는 불가능하다. 또한, 사용가치의 본질인 ‘유용성과 효용’을 측정하고 계산하려면 양적 측면만이 아니라 질적 측면도 고려해야 하고, 이를 가능케 할 ‘사용가치 생산의 추상노동’을 밝혀야 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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