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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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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21.02.21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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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혜경

집행위원장

 

 

“꿈이자 숙제, 사회주의”

 

 

 

# 2021년, 변혁당이 안고 있는 과제는 엄중하다. 위력적인 계급투쟁의 기억은 점차 쇠락하는데, 사회주의 세력은 좀처럼 대중 앞에 가시적인 대안으로 서지 못하고 있다. ‘사회주의 대중화’를 천명한 지 1년이 지난 지금, 당 스스로의 평가 역시 낙관하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그 속에서도 당은 나아가야 한다. 이 가운데 지난 1월 30일 변혁당 6차 총회는 새 지도부를 선출했다. 만만치 않은 조건에서 무거운 역할을 결의하기까지, 길게는 사회주의운동을 결심하고 지난 20여 년의 정치조직 활동을 이어오는 동안 어떤 고민과 곡절이 있었는지 듣고자 했다. 장혜경 변혁당 신임 집행위원장을 <변혁정치>가 만났다.

 

 

 

처음엔 멋있어서

시작했는데…

 

고등학생 때까지 줄곧 ‘모범생’으로 살았던 혜경 씨는 1984년 대학 새내기가 되면서 모종의 ‘해방감’을 느꼈다. 전두환 정권 시절에 ‘해방감’이라니 형용모순인 것 같지만, 엄혹했던 만큼 더 꽃을 피웠던 캠퍼스의 저항 문화 덕분이었다.

 

“저는 집에서 막내였어요. 형제들은 이미 대학생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독재 정권이 나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죠. 그러다 대학에 들어갔는데, 요새는 ‘동아리’라고 하지만 예전에는 ‘써클’이라고 불렀거든요. 입학식 다음 날인가 신입생 대상으로 써클 오리엔테이션을 하는데, 그중에 ‘탈반’이 있었어요. 길놀이를 하는 곳이었는데, 맨 앞에서 꽹과리 치는 선배의 휘날리는 머리카락이 너무 멋있는 거예요.(웃음) 입학하고 일주일도 안 돼서 그렇게 써클 문을 두드렸죠. 선배들이 매일 술 사주고, 고등학생 때까지는 접하지 못했던 문화와 분위기를 마주하게 되니 해방감을 만끽했죠. 그런데 당시에는 운동권 써클이 많았고, ‘탈반’도 그 중 대표적인 곳이었어요.”

 

우연찮게 들어간 ‘탈반’에서 혜경 씨는 일주일에 1~2번씩 진행된 학습에 참여했다. 그러면서 지난 20여 년간 배웠던 게 ‘거짓’이었음을 조금씩 알게 됐다. 무엇보다 학내에서 1980년 광주민중항쟁 사진전이 열렸을 때, 그 처참한 모습을 보며 “피가 거꾸로 솟는 분노”를 느꼈다. 그렇게 혜경 씨는 학생운동에 발을 내디뎠다. 처음엔 ‘반(反)독재-민주화’를 위해서였다. 그러다 ‘자본주의 자체가 문제다’라는 생각을 하도록 일깨워준 책을 만났다. <자본주의 경제의 구조와 발전>이었다.

 

“당시에는 맑스주의 원전이 국내에 거의 들어오지 않는 상황이었어요. 주로 일본에서 나온 책을 번역본으로 봤죠. <자본주의 경제의 구조와 발전>도 일본 사람이 <자본론>을 압축해서 쓴 책이었는데, 그걸 보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착취’라는 개념을 알게 됐고, ‘전두환 정권 타도 수준이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느끼게 됐죠. 그때부터 ‘사회주의가 대안’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벅차오름과 견디기의 연속

 

대학 4학년이던 1987년, 6월 항쟁에 이어 7월부터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졌다. “드디어 노동계급이 일어났구나” 실감하면서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벅차오름”을 느꼈다. 혜경 씨가 살던 안양에서도 인근 공장 지붕에 노동자들이 올라가 플래카드를 펼치며 시위를 벌이는 모습을 봤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은 암울한 시기에 신념을 지킬 수 있게 해준 버팀목이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학생운동을 마치고 노동 현장에 진입하는 게 ‘운동의 코스’였기에, 자연스레 노동 현장에 들어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1989년부터 현실 사회주의권이 무너져 내렸다. 운동에 뛰어들었던 수많은 이들이 신념과 지향을 잃고 떠났다. 당장 혜경 씨 주변에서도 많은 사람이 이때 운동을 정리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버텼다.

 

“현실 사회주의권은 붕괴했지만, 한국에서는 노동자 대투쟁 이후 민주노조운동이 급성장하면서 노동계급이 역사의 전면에 섰다는 게 보일 때였어요. 자본주의 체제가 지속하는 한 노동계급의 투쟁은 언제나 존재할 수밖에 없고, 그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버티기에 들어갔죠.”

 

하지만 ‘버티기’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학생운동을 마치고 노동 현장으로 이전한 뒤 혜경 씨는 본격적으로 정치조직에 가입해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얄궂게도 공권력의 침탈(이 때문에 당시 조직의 지도부가 많이 잡혀갔다)과 현실 사회주의권 붕괴 등 연이은 사태가 겹치면서 소속된 정치조직이 사실상 체계를 잃고 와해됐다. “전국노련”(전국노동단체연합)이라는 노동운동단체에서 일하긴 했지만, 어떤 정파나 써클에도 속하지 못한 채 몇 년을 보냈다. “마치 고아 같은 처지”라고 느꼈다.

 

힘겨운 때였다. 그러던 가운데 IMF 위기 직전이던 1996년 말, 김영삼 정부와 여당(신한국당, 현 국민의힘)이 정리해고제와 파견근로제 도입 등을 골자로 한 노동법 개악을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이에 분노한 노동자들이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총파업을 일으키니, 바로 96-97 노개투(노동법 개악 저지 투쟁) 총파업이었다.

 

“개별적인 임금‧단체협약 문제가 아니라 단일한 요구로 민주노조운동이 전국 총파업을 조직한 거였고, 각계각층이 총파업 투쟁 지지대열에 합류했죠. 1987년 이후 불과 10년 만에 노동계급이 정치적으로 전진하면서 투쟁의 선진부대이자 전위로 서는 과정을 보게 된 거예요. 그야말로 가장 기억에 남는 계급투쟁이었죠.”

 

96-97 총파업을 거치며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운동진영의 제1 과제로 떠올랐다. 제도적으로 두드러진 흐름은 민주노동당 건설이었다. 하지만 민주노동당 노선에 반대하며 그와 별도의 좌파 결집 흐름도 형성됐다. 그 결과, 1999년 “노동자의 힘”(약칭 ‘노힘’)이 만들어졌다. 현실 사회주의권이 붕괴하고 소속된 정치조직도 와해된 이후, 노동단체 활동을 이어오면서도 ‘이것만으로는 부족한데, 정치조직이 새롭게 세워져야 하는데’라는 문제의식을 계속 품고 있던 혜경 씨에게는 감격의 순간이었다.

 

“노힘 창립총회 때 눈물을 흘렸어요. 앞서도 말했지만, 정치적 고아 상태로 몇 년을 보내다가 드디어 의회주의 세력이 아닌 변혁적 정치운동을 기치로 한 조직이 생긴 거니까요. 새롭게 정치운동을 할 수 있겠다는 기대와 포부에 벅차올랐던 거죠.”

 

 

 

사회주의 대중화,

고민 많았지만

되돌려선 안 돼

 

1999년 노힘에 함께한 이후 지금의 변혁당에 이르기까지 혜경 씨는 정치조직 활동을 쭉 이어왔다. 특히 2016년 변혁당 창당 이후로는 2019~20년 정책위원장을 거쳐 지난 1월 30일 6차 총회를 통해 신임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됐다. 하지만 변혁당을 둘러싼 내외 조건은 결코 만만치 않다. 지난 2020년 변혁당이 천명한 ‘사회주의 대중화’ 사업이 기대만큼 진척되지 못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가운데, 내년 초 대선이라는 중대한 정치적 계기가 다가오고 있다. 이 와중에 당 집행위원장을 맡기로 결정하는 데까지 이런저런 고민이 많았을 수밖에 없다.

 

“사실 지난 2020년 총회에서 사회주의 대중화 사업을 결정했을 때부터 여러 고민이 들었어요. 일단 이 사업의 정치적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충분한 설명이나 토론을 거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우리 당과 당원 활동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에 대해 서로 공감대가 충분치 않은 점이 있었고. 또 다른 고민은 현실성 문제였죠. 2022년까지 제3지대에서 사회주의 대중정당 등록한다는 게 과연 가능할 수 있을까 하는. 그런데 한편으로는 저 스스로도 이 사업을 논의하는 과정에 충분히 제 생각과 대안적 입장을 제시하면서 임하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혜경 씨는 그렇다고 사회주의 대중화 사업을 되돌릴 수는 없다고 말했다. 사회주의를 정치적 대안으로 분명하게 내세우면서 명실상부한 대중정당을 건설할 수 있도록 당활동을 혁신하고, 진행 중인 투쟁에 대한 연대‧결합을 넘어 당이 선도적으로 기획하는 의제 중심 투쟁을 건설함으로써 대중 앞에 사회주의를 ‘가능한 선택지’로 만들고 이 사회에서 정치적 시민권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 역시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다. 혜경 씨가 진단하는 당의 상황은 낙관적이지만은 않았다. 그럼에도 집행위원장으로 나선 이유가 있었다.

 

“사회주의를 전면적으로 선전선동하는 데 부담감을 느끼는 당원들도 있죠. 다른 한편으로는 그 필요성에 적극 동의하면서도, 방법을 찾지 못해 갑갑해 하는 동지들도 있고요. 많은 활동가와 대중을 사회주의 정당이라는 틀로 어떻게 모아낼지에 대한 세부적인 조직화 기획도 취약하죠. 그래서 일종의 과도기라고 봐요. 답답함과 조급함이 섞인 과도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사회주의 대중화 사업을 천명하고 한발 내디딘 것 자체가 성과라고 생각해요. 올해와 내년에 걸쳐 대선을 계기로 이를 실질화하는 게 가장 중요한 과제고, 그걸 올해 진전시켜야겠다는 생각으로 집행위원장 역할을 결의하게 된 거죠.”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당원들의 적극적인 정치토론이다. 지난 <변혁정치> 121호 “변혁정치가 만난 사람” 인터뷰에서 김태연 변혁당 전 대표도 지적한 대목이지만, 혜경 씨도 “당내 정치토론이 너무 위축됐다”는 문제의식을 제기했다.

 

“설령 결과적으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더라도 최선을 다할 수 있으려면 당원들의 능동성과 주체성을 높여내면서 치열하게 토론하고, 우리가 함께 결정한 것의 정치적 함의가 무엇인지 공유하는 과정이 필요해요. 그게 올해의 목표이고도 하고요. 당 중앙부터 평당원에 이르기까지 정말 치열하게 토론하고 소통하고 공유하면서 우리를 어떻게 혁신해나갈지가 정말 중요한 문제라고 판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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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혁당 6차 총회에서 새로운 지도부로 선출된 장혜경 동지(왼쪽)와 이종회 동지(오른쪽).

 

 

 

정치운동에서의 아쉬움

 

올해 집행위원장 직을 맡기까지 오랜 시간 정치조직 활동을 이어온 만큼, 혜경 씨 스스로의 운동을 돌아보며 아쉬운 점 역시 있었다. 당내 여러 동지들이 거론하기도 하는 문제, 즉 젊은 세대 활동가들이 조직의 지도부를 구성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역량을 강화하는 구조를 만들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역량’은 학습일 수도 있고, 사업 기획과 집행 능력일 수도 있고, 정치운동이나 당 운동에 임하는 자세일 수도 있겠죠. 그런데 비단 변혁당 뿐만 아니라 과거 노힘 시절부터 젊은 활동가들이 정치적 지도부로 설 수 있게 하는 구조를 만들지 못한 것 같아요. 물론 생물학적 나이가 중요치는 않겠지만, 조직이 계속 이런 상태이다 보니 지도부를 맡겠다고 자임하는 동지들이 많지 않죠. 당내에서 ‘내가 나서겠다’ 이런 패기와 움직임을 어떻게 형성할 수 있을지, 지금도 고민이에요. 현재 당에 공식적인 분파는 없지만, 꼭 그런 게 아니라도 당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당원들이 그룹으로 모여서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이런 게 건강하다고 봐요. 하지만 그런 움직임이 잘 보이지 않는 게 아쉽죠.”

 

다른 한편으로는 노힘 때부터 이어진 ‘정치조직과 현장활동가조직 사이의 문제’를 꼽았다. 좌파 현장활동가들을 정치조직이 아닌 ‘현장활동가조직’으로 규합하면서, 결과적으로 전투적 조합주의를 강화한 반면 사회주의 정치운동으로의 연결을 이뤄내지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노동운동 내 다른 정파와는 다르게, 좌파는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현장에서 분명하게 내세우지 못하고 있어요. 그게 ‘사회주의를 내거는 데 대한 부담’으로 표현되기도 하고요. 이 점에 대해 근본적인 자기 검토와 대안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현장투쟁을 강조하는 건 필요하지만, 그게 그 자체로 당 건설은 아니라는 거죠. 돌이켜 보면 80년대 이후 한국 사회주의운동 또는 변혁운동은 투쟁성과 계급성을 강조하긴 했지만, 다른 정파에 비하면 정치조직과 나아가 당을 만들고 자신의 정치성을 부각하는 기획과 구상이 너무 취약했어요. 이런 면에서 볼 때 현장활동가조직이라는 틀이 현장의 좌파 활동가들로 하여금 당 운동으로 적극 뛰어드는 데 하나의 장벽으로 작용했다고 봐요.”

 

 

 

대중 앞에 우리를

드러내야 한다

 

당이 사회주의 대중화 사업을 천명했지만, 실제 당원들이 각자의 현장과 영역에서 사회주의를 선전선동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편견부터 무관심까지, 여러 장벽에 부닥칠 수밖에 없다. 혜경 씨도 스스로 사회주의자라는 정체성을 밝히거나 주변 동지들에게 사회주의 운동에 함께하자고 제안했을 때 종종 난점에 부닥치기도 했다.

 

“일단 국가보안법 문제가 있죠. ‘사회주의운동에 참여하면 국가보안법으로 탄압받는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사회주의’ 하면 곧장 ‘북한’을 떠올리는 문제도 있어요.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주의를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이상향’으로 간주하기도 하죠. 이는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 문제와도 밀접히 연관돼 있고요. 사회주의 운동에 대해 사람들이 느끼는 거부감이나 거리감은 이렇게 굉장히 다층적이에요. 20세기 사회주의 운동의 세계사적 패배, 게다가 한국은 전쟁도 거친 데다 북한의 존재가 여전히 남아 있고, 국가보안법이라는 탄압 문제도 있는 거죠.”

 

이 문제를 마법처럼 해결해줄 방법은 없다. 폐허 위에서 새롭게 사회주의 운동을 만들어 가는 일이 쉬울 리 만무하다. 그런 만큼 사회주의를 대중화하겠다는 우리에게 이 난국을 총체적으로 돌파할 구상이 필요하다는 게 혜경 씨의 생각이다. 특히 ‘현실 사회주의가 왜 실패했고 우리는 그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을지’에 대해 엄밀히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사회주의가 그저 ‘뜬구름 같은 얘기’가 아님을 입증하려면 실제 각자의 삶과 사회주의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구체적인 주장과 운동을 만들어가야 한다. 사회주의 세력이 소수인 상황에서 정치적 탄압이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대중 앞에 사회주의를 정치적 대안세력으로 세우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사회주의’라는 단어를 반복하는 것 자체가 사회주의 대중화는 아니라고 봐요. 사회주의당이 당면 정세의 주요 이슈와 계급투쟁 사안에 관해 사회주의적 내용을 담은 자기 목소리를 내고 투쟁을 조직하고 활동한다는 것을 대중의 눈앞에 드러내는 게 사회주의 대중화라고 생각해요. 그런 과정을 지난하게 밟을 수밖에 없죠. 또, 그런 점에서 이런 활동과 연동해서 대중정당이라는 틀이 중요하다고 봐요. 내용적으로뿐만 아니라 형식적인 면에서도 우리를 드러내는 거죠.”

 

 

마지막으로 ‘스스로에게 사회주의란?’이라는 질문에 혜경 씨는 “꿈이자 숙제”라고 답했다. 정말 이루고 싶은 꿈이기도 하거니와, 다른 한편으로는 20세기 사회주의의 패배를 딛고 어떤 사회주의를 어떻게 건설할 수 있을지의 문제와 관련해 모든 사회주의자가 안고 있는 숙제라는 것이다. 그와 더불어 “매너리즘을 타파하고, 당원 하나하나가 사회주의자임을 숨기지 않으면서 당 활동과 정치활동의 주체로 나서자”는 메시지를 전했다. <변혁정치> 독자들에게도 “구독을 넘어 사회주의 운동에 함께 뛰어들자”는 제안 역시 빼놓지 않았다.

 

 

■ 인터뷰 = 기관지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