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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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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변혁정치> 지난 122호(“부르주아들과 함께 하는 해방은 없다(1)”)에서 이어지는 기사입니다.

 

 

 

부르주아들과 함께 하는

해방은 없다(2)

 

 

<소개하는 책>

조지 오웰(정영목 옮김), 『카탈로니아 찬가』, 민음사, 2001.

 

 

이주용┃기관지위원장

 

 

 

‘우익에 맞서려면 진보적 부르주아지 혹은 자본가 세력과도 연합해야 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늘날에도 횡행하는 이 명제는 산술적으로 그럴듯해 보이지만(‘아군을 늘려 적을 포위한다’는 식의 논리), 실상 뿌리 깊은 모순을 내포한다. 적대적 이해관계를 지닌 두 계급(노동계급과 자본가계급)을 하나의 울타리로 묶어두기 위해 ‘상대방을 놀라게 하면 안 된다’며 양보의 강제가 필연적으로 발생하는데, 이는 특히 (피지배계급과의 ‘연대’보다는 우익과 함께하는 게 계급적으로 더 이익인) 부르주아지를 안심시키려 공들이며 노동계급의 욕구를 억제하도록 하는 ‘명분’이 된다. 절대적 다수자임에도 불구하고 착취당하던 노동계급 대중은 자신을 억압한 그 부르주아 지배체제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그간 억눌린 불만과 분노의 표출을 또다시 제어당하며, 이로써 우익에 맞선 대중투쟁의 원동력은 점차 감퇴한다. 게다가 ‘진보’ 운운하던 자들이 도리어 노동계급의 불만을 순치하려는 행태에 대중의 환멸은 심화하고, 이 가운데 일부는 극우세력이 성장하는 자양분이 되기도 한다. 결국 아군을 패퇴시키고 적을 북돋는 꼴이다.

 

 

 

스탈린주의 소련과 인민전선

 

지난 호에서 언급했듯, 스페인 내전(1936~39)은 이러한 노선 문제를 전형적으로 드러냈다. 노동계급과 하층 농민의 급진적 행동(봉기, 산업시설 집산화, 토지 접수 등)이 이어지는 가운데 파시스트 군부 쿠데타가 벌어지자, “인민전선”이라 불린 계급 연합 정부(부르주아 공화파 + 사회민주주의‧공산주의‧무정부주의 세력)는 ‘반(反)파시즘’이라는 미명하에 대중의 혁명적 진출을 가로막으려 했다. 물론 아래로부터의 운동을 ‘부르주아 민주주의 수호’에 가둘 게 아니라 노동계급의 권력 장악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믿었던 사회주의 세력도 있었다. 카탈로니아를 비롯해 노동계급이 실질적 통제권을 확보한 지역에서는 대중의 힘으로 새로운 권력의 맹아가 자라나기도 했다. 조지 오웰이 동료 의용군과 함께 목숨 걸고 싸우며 지키려 한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하지만 계급 연합 노선은 강력한 물리적 뒷배를 갖고 있었다. ‘인민전선’은 스페인에서만이 아니라 당시 스탈린주의 소련의 지도 아래 세계 각지 공산당 차원에서 전개한 정치방침이었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파시스트 권력이 공고하게 자리 잡으며 1930년대 중반에 이르러 또 한 번의 세계대전이 벌어지리라는 긴장이 감돌자, 소련은 다른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과 동맹을 맺는 방식으로 자신을 방어하려 했다. 이를 위해 이들 국가의 지배자들이 ‘혁명에 대한 불안’을 느끼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야 했고, 이는 각국 공산당으로 하여금 혁명운동이 아니라 자국 정부에 대한 협력에 충실하도록 하는 결과를 낳았다(가령, 인민전선 노선을 ‘선도적으로’ 견지했던 프랑스공산당은 이때 자국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이 분출하자 “파업을 끝낼 때를 알아야 한다”며 노동계급을 제어하는 데 열중했다).

 

이렇듯 사회주의 정체성을 최대한 탈각하려 한 데에는 파시스트 국가들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목적도 있었다. 예컨대 스탈린은 1936년 12월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의 수상 라르고 카바예로(사회민주주의 정당인 “스페인 사회노동당” 좌파 출신)에게 보낸 편지에서 부르주아 공화파를 끌어들여 긴밀히 협조할 것을 주문했는데, 그래야 “스페인의 적이 스페인을 공산주의적 공화국으로 여기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공산당의 자기 부정 혹은 ‘은폐’에도 불구하고,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스페인 군부에 물질적‧군사적 지원을 계속하며 결국 쿠데타를 성공시켰다. 반면, 영국‧프랑스 등 그 어느 서구 열강도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를 돕지 않았다.

 

비극은 이뿐만 아니었다. 앞서 거론했듯 소련은 다른 국가들의 눈초리를 의식하며 혁명운동을 억제하는 행보를 이어가면서도, 스페인까지 파시스트가 장악하면 향후 판도가 더욱 불리해진다는 판단에 따라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에 군수물자를 제공하고 군사고문단을 파견했다. 이에 따라 스페인에 대한 소련과 스탈린주의 공산당의 영향력은 대폭 강화됐는데, 이들은 때마침 소련에서 본격화하던 대숙청을 내전 와중인 스페인에서 고스란히 재현하며 파시즘에 맞서 싸우던 다른 사회주의 세력을 도륙하는 참극을 일으킨다. 오웰은 그 현장 한가운데서 이 처절한 모습을 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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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 내전에서 파시스트에 맞서 싸운 사람들. [사진: wikipedia]

 

 

 

내전 와중의 숙청,

노동계급 지배의 파괴

 

1937년 4월 말, 조지 오웰은 의용군으로 전선에 투입된 지 4개월여 만에 부대 임무 교대로 후방인 바르셀로나에 돌아왔다. 하지만 1936년 12월 이곳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느꼈던 혁명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이제 물결은 뒤로 밀려났다.… 노동계급의 지배를 보여주는 외적인 표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전쟁 초기 몇 주 동안 노동조합원들이 의용군을 형성하여 파시스트들을 사라고사[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 중간에 위치한 도시: 인용자]로 쫓아버렸던 것은 그들이 노동계급의 지배를 위하여 싸운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지배라는 대의는 사라져버린 게 분명해졌다.… 노동자 순찰대는 해산을 명령받았고 전쟁 전의 경찰이 다시 거리에 나타났다.… 모든 것이 부유한 계급 위주로 재편되었다….”

- 『카탈로니아 찬가』 146, 148, 151~152쪽

(※ 이하 별도 제목 없이 괄호로 표기한 쪽수는 모두 이 책.)

 

 

내전 초기만 하더라도 통제력을 갖추지 못한 채 정파별 의용군에 의존하며 노동계급의 자기 통치를 일정하게 허용할 수밖에 없었던 인민전선 정부는 이제 소련의 지원을 바탕으로 기존 질서를 다시 회복하려 했다. 노동계급 혁명의 열기는 계급 연합 노선의 지배 속에 점차 질식되고 있었다. 사회주의라는 기치 하나로 전선에 뛰어들었던 의용군은 도리어 배척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위계적 ‘정규군’이 그 지위를 장악해갔으며, 노동자 자치조직은 부르주아 정부에 권력을 다시 내놓으라는 압력을 받았다.

 

급기야 1937년 5월, 정부 측은 바르셀로나에서 비(非)공산당 사회주의 세력(오웰이 의용군으로 참가했던 “마르크스주의 통일노동자당(POUM)”이 그 대표적인 조직이었다)과 무정부주의자들에 대한 무력 침탈을 단행했다(‘5월 사태’). 이들의 자체 무장을 해제하고 의용군을 정규군에 편입시킨다는 게 명분이었지만, 사태는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시작에 불과했다. 곧이어 POUM에는 ‘트로츠키주의’이자 ‘파시스트 첩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POUM 지도부는 물론이고 이 당의 의용군에 소속돼 싸웠던 해외 인사들까지 줄줄이 체포‧감금되거나 실종, 혹은 암살됐다. 노동계급의 지배는 파괴당했다. 인민전선 정부에 대한 소련의 지원은 스탈린주의 노선에 반대하는 사회주의‧좌파 세력에 대한 잔혹한 숙청을 동반한 것이었다.

 

“러시아 군사 고문관은 공화국 지역의 정치에 뻔뻔스럽게 끼어들면서 스페인 사람들에게 더 독재적으로 굴었다.… 1937년 2월에 ECCI[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인용자] 의장단은 스페인공산당에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노동자의 당원에서 반역의 ‘파시즘의 간첩’인 트로츠키주의자에 대한 ‘완전하고 최종적인 분쇄’는 승리에 꼭 필요한 조건이었다.” 그 결과는 1937년 5월에 카탈로니아에서 [벌어진: 인용자] 스페인 마르크스주의 통일노동자당과 아나키스트에 대한 잔인한 공격이었다.”**

 

POUM 소속 의용군으로 앞서 언급했듯 얄궂게도 이 당시 마침 바르셀로나에 갓 돌아왔던 조지 오웰은 숙청과 탄압의 한복판에 서게 됐다. 여태껏 파시스트 군대에 맞서 싸웠고, 바르셀로나 5월 사태가 벌어진 그 순간에도 최전선에서 피 흘리며 저항하던 이들에 대해 게거품을 물며 ‘파시스트 첩자’라고 몰아붙여 짓밟는 행태를 목도한 오웰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카탈로니아 찬가』 후반부에서 상당히 긴 하나의 챕터를 통째로 할애해 스탈린주의자들의 비방을 구구절절 논박한다. 그리고 오웰은 이렇게 덧붙였다:

 

 

“공산주의자들과 그들보다 더 좌익인-또는 그렇다고 주장하는-사람들 사이에는 정말로 차이가 있다. 공산주의자들은 자본가계급 일부와 동맹(인민전선)을 맺음으로써 파시즘을 물리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반대자들은 이런 공작이 파시즘의 새로운 온상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이 문제는 해결되어야 한다.… 그러나 <트로츠키-파시스트!>라는 고함 외에 아무런 주장도 나오지 않는다면, 논의는 시작도 할 수 없다.” (230~2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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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전 말기, 폭격당하는 바르셀로나. [사진: wikipedia]

 

 

배반당한 혁명

 

5월 사태 직후 오웰은 다시 전선으로 돌아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목에 총상을 입고 후송됐다. 그러나 POUM이 불법화되고 그 소속 의용군인 오웰 자신도 수배당하게 된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탈출을 감행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스탈린주의 세력의 추적을 피해 외딴곳에 몸을 숨기고 잠을 청하며 겨우겨우 빠져나갈 방도를 찾은 끝에 구사일생으로 국경을 넘으며 그는 비통한 심경을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여섯 달 전만 해도 프롤레타리아처럼 보여야 존경을 받을 수 있었다.… 이제는 반대가 되었다. 부르주아처럼 보이는 것만이 살길이었다.… 지난 12월, 사람들이 아직 혁명을 믿고 있던 시절의 바르셀로나를 찾은 아침의 맑고 차가운 빛, 병영 연병장에서 쿵쿵거리는 군홧발 소리.… 전선에서 만났지만 이제는 어디로 흩어졌는지 모르는 사람들. 일부는 전사하고, 일부는 불구가 되고, 일부는 투옥되었겠지. 바라건대 그들 모두가 여전히 안전하기를. 그들 모두에게 행운이 있기를.” (291, 294쪽)

 

 

오웰이 영국에 돌아와 『카탈로니아 찬가』를 집필하고 발표한 시점은 아직 스페인 내전이 끝나기 전이었다. 그는 스탈린주의를 향한 분노와 혁명의 쇠락에 대한 비애를 담으면서도, 자신의 판단이 틀리고 인민전선 정부가 내전에서 승리하길 바란다는 마지막 희망 역시 놓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가 보여준바, 스페인 내전은 1939년 카탈로니아와 마드리드가 함락되며 파시스트 쿠데타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뒤이어 군부 독재정권의 학살극이 벌어졌고, 독일이나 이탈리아와 달리 2차 대전에 참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 독재체제는 무너지지 않은 채 30여 년을 더 존속하게 된다.

 

스페인 내전이 끝난 지 8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다시 그 기록을 들춰본 것은, 이 역사를 배반당한 혁명으로 만든 굴레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이 자본가계급과 손잡고 나아갈 수 있다는 환상은 언제나 피어린 자기파괴로 귀결했지만, 그 미몽은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곳곳에서 운동을 짓누르고 있다. 이 나라는 과연 얼마나 다른가. 부르주아들과 함께 하는 해방은 없다는 교훈, 바로 이것이 『카탈로니아 찬가』가 현재에도 생명력을 지니는 이유다.

 

 

 

* 케빈 맥더모트‧제레미 애그뉴(황동하 옮김), 『코민테른』, 서해문집, 2009, p.216에서 재인용.

 

 

** 앞의 책,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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