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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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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

숙명론과 경험론

모두를 거부한

혁명의 독수리

 

- 독일 사회민주주의자 4: 급진주의자들 2

 

 

이재유┃서울

 

 

* 이 글은 <변혁정치> 120호(2021년 1월 15일 자) 기사 “로자 룩셈부르크, 대중의 자발성과 사회주의 혁명의 길”에서 이어집니다.

 

 

 

대중파업

: 자발성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시공간

 

룩셈부르크가 강조한 (대중의) ‘자발성’은 보편성과 총체성의 근간인 ‘타자의 타자성’(어떤 하나의 동일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것)을 지향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보편‧총체적인 자기 자신을 생산해내고자 하는 자유의지에 기초했다. 이에 따라 룩셈부르크는 자발성이 러시아의 모든 대중파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말한다. 자발성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무지’했다는 것(경험론적 측면)도 아니고, ‘혁명이 어느 누구에게 그들(프롤레타리아)에 대한 훈계권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합리론적 측면)도 아님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발성은 지도력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다만 그 지도력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창조적’이어야 함을 뜻한다. 룩셈부르크는 이러한 ‘창조적 지도력’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새로운 상황에 맞게: 인용자] 슬로건을 제공하고 투쟁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 투쟁의 모든 국면과 계기에서 프롤레타리아의 해방된 실질적 힘과 모든 유용한 잠재력이 실현될 수 있고 당의 투쟁 역량 속에서 그 위치를 드러내도록 할 수 있는 투쟁 전략을 조직화하는 것, 그리고 사회민주주의의 단호하고도 날카로운 전략이 실제적인 역학 관계 이상으로 전개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 등이 대중파업 기간에 ‘리더십’이 수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업이다.”1

 

 

한편, 룩셈부르크는 노동조합의 권위와 당의 권위가 ‘동등하다’는 주장을 공격했다. 룩셈부르크는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인식론적 측면에서 헤겔변증법이 반영론적 계기(경험론적 계기)를 가지고 있음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듯한데, 그는 ‘노조와 당의 권위가 동등하다’는 경험론적 견해를 비판하고 있다. 룩셈부르크에게 노동조합은 시공간적으로 한정된 특수한 현상적인 것임에 반해, 당은 이러저러한 특수하고 현상적인 것들을 총체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통일시키고 구성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노동조합 운동은 그 지도자들과 동일시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을 지지하는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의식 속에 있는 그 어떤 것과’ 동일시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향후 독일에서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이 분리되는 계기가 됐다.

 

1906년에 이르러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대중파업의 개념에 역공을 가하기 시작했다. 독일 사회민주당 만하임 당대회(룩셈부르크의 <대중파업론>이라는 소책자는 바로 이 대회를 겨냥한 것이다)에서는 (카우츠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이 당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위치에 있으며, 어떠한 대중파업도 노동조합의 동의(그 가능성은 희박했음) 없이는 시작될 수 없음’을 명확히 했다. 노동조합의 완고한 세력에 의해 수정주의가 또다시 도입된 것이다.

 

 

 

룩셈부르크와 제국주의

- 맑스에 대한 룩셈부르크의 주요 비판과 반(反)비판

 

당대는 1차 세계대전(1914~18)을 앞두고 제국주의가 이미 본격화한 때였다. 룩셈부르크는 제국주의를 분석하며 맑스의 정치경제학 연구에 비판을 제기하게 된다. 곧 ‘맑스가 제시한 자본의 확대재생산 모델에서는 기술적 변화가 도입됐을 때 그에 따른 잉여생산이 폐쇄체제 내에서 어떻게 흡수될 수 있는가에 대해 아무런 설명이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룩셈부르크는 폐쇄체제의 개념을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잉여가치의 현금화는 잉여가치를 노동자나 자본가에게 판매함으로써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비(非)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가진 사회조직이나 사회계층(식민지)에 판매함으로써 가능할 수 있다.”2

 

이와 관련해 룩셈부르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식민지 팽창과 제국주의 건설은 자국 내 농업을 파괴하고 군국주의를 공고화한다. 자본주의는 착취될 수 있는 전(前)자본주의적 사회가 존재하는 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가진다. 전자본주의적 사회들이 모두 자본주의적 축적 과정 속으로 흡수‧병합되면 자본주의는 붕괴에 직면하게 된다.’

 

하지만 위와 같은 비판은 경제에 관한 룩셈부르크의 기술론적 명제의 오류이며, 맑스에 대한 비판은 잘못된 방향으로 전개됐다. 특히 자본주의 붕괴 과정을 자동적이고 결정론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오류를 범했다. 레닌은 룩셈부르크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레닌주의자들은 룩셈부르크의 ‘자발성’과 이에 기초한 ‘자본주의 자동붕괴론(결정론)’에 대해 엄청난 비판을 가하게 된다.

 

 

 

룩셈부르크의 의미

 

① 현실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고자 노력했다.

맑스주의 이론가 죄르지 루카치는 자신의 책 『역사와 계급의식』 속에 들어 있는 논문 <맑스주의자로서 로자 룩셈부르크>에서 룩셈부르크가 ‘현실을 전체로서’ 움켜잡을 수 있었기 때문에 제2 인터내셔널의 맑스 후계자들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룩셈부르크는 현실을 △객관적 법칙에 지배되어 운명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측면과 △개별적으로 도덕적인 노력을 통해 변화시킬 수 있는 측면의 양자로 분리하는 도식에 빠지지 않았다.

 

② 룩셈부르크는 객관주의에 매몰되지 않았다.

“인간이 그들의 역사를 마음대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역사를 스스로 이루어 나간다. 프롤레타리아는 그 행동이 사회 발전의 성숙 정도에 따라 제한되어 있다. 그러나 사회 발전은 프롤레타리아와 무관하게 진행되지는 않는다. 프롤레타리아는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며 원인임과 동시에 사회 발전의 산물이며 결과다. 프롤레타리아의 행동은 역사의 결정적 요인이다. 그리고 인간이 자기 자신의 그림자를 뛰어넘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발전을 가속하거나 지연시킬 수 있다.”

 

③ 룩셈부르크는 주관주의(자발성의 신화)에 매몰되지 않았다.

룩셈부르크는 이론적 분석과 혁명적 실천 사이의 관계를 변증법적으로 관계시키고 있다. 『자본 축적론』에서 그가 역동적인 세계 자본주의 경제를 하나의 전체로서 파악하려 시도한 때에도 룩셈부르크는 과학적이고 분석적인 관점을 시종 견지하면서, 동시에 그 궁극적인 목표를 실천에 두었다.

 

 

 

독일 사회민주당의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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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 등 독일 사회주의 급진파는 사회민주당 정부의 진압 속에 살해당했다. 위 그림은 케테 콜비츠의 <칼 리프크네히트를 추모하며>. 

 

 

앞서 언급했듯 1906년 이후 독일 사회민주당 집행부의 묵인 아래 보수적인 노동조합 지도부의 영향력이 증대하면서, 룩셈부르크 같은 급진주의자들은 외곽으로 밀려났다. 1910년 선거법 개정을 둘러싸고 일어난 파업과 소요의 급진적 물결은 카우츠키와 룩셈부르크 사이에 분열을 낳았다. 이에 관해 룩셈부르크는 대중파업을 탐탁지 않게 여긴 당의 지도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정당 내에서 모든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운동은 몇 안 되는 소수의 당 지도자 주도하에 시작돼야 하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 당원의 결단과 확신에서 비롯해야 한다. 투표권을 쟁취하려는 현재의 투쟁을 대중파업을 포함해 ‘어떠한 수단에 의해서든지’ 전개해나가자는 결정은 당내 광범한 집단에 의해 채택될 수 있다.”3

 

하지만 1912년 선거운동에서 사회민주당이 부르주아 정당들과 최대한의 연합전선을 펴기로 함에 따라 수정주의자들의 최종적 승리가 이뤄졌다. 그 결과 독일 사회민주당 의원단은 칼 리프크네히트(룩셈부르크와 마찬가지로 급진주의자였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1914년 전쟁 공채 발행에 찬성함으로써 제국주의 전쟁을 개시하는 데 손을 들어주었고, 군국주의와 전쟁, 식민주의에 대해서도 긍정적 입장을 취했다. 1917년 초 좌익 급진주의자들을 통칭하는 ‘스파르타쿠스 단’(고대 로마에서 노예 반란을 이끌었던 인물 스파르타쿠스에서 이름을 땄음)과 당 노선에 반대하는 중립 당원들이 사회민주당에서 추방됐다. 이들은 1919년 1월 1일 독일 공산당을 결성하게 된다.

 

당시 급진주의자들(스파르타쿠스 단)의 입장은 룩셈부르크의 저서 <이것이냐 저것이냐, 모두 다>에서 크게 3가지로 잘 나타난다. ① 전쟁에 대한 무조건 반대: 전쟁을 자본가계급 사이에서 빚어진 제국주의적 결과로 파악했다. ② 국제주의를 강조했다. ③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대중파업에 의존했다. 이때 ‘대중파업에 대한 의존’이 가진 의미는 ‘레닌의 볼셰비키 당에 대한 긍정과 비판’이었다.

 

* 긍정: “레닌의 당은 진실로 혁명적인 당이 지녀야 할 강령과 의무를 갖춘 유일한 정당이다. ‘모든 권력을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손으로’라는 기치 아래 그들은 혁명으로의 지속적인 전진을 밀고 나갔다. 그렇게 함으로써 볼셰비키는 악령처럼 계속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을 괴롭혀온 이른바 ‘대다수 인민의 지지를 획득한다’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4

 

* 비판: “아무리 그 숫자가 많더라도,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이나 혹은 어느 한 정당의 당원에게만 보장되는 자유는 전혀 자유라고 할 수 없다. 자유란 항상 그리고 오로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을 위한 자유인 것이다. 이는 ‘정의’가 어떤 열광적인 개념이기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 자유에 있어서 순수하고, 유익하며, 진실한 모든 것이 바로 이와 같이 본질적인 특성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레닌은 그가 채택한 수단에 있어서 완전히 잘못을 범하고 있다. 법령, 공장, 감독관의 명령과 강제, 무시무시한 형벌, 폭력에 의한 통치 이러한 모든 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사회를 재생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공공생활에 대한 훈련과 함께 거의 무제한적이고 광범한 민주주의와 공공여론을 보장하는 것이다. 폭력에 의한 통치는 사기를 꺾어 놓을 뿐이다.”5

 

1919년 1월 초,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에서는 대규모 가두시위와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하지만 이는 당시 집권세력이 된 사회민주당 정부에 의해 며칠 만에 진압됐다. 그런데 이 봉기는 스파르타쿠스 단원들이 일으킨 것도 아니고, 이들의 통제를 받는 것도 아니었으며, 이들의 목표에 동의하는 봉기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봉기의 진압으로 독일 사회민주당 정부는 급진적 좌익을 분쇄할 수 있었고, 결국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가 살해당했다. 그리하여 독일 사회주의는 결과적으로 볼셰비키화된 독일 공산당(합리주의적 경향) 및 독일 사회민주당(경험주의적 경향)으로 분극화되어 갔고, 이후 맑스주의의 유산을 점차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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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파르타쿠스 단 민병대. [사진: wikipedia]

 

 

 

 

 

1 R. Luxemburg, “Mass Strike, Party and Trade Unions”, ed. R. Looker, Selected Political Writings, London, 1972, p. 231.

 

 

2 R. Luxemburg, The Accumulation of Capital, London, 1971, pp. 351f. 중요한 부분은 제26장.

 

 

3 R. Luxemburg, “The Next Step”, Selected Political Writings, p. 159.

 

 

4 R. Luxemburg, “The Russian Revolution”, ed. B. Wolfe, Ann Arbor, 1961, p. 38.

 

 

 

 

5 같은 책, p. 69f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