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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굴레 딛고

항쟁을 변화시키는

미얀마 노동계급에 연대를!

 

 

이종회┃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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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데타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는 미얀마 시민들. [사진: wikipedia]

 

최근 미얀마 관련 소식을 자주 접하게 된다. 한국에서 일하는 미얀마 이주노동자들의 시위, 미얀마 현지에 진출한 한국 자본의 노동자 탄압, 로힝야족 학살, 끊이지 않는 군부 쿠데타와 노동자민중에 대한 유혈 진압, 최루가스를 포함한 한국 무기의 수출 등등…. 미얀마를 짓누르는 지난 역사의 굴레는 무겁다. 다른 한편으로, 어지럽던 지난 역사의 끝자락에서 주체로 거듭나고 있는 미얀마 노동자민중은 새로운 발돋움으로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크고 작은 여러 민족이 어깨를 겨뤘던 미얀마는 19세기부터 오랫동안 식민통치를 겪었다. 1824년부터 1885년까지 영국(당시 이미 인도를 점령하고 있었다)과의 3차례에 걸친 큰 전투 끝에 패하면서 영국령 인도에 편입됐고, 1937년에 분리되어 영국의 직할 식민지가 됐다. 그러다 2차 세계대전 와중인 1942년에는 이 지역에서 영국을 밀어낸 일본의 지배가 시작됐다. ‘서구에 맞선 아시아주의’ 혹은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운 일본의 식민지배는 미얀마 내부 민족 간의 정치적 지형을 바꿔놓았다. 일본은 반(反)서양-친(親)일본 조직체 형성을 지원했고, 이 전쟁에서 추축국(독일-이탈리아-일본)과 싸우던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영국은 인도 국경지대의 카렌족 같은 소수민족을 조직해 반(反)일본 전선을 구축하고자 했다. 그렇게 반일 전선에 섰던 소수민족들은 일본은 물론이고 일본의 지원으로 조직을 구축했던 미얀마 독립군에게도 공격받게 됐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미얀마가 독립하면서 영국은 독립을 원했던 카렌족을 비롯한 몽족, 그리고 (몇 년 전부터 미얀마 군부의 학살로 이슈가 된) 로힝야족 같은 소수민족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떠났다. 영국 총리 애틀리와의 협상으로 독립을 약속받은 아웅산은 소수민족과 함께 힘 모아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자고 제안하며 ‘팡롱 조약’을 체결했지만, 미얀마 내 소수민족 전체를 포괄하지는 않았다.

 

 

버마족(미얀마 인구의 70%를 차지하는 민족)과는 언어‧문화‧전통도 다르고 영국의 식민지배 아래 기독교로의 개종이 늘어났던 카렌족은 미얀마에서 박해 대상이 됐다. 이에 미얀마 독립 이후 카렌족은 오히려 미얀마 정부를 상대로 “카렌민족동맹” 같은 무장조직을 건설하며 분리독립투쟁을 벌였다. 무장투쟁이 한계에 다다르자 1976년 이후부터는 분리독립을 포기하고 자치권을 요구했지만, 많은 카렌족 인구가 난민이 돼 떠돌고, 미얀마 내에서는 노예 수준의 강제노동에 시달린다. 세계적 이슈로 떠오른 로힝야족 역시 카렌족과 마찬가지로 미얀마 소수민족 박해의 대표 사례다. 군부의 로힝야족 학살에 대해서는 노벨평화상을 받았던 아웅산 수치조차 외면했다.

 

 

하지만 미얀마의 역사가 애초부터 군부독재와 참혹한 학살을 노정했던 건 아니었다. 식민지배 시절부터 치열하게 전개된 대중투쟁의 경험도 있었다. 가령 1930년 세계를 휩쓴 대공황으로 쌀 수출경제가 흔들리자 3년간 농민들이 항쟁으로 들고 일어선 “사야산 반란”이 벌어졌고, 이는 기존의 엘리트 중심 민족주의를 넘어 독립운동이 계급적 사회주의운동으로 전화하는 계기가 됐다. 한편, 1942년 일본은 아시아에서 서구 열강과 경쟁하며 자신의 지배권을 확장하는 전쟁의 일환으로 아웅산의 “30인의 동지”로 뭉친 버마독립의용군을 지원해 양곤(미얀마의 옛 수도)을 점령한다. 여기에서 국방대신 아웅산은 ‘미얀마 국민군’이라는 준정치‧군사세력을 확보하게 된다. 이는 일본이 아시아에서 반서양-친일본 대중조직체를 형성하고자 고무한 결과이지만, 이후 일본이 흔들리면서 ‘반(反)파시스트 인민자유동맹’으로 전화하고 공산주의운동의 영향력이 확대됐다.

 

 

1945년 2차 대전이 끝나자 아웅산과 영국 총리 애틀리가 합의하면서 1948년 1월 4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미얀마 연방”이 수립된다. 하지만 이후 선거에서 공산주의 진영이 몰락하고 아웅산이 독립 직전 암살당하면서 정치적 긴장은 높아졌다. 급기야 1962년 3월 “30인의 동지” 일원이었던 네윈 장군이 쿠데타로 집권, ‘마르크스주의와 불교적 가치를 접목’한다며 이른바 ‘미얀마식 사회주의’를 천명했다. 그러나 이는 ‘사회주의’라는 이름을 내건 군부독재였으며, 1988년 대규모 민주화 운동인 “8888항쟁”(1988년 8월 8일 시위에서 딴 이름) 등 ‘랑군(양곤)의 봄’으로 네윈이 사퇴했던 잠깐의 기간을 제외하면 군부 집권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군부의 유혈 진압으로 3천여 명이 숨지고 1만여 명이 실종됐다는 ‘랑군의 봄’과 8888항쟁, 그로부터 20년 뒤인 2007년 민주화를 요구하며 벌어진 ‘샤프란 혁명’ 등 미얀마 노동자민중의 저항은 계속됐다. 특히 올 2월 발생한 군부 쿠데타에 맞선 항쟁은 의료‧공무원‧철도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서는 등 계급적 진전을 보이고 있다. 그간 봉쇄됐던 노동조합 활동이 분출하는 가운데, 여태껏 저임금을 강요하는 자본에 맞서 투쟁과 파업으로 단련된 노동자들의 조직력은 항쟁의 성격을 변화시키고 있다. 노동자가 정치의 주체로 서고 있다는 점에서 여느 때와 사뭇 다르다.

 

 

2차 대전 이후 무너졌던 계급적 단결과 각성은 이렇듯 오늘날 미얀마 항쟁 과정에서 다시 만들어지고 있다. 경찰과 군인의 무차별 사격과 폭력, 연행이 이어지면서 5월 광주의 잔영이 아른거리고,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딜 갔지…”라는 ‘5월의 노래’가 입안에 맴돈다. 1987년 민중항쟁과 노동자대투쟁으로 새로운 계급적 주체가 거듭나는 바탕이 됐던 1980년 ‘서울의 봄’과 광주민중항쟁의 데자뷔를 본다. 국적을 넘어선 노동자민중 연대의 출발점이 될, 계급의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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