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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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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으로부터

중립적인 정치는 없다

 

자본주의 사회와 계급 정치

 

 

남구현┃경기

 

 

* ‘모든 혁명의 근본 문제는 국가권력의 문제’라고 했던가. 자본주의가 아닌 새로운 권력을 만들겠다고 하는 사회주의자들에게 ‘자본주의 국가/권력은 왜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으며 사회주의 대안 권력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제시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다. 지난 118호를 시작으로 월 1회 연재하는 “국가×변혁×정치” 꼭지에서는 현실 정치의 이슈를 맑스주의적으로 바라보고, 자본주의 국가/권력이 뒤집어쓴 각종 허상을 벗겨내면서 새로운 권력, 사회주의 정치의 원리와 상을 짚어보고자 한다.

 

 

항쟁과 수구의 귀환,

국가의 계급성

 

지난 첫 연재에서 국가에 대한 맑스주의의 고전적 규정, 즉 ‘자본주의 국가는 부르주아지의 위원회’라는 언명을 거론한 바 있다(<변혁정치> 118호(2020년 12월 1일 자) 기사 “국가와 계급 그리고 노동자 정치” 참고). 그 이후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새로운 변화들이 나타났다. 노동자의 보통선거권 쟁취로부터 시작해 이른바 ‘민주적 법치국가’의 면모를 갖추고 ‘복지국가‧사회국가’로 발전하면서 자본주의 국가는 ‘전체 국민의 보편적 이해를 대변하는 개입국가’로서 계급으로 균열된 사회로부터 ‘중립적’이라는 외양을 취할 수 있었다. 하여 1970년대 벌어진 국가론 논쟁은 주로 ‘정치의 경제로부터의 (상대적) 자율성’ 또는 ‘국가의 사회로부터의 특수화’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하지만 1980년대(한국에서는 90년대) 이래 신자유주의가 전면화하고 2000년대 초반 이후 지구적 자본주의 위기를 거치면서 사회‧정치 양극화가 심화된 지금, 국가의 계급적 성격은 오히려 더욱 두드러진다.

 

가령 최근 한국의 사정을 보면, 조국 사태와 주요 인사들의 부동산 투기 및 성추행 논란을 거쳐 정권 말기에 이르면서 개혁은 무망한 일이 됐다. ‘촛불의 힘으로 사회 전반을 개혁하겠다’고 표방한 것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한 대차대조표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노동 존중 사회’를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최저임금과 노동시간 관련 제도를 개악하고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후퇴시키는 등, 각종 개혁정치가 실종되고 노동개악만 남았던 노무현 정부의 역사가 데자뷰처럼 지나간다. 물론 그 이전 김대중 정부에서도 ‘재벌 개혁’은 ‘재벌 간 빅딜’로 끝났고, 오히려 대규모 정리해고 등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전면화했다.

 

민중의 항쟁, 새로운 정권의 등장, 개혁 실패, 수구세력의 재등장이 반복되는 역사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해방 이후의 역사를 보면, 4.19혁명 이후 민주당이 집권했으나 독재 청산‧사회개혁‧남북문제 등에서 혁명적 열기를 수렴하지 못하다가 5.16쿠데타로 끝장이 났고, 1980년 ‘서울의 봄’ 열기는 3김(김대중‧김영삼‧김종필)의 대선 정치로 수렴되며 군부의 반격을 가져와 결국 광주항쟁을 거쳐 군부 독재로 되돌아갔다. 1987년 민주항쟁과 노동자대투쟁 이후에도 대안 정치세력이 등장하지 못하면서 양김의 대권 경쟁과 노태우 집권으로 이어졌다.

 

 

 

1848년 프랑스 이야기

계급 간 정치 대립의 근대적 원형

 

이렇듯 역사를 진전시키려는 흐름과 되돌리려는 흐름이 충돌하면서 이제까지 역사는 나선형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 속에서 각 계급과 그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정치세력은 국가권력을 둘러싼 밀고 밀리는 쟁투를 벌인다. 이 점에서 이번 글은 특히 프랑스 혁명사(봉건적 구질서가 무너지면서 근대 자본주의 체제가 들어서는 시기)에 주목하고자 하는데, 이 역사적 경험이 근대 이후 새로이 등장한 계급들의 정치와 국가형태를 원형적인 모습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당시 다양한 계급이 봉기-내전-혁명-반혁명을 반복하며 대립했고, 이 과정에서 제국‧공화국‧노동자 국가 등 다양한 형태의 국가가 등장했다.

 

먼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국민의회가 권력을 잡으면서 공화국을 선포하고 절대왕정을 종식했으나(제1공화국),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제정을 세웠다(제1제정. 나폴레옹은 뒤이은 유럽 전쟁에서 패하며 몰락했지만, 대혁명 이전의 부르봉 왕가가 돌아오며 프랑스는 왕정으로 복고했다). 이후 공화주의자들이 일으킨 1832년 6월 봉기는 실패로 끝났고(이는 빅토르 위고가 쓴 『레미제라블』의 배경이 됐다), 1848년 2월 혁명으로 다시 공화정이 수립됐다(제2공화국). 하지만 곧이어 대통령으로 선출된 나폴레옹 3세가 쿠데타를 일으켜 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되면서 제정으로 복귀하게 된다(제2제정). 그러다 제정 말기 프랑스가 당시 흥기하던 프로이센(현재의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정부가 무너지면서 1871년 노동자 혁명으로 파리코뮌의 노동자 국가(부르주아 정부가 베르사유로 도망친 뒤 선거를 통해 수립됐다)가 세워졌지만, 부르주아 정부가 이를 학살로 무너뜨리는 역사적 과정을 거쳐 1875년에 다시 제3공화국이 들어섰다.

 

이 가운데 1848년 2월 혁명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적 균열과 국가 권력을 둘러싼 각 계급의 정치가 드러나고, 1871년 파리코뮌에서는 노동자 국가의 권력 형태를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주로 1848년 2월 혁명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며, 파리코뮌에 대해서는 향후 연재에서 사회주의 국가를 다루며 다시 소개하겠다.*

 

1848년 2월 혁명 당시는 프랑스 대혁명 이래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양대 계급이 등장하면서 왕정으로 역사를 되돌리려 하던 구 지배계급과 대립하는 시기였다. 크게 보아 대체로 4개의 계급 정파가 쟁패를 겨뤘다.

 

① 왕당파는 금융귀족(은행가, 대부르주아지, 대지주 등 부르주아지의 분파)의 정파로 구질서에서 배타적 지배권을 갖고 있었고, 군주제를 지지했으나 2월 혁명 이후 소수 정파로 국민의회에 참여했다.

 

② 공화파는 산업 부르주아지와 자유주의 지식인 일부로 구성됐으며, 의회 공화국을 지지했다. 1851년 12월 2일 의회를 통한 부르주아지 지배가 끝나고 나폴레옹 3세의 제정이 수립될 때까지 2월 혁명의 정치 무대를 주도했다.

 

③ 민주파는 쁘띠 부르주아지 또는 소시민의 정파로서 민주 공화국을 주장했고, 정치권력에서 배제되어 있었으므로 보통선거권을 혁명적(!)으로 주창했다.

 

④ 사회주의-공산주의자들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정파로, 사회 공화국의 구호를 상징했다.

 

맑스는 1848년 2월 혁명으로 왕정을 무너뜨리고 건설된 제2공화국이 보나파르트(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를 거쳐 제2제정으로 바뀌는 역사적 과정 속에 각 계급의 정치적 대응을 분석하면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소시민-민주주의 정당의 부속물처럼 보였고, 민주주의 정당은 부르주아-공화주의자들에 기대고 있고, 공화주의자들은 왕당파들이 주도하는 질서당의 무장력에 기대는 우스꽝스러운 꼴이어서 혁명이 하강하며 패퇴하는 길을 걸었다’고 지적했다. 파리의 노동자들은 2월 혁명으로 들어선 부르주아 정부의 미온적 태도에 불만을 품고 1848년 6월 봉기에 나서는데, 이 봉기가 유혈진압으로 실패하면서 다른 모든 계급의 공격을 받은 프롤레타리아트는 일단 무대에서 사라진다. 그 후 보나파르트가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공화파가 약화되고, 보통선거권이 폐지되면서 민주파가 무력화된다. 이어 부르주아 공화국의 기초였던 의회권력도 행정권력에 의해 무력화되면서, 결국 보나파르트가 쿠데타로 황제에 등극해 다시 제정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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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48년 혁명 당시 파리에서 바리케이드를 지키던 모습. [사진: wikipedia]

 

 

 

계급의 차이, 정치의 차이

 

이런 역사적 경험의 의미는 무엇일지 생각해 보자.

 

자본주의 사회는 계급 사회이고, 다양한 계급의 이해로 사회는 균열되어 있으며, 이는 정치적 대립으로 표현된다. 예나 지금이나 대체로 3대 계급이 대별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① 자본가계급은 왕과 봉건 귀족의 손에서 권력을 쟁취해 자본주의적 착취와 최대한의 이윤을 보장하는 정치체제인 공화국을 건설하려 했으며, 고전적 자유주의의 이상에 따라 ‘보편적 기본권’과 의회 민주주의를 내세운다. 물론 현실에서는 사유재산제가 모든 법‧제도 위에서 초헌법적 위상을 점하며, 이윤 극대화 원칙은 다른 모든 이해관계에 우선한다. 자본주의적 생산과 재생산은 항상적인 모순과 주기적인 위기 속에 진행되므로, 정치‧사회적인 모든 영역에서 그들의 이상은 그대로 실현된 적이 없다. 가령 1848년 2월 혁명 이후 그들은 노동자들의 투쟁을 사실상 계엄 상태의 무력으로 제압했으며, 이후 보통선거권은 철회됐다. 부르주아지가 주도권을 쥔 의회가 무력화되며 제정으로 돌아갔을 때, 역설적으로 ‘제정은 그들에게 적합한 형태의 국가’였다. 한국에서도 부르주아지의 일부 정치세력은 군부 독재에 저항하며 민주화 투쟁에 참여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재벌을 중심으로 군부 독재의 비호 아래 성장했고 지난 촛불항쟁을 불러일으킨 소위 국정농단의 주축을 이뤘다.

 

② 중간계급은 재산에 따라 참정권을 제한했던 자본주의 초기 이래 보통선거권을 중심으로 민주주의 확대를 요구했다. 이들은 자본가계급과 노동계급 사이에서 정치적으로 동요한다. 1848년 2월 혁명에 뒤이은 노동자들의 6월 봉기에 대해 중간계급은 여타 계급과 함께 프롤레타리아트를 탄압하는 대열에 동참했으나, 이후 1871년 파리코뮌에서는 그 일부가 혁명적 노동계급의 나팔수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민주화 투쟁은 학생‧지식인 등 중간계급이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압제자들을 무너뜨린 민중항쟁은 노동자‧농민‧빈민 등 기층 민중과 진보적 중간계급이 결합하며 승리할 수 있었다. 문제는 소위 민주화 이후다. 권력에 다가선 운동권 출신들은 이제 부르주아지로 상승하려는 그들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게 됐다. 단적으로 청와대 인사들은 부동산 투기 문제로 1가구 1주택이 강요되자 일괄 사퇴하거나 ‘똘똘한 강남 아파트 한 채’만 남기는 ‘센스’를 발휘했다. ‘10억 원 정도는 투자할 수 있는 것 아니냐’며 불법 의혹을 받는 주식투기를 옹호하기도 했다. 물론 수백 채의 집을 가진 자나 수백 수천억, 아니 수조 원의 주식을 보유한 자산가와 비교하면 ‘소’시민이지만, 국민 다수가 최저임금에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고, 평생 모아 집 한 채 구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에서 스스로 자신들의 계급적 속성을 드러낸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정체였다.’

 

③ 노동계급은 임금노동관계를 매개로 자본의 지배 아래 생산을 담당하면서 착취당하는 계급이며, 당장의 생계 문제가 일단 최대의 관건이다. 따라서 노동조건 개선과 임금 인상, 실업대책 등이 가능한 사회공화국을 요구했다. 1848년 6월 봉기의 원인은 실업대책으로서 기초급여가 가능했던 작업장을 폐지하기로 한 정부의 결정이었고, 경제적 이해관계가 그 이유였다. 그러나 1871년 파리코뮌에서는 당장의 경제적 이해를 넘어 공장을 직접 운영하거나 평의회를 기초로 한 노동자 국가를 구성하는 정도로까지 발전했다. 노동의 문제를 노동자 각자의 문제에서 계급의 문제로 바라보고, 타 계급과의 역관계 속에서 정치적으로 대응해 국가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사회 전체를 운영하는 주체로 올라선 것이다.

 

 

 

 

 

* “프랑스 혁명 3부작”으로 알려진 맑스의 저작을 참고하라. 1848년 2월 혁명에 대해서는 “1848년에서 1850년까지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Die Klassenkämpfe in Frankreich 1848 bis 1850, MEW 7)과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Der achtzehnte Brumaire des Louis Bonaparte, MEW 8), 파리 코뮌에 대해서는 “프랑스 내전”(Der Bürgerkrieg in Frankreich, MEW 17)을 참고할 것. 국내 번역본으로는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박종철출판사(전 6권) 제2권과 4권 혹은 『프랑스 혁명사 3부작』, 소나무, 2017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