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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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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20.11.18 16:27

기획┃소비에트, 볼셰비키, 사회주의 혁명(下)


러시아 혁명의 좌절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백종성┃조직‧투쟁연대위원장



* 러시아 구력 기준 10월(신력 11월) 혁명이 발발한 지 103주년을 맞는 지금, 혁명 러시아와 소비에트, 볼셰비키를 둘러싼 평가는 여전히 극과 극으로 갈리지만, 한편으로는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거론조차 찾아보기 힘든 게 오늘날의 분위기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사회주의를 대중 앞에 내놓기 위해서라도 러시아 혁명의 경험을 우회할 수는 없다. 계급의 기억이 복원되길 바라며, <변혁정치>는 지난 116호와 이번 호에 걸쳐 “소비에트, 볼셰비키,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주제로 기획 기사를 싣는다. 지난 호에서는 혁명이 대중의 열망에 근거했음을 밝히고 어떤 변화를 추구했는지 살피며, 이번 호에서는 혁명의 왜곡과 실패 과정을 규명하면서 앞으로의 사회주의 운동에 러시아의 경험이 주는 교훈을 확인하고자 한다. 



내전의 참화


1917년 10월 혁명 후, 볼셰비키는 짜르체제로부터 물려받은 취약한 사회 토대 위에서 노동자 국가 건설에 착수했다. 혁명으로 4년간 이어진 독일과의 전쟁은 끝냈지만, 혁명 직후 3년간 적백내전(적군赤軍, 즉 ‘붉은 군대’로 대표되는 혁명세력과, 반혁명세력인 백군白軍 사이에 벌어진 내전)이 이어졌다. 1918년 말부터 1920년 말까지 전염병과 굶주림, 혹한으로 죽은 러시아인은 9백만 명에 달한다(1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 희생자는 약 4백만 명이었다). 내전 전 300만 명에 달하던 노동자는 58.7%나 감소해 이제 120만 명에 불과했다. 1921년 초 산업 생산성은 혁명 이전의 16% 이하로 떨어졌고, 농산물 생산 역시 혁명 이전의 50% 이하였다. 내전이 끝난 후 소비에트 러시아의 상황은 생산력 복원을 모든 것에 앞선 과제로 만들었다.


설상가상으로, 혁명 러시아가 그토록 기다리던 유럽 혁명은 1923년을 즈음해 패배로 귀결했다. 내전과 유럽 혁명의 패배라는 조건 속에, 소비에트 민주주의는 ‘생존’이라는 목표에 종속됐다. 혁명을 전복하려는 14개 제국주의 군대, 전제정 부활을 획책하는 백군과의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국가권력의 강제가 뒤따랐다. 공장 규율이 부활했고, 농민에 대한 강제징발이 행해졌으며, 공론장은 축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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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 러시아에 침략한 제국주의 열강 [사진: wikipedia]



“레닌은 혁명의 전망에 더 냉정한 평가를 내리면서 이제 러시아 노동자가 맞부딪친 핵심과제는 ‘일하는 법 배우기’라고 선언했다. 1918년 봄부터는 그는 각 기업을 한 사람이 관장하도록 만들자는 운동을 벌였는데, 이 요구는 노동자 자율경영의 요체를 뒤흔들어 놓았다. 1919년 내내 그는 기존의 집단협의체 경영체제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 내전이 끝날 즈음이 되면 1917년에 공장위원회가 일으켜 세운 민주적 형태의 공업경영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지만, 정부는 공업이 노동자 국가의 소유로 넘어왔으므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내전이 끝날 무렵이면, 1917년 10월에 완전히 가능했던 것처럼 소비에트에 다른 사회주의 정당의 대표가 있어야 한다거나 언론 자유가 ‘부르주아’ 간행물까지 넓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볼셰비키가 있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와 동시에, 언론탄압 정책이 강화되고 반대파가 제거되는 바람에 더 큰 공공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논쟁이 사라진 만큼, 당 자체가 정치갈등이 펼쳐지는 마당이 되었다.”*



스탈린 체제의 등장


내전을 거치며 소비에트 민주주의는 극심하게 위축됐다. 노동자 국가, 그 토대인 소비에트가 형화해한 것이다. 내전의 결과에 노동자 국가의 명운이 걸린 상황에서, 볼셰비키의 강제 조치에는 실제로 불가피한 면이 있었다. 이상적인 혁명이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은 자명하며, 피지배계급 또한 이를 알고 있다. 노동자들이 소비에트 정부를 지키기 위해 목숨 바쳐 나선 이유, 또한 농민들이 전시공산주의 체제 하에서 강제징발에 고통받으면서도 볼셰비키에 대한 지지를 거두지 않은 이유 역시 소비에트 권력이 붕괴할 경우 전제정이 부활하리라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교훈과 좌표를 얻고자 한다면, 볼셰비키가 취한 조치들을 모조리 불가피한 것으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 국가권력이 비대해지는 데 반해 아래로부터 만들어진 통제기구가 위축되어가는 상황은 분명한 흐름을 가진 것이었으며, 그 흐름은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서 규정한 ‘국가 사멸’의 정식과는 반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1921년 3월, 러시아 공산당 10차 대회는 당내 분파를 금지하는 레닌의 결의안 - <당의 단결에 관하여>를 의결한다. ‘모든 분파의 즉각적인 해산, 이에 따르지 않을 경우 즉각적인 출당’을 요지로 한 결의안의 문구 자체에 ‘일시적’이라는 단어는 없다. 맥락과 의도 상 1921년의 분파 금지가 일시적이건 그렇지 않건, 분파 금지는 심대한 오류였다. 1921년의 결정은 당내 분파의 항구적 금지로 이어졌다. 1924년, 스탈린은 레닌 사후 당내 논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레닌주의의 기초』를 펴내 ‘분파의 존재와 양립할 수 없는 의지의 통일체’로 당을 정의했으며, 분파 금지를 일반원리로 승격시켰다(이탈리아 혁명가 그람시조차 분파 금지를 일반원칙으로 주장할 정도였다).


당의 일반원리로서 분파를 금지한다면, 분파 금지 전에 존재하던 분파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또한 10월 혁명까지 있어온 그 많은 당내 논쟁은 무엇이란 말인가? 자유로운 논쟁의 권리, 필요하다면 분파를 만들 권리를 박탈한 결과는 참혹했다. 논쟁은 엄청난 용기를 요구하는 일이 되었고, 숙청당한 인물들에게는 모두 ‘분파주의자’, ‘반(反)레닌주의자’, ‘반혁명분자’라는 딱지가 붙었다.


신실한 스탈린주의자들은 트로츠키파와 좌익반대파 숙청(1924-25),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를 포함한 통합반대파 숙청(1926-27), 부하린‧리코프‧톰스키 등 당내 우파 숙청(1929)은 물론이고 1937-38년까지의 대숙청마저 불가피하거나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모리스 메를로-퐁티 같은 철학자는 ‘의도가 어떠하건, 혁명이 포위된 상황에서 이견을 가진 분파의 존재 자체가 결과적으로 반혁명’이라는 논리로 스탈린 체제와 대숙청을 합리화하기도 했다. 물론 이와 같은 논리, 곧 ‘체제 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논리는 (군부 쿠데타의 수괴) 피노체트도, 전두환도 사용할 수 있다.



지상과제, 

‘사회주의 조국방위’


스탈린이 1924년부터 내건 ‘일국 사회주의론’(일국一國, 즉 러시아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의 승리가 가능하다는 것)은 유럽 혁명의 침체라는 조건에 힘입어 승리했다. 또한 일국 사회주의론의 승리는 사회주의 조국, 곧 소련에 대한 방어를 소련 민중은 물론 각국 공산당의 지상과제로 만들었다. 이는 국제주의와의 명백한 단절이었다. 이제 ‘러시아 노동계급의 승리를 위해서는 세계혁명의 승리가 필요하다’는 상식적 주장은 ‘위대한 조국을 믿지 못하는 비겁함’으로 치부되었다. 러시아 내에서는 대(大)러시아 민족주의가 ‘프롤레타리아에게는 조국이 없다’는 국제주의를 대체했다.


“우리는 선진국보다 50년에서 100년은 뒤처져 있다. 10년 안에 이 격차를 좁혀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저들이 우리를 밟아 으깰 것이다”라는 스탈린의 말이 드러내듯, 스탈린 체제의 ‘사회주의’는 곧 ‘자본주의보다 우월한 생산력’의 확보를 뜻했다. 자본주의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국가’의 건설이 최우선 과제가 됐고, 생산력 발전을 위한 민족주의적 동원체제가 구축됐다. 강제집산화가 시행됐고, 스타하노프(엄청난 생산성을 보여준 소련의 광부) 같은 ‘노동영웅’이 만들어졌으며, 인민은 그 노동영웅을 따라 배울 것을 요구받았다. ‘사회주의는 생산력의 발전’이므로, 인민의 의무는 생산력 발전을 위한 나사못이 되는 것에 불과했다. 레닌이 기각했던 제2 인터내셔널의 기계론적 유물론이 다시 부활해 공식 교의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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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탈린 체제에서 생산성을 높인 '노동 영웅'으로 칭송받은 스타하노프 [사진: wikipedia]



소련의 생존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목표가 된 순간, 소련의 외교‧안보정책이 제3 인터내셔널(코민테른: 각국 공산당의 연합체)을 지배하게 된 것은 당연한 순리였다. 각국 공산당은 소련의 방침에 따라 때로는 사민당을 적으로 규정하고 타도할 것을, 때로는 자본가들과도 협력할 것을 요구받았다. 각국 혁명운동의 발전이 아니라 소련의 유지에 세계혁명운동이 종속된 것이다. 1939년 소련과 나치 독일의 불가침조약 체결은, 1914년 독일 사민당이 전쟁공채 발행에 찬성한 사건과 마찬가지로 국제 사회주의운동에 충격적인 일이었다. 레닌이 제2 인터내셔널 파산을 선언한 계기는 독일 사민당의 민족주의에 대한 굴복이었다. 그 민족주의는 스탈린주의 코민테른의 상수였다.



우선 

가감 없이 들여다보자


“당은 결코 잘못할 수 없어. 자네와 나는 실수할 수 있어. 그러나 당은 아니네. 동지, 당은 자네나 나, 그리고 자네나 나 같은 수천 명 이상의 존재야. 당은 역사에 나타나는 혁명적 사상의 구현체지. 역사는 망설임과 주저를 모른다네. 완만하지만 과오 없이 자기 목표를 향해 흘러갈 뿐이지. 역사는 지나는 경로의 모든 굴곡에 그것이 실어 나르는 진흙과 익사자의 시체를 남기네. 역사는 자기 길을 알고 있고, 결코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아. 역사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갖지 못한 자는 당원이 아니야.”


대숙청 시기 부하린에 대한 재판을 소재로 한 아서 쾨슬러의 소설 『한낮의 어둠』에서, 주인공 ‘루바쇼프’는 감옥에 갇힌 채 한 청년 당원과의 대화를 회상한다. ‘당은 틀릴 수 없다’고 역설했던 그는, 당의 방침에 따라 모든 ‘반혁명 범죄’를 인정하고 처형되기를 택한다.


일부 사회주의자에게 『한낮의 어둠』이 그려낸 소련의 단면은 그저 ‘반공주의 선전’에 불과하겠지만, 우리에게는 혁명의 과정을 합리화하거나 포장할 필요가 없다. 단지 러시아 노동계급은 자신이 택한 상황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주어진, 물려받은 상황에서’ 자신의 역사를 만들었다는 것을 직시해야 할 뿐이다. 다시 전면화하는 자본주의의 위기 앞에 사회주의를 대안으로 세우기 위해, 우선 가감 없이 역사를 들여다봐야 한다. 어차피 모든 운동은 ‘있는 것’과 ‘있어야 할 것’ 사이에 존재하는 좁은 길을 찾아가는 것 아닌가.



* 스티브 스미스(류한수 옮김), 『러시아 혁명: 1917년에서 네프까지』, 박종철출판사, 2007, 95쪽 및 8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