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가입

변혁정치

> 변혁정치

이슈┃이 돈으로 살아봐

 

 

‘임금은 안 올려줘.

너희끼리 서로 싸워라’

직무급제 도입의 실체

 

 

이주용┃기관지위원장

 

 

 

대체 ‘투기 근절’과 ‘직무급제’가 무슨 상관일까? 지난 6월 7일, 문재인 정부는 부동산 투기 사태로 도마 위에 오른 LH에 관해 일련의 ‘혁신방안’을 발표했다. 물론, 이 방안은 ‘투기 근절’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부동산 투기판 자체는 그대로 둔 채, LH 권한 일부를 다른 기관으로 이전하는 한편(권한을 넘겨받는 다른 곳에서 투기가 벌어지지 않으리란 보장이 어디에 있나?) 인력 감축 등 구조조정을 벌이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모든 직원에 대한 직무급제 도입’을 끼워 넣었다. 그야말로 생뚱맞은 ‘기승전 직무급제’다.

 

그간 호봉제‧연공급제 폐지와 직무급제 도입을 밀어붙이던 이 정권 입장에서는 ‘이때다’ 싶었을 것이다. ‘직무급제’는 간단히 말해 직무에 따라 임금을 차등 지급하는 체계다. 문재인 정부는 2018년 이래 매년 발표하는 연간 <경제정책방향>에서 직무급으로의 임금체계 개편을 빼놓지 않고 적시했다. 공공부문에 선제적으로 도입하고 민간부문으로 확장한다는 구상이다. 그러나 이는 노동자들의 반발을 초래했다.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직무급제는 임금 인상을 억제하는 동시에 노동자 내부 격차와 차별을 더욱 조장하고 고착화하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LH가 투기 사태로 여론의 뭇매를 맞게 됐으니, 노동조합이 쉽게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기회’를 활용해 약삭빠르게 직무급제를 집어넣은 것이다.

 

문제는 LH에 그치지 않는다. 올해부터 직무급제 미전환 공공기관은 경영평가에서 불이익을 받는다. 문재인 정부가 작년 하반기에 <공공기관 경영평가편람>을 수정하며 직무급제 도입을 별도 평가항목으로 분리해 점수를 배정했기 때문이다. 경영평가가 해당 기관 임금과 예산 문제로 직결한다는 점에서, 임금체계 개편 압박 수위를 한층 더 높인 것이다. 당장 이달 18일 정부가 ‘2020년 공공기관 경영실적 평가’를 발표하는데, 이에 앞서 지난 3월 기획재정부가 ‘공공기관 직무중심 보수체계 개편 실적보고서 작성지침’을 하달했다는 보도도 나왔다.1 직무급제 도입 상황을 보고하고 속도를 높이라는 압력이다.

 

이 가운데 최근에는 ‘직무급이야말로 MZ세대가 원하는 공정한 임금체계’라는 선전이 종종 눈에 띈다. 이른바 ‘공정성’ 열풍을 등에 업고 연공급제 폐지와 직무급제 도입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모양새다. 그러나 실상을 뜯어보면, 직무급제는 대다수 청년노동자의 이해를 전혀 대변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철저히 임금몫을 낮추면서 노동자를 분할‧통제하려는 지배계급의 욕망으로 점철돼 있다.

 

 

 

문재인 정부 직무급제,

‘평생 일해도 최저임금 언저리’

 

직무급제는 도입 목적부터 ‘인건비 절감’을 노골적으로 내세운다. 연공급제는 근속에 따라 지속적‧안정적 임금 인상이 이뤄지는데, 자본과 사용자들은 그 돈을 지불하기 싫다는 것이다. 반면, 직무급제는 노동자들이 수행하는 직무에 각각 등급을 매겨 임금 수준에 차등적 상한을 설정하고, 해당 등급 내에서도 단계를 쪼개 임금 상승을 제한한다. 가령, ‘낮은 등급’으로 분류된 업무에 종사하는 노동자는 수십 년을 일해도 저임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는 문재인 정부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에서 고스란히 나타났다. 비정규직 일부에게 일정한 고용안정을 보장하되(무기계약직 혹은 자회사 직원으로 편제), 임금과 노동조건은 끌어올리지 못하게 차단한 것이다. 이 정권은 2017년 7월 처음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을 발표할 때부터 이미 ‘별도 직군 신설과 별도 임금체계 설계’를 제시, 온전한 정규직이 아니라 차별을 지속하는 구조를 강요했다. 나아가 같은 해 9월에 나온 <추가지침>에서는 “급격한 재정부담이 수반되지 않도록” 직종에 근거한 임금체계를 만들라며 “기존의 호봉제 임금체계를 일률적으로 따르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직무급제 도입을 강제하는 동시에, 그 본질이 ‘임금 억제’임을 자인한 것이다.

 

그 결과 정부가 내놓은 게 ‘최저임금 직무급제’인 ‘표준임금모델’2이었다. 이 모델은 기존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직무급제를 적용해 평생 최저임금 언저리에 묶어두겠다는 의도를 숨김없이 드러냈다. 일단 해당 노동자들의 직무를 5개 등급으로 구분하고 각 등급 내에서도 6개씩의 단계를 설정했는데, 등급과 단계가 높을수록 임금이 아주 조금 오른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낮은 직무등급’으로 분류한 1등급의 경우 1단계 임금을 최저임금에 맞췄고, 해당 등급 내 ‘최고’ 수준인 6단계에 도달해도 임금 상한은 최저임금 대비 10% 오른 데 불과하다. 게다가 ‘가장 높은 등급’인 5등급-1단계 역시 최저임금보다 고작 20% 높은 수준이고, 그마저 6단계까지 가더라도 최저임금 대비 30% 오르는 데 그친다.

 

문제는 더 있다. 각 등급 내에서 6단계까지 가려면 무려 15년이 걸리고, 6단계 이후로는 임금 인상이 없다. 뿐만 아니라 등급 자체의 이동(상승)은 곧 직무 이동으로 간주해 별도의 평가나 아예 새로 채용 절차를 거치게 함으로써 엄격히 통제한다. 즉, 1등급 직무(정부 모델에 따르면 일반청소‧시설경비‧단순사무보조 업무)에 종사하는 노동자는 평생 일해도 최저임금의 1.1배를 초과한 임금을 받을 수 없으며, 5등급 직무라 해도 최종적으로 최저임금의 1.3배를 넘지 못한다. 예컨대 민주일반연맹에 따르면 2017년 말 행정안전부가 도입한 직무급제를 적용받는 행안부 미화원 노동자들은 30년을 근무해도 급여가 2백만 원에 미달하며 9급 공무원 1호봉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3

 

 

128_22_수정.jpg

[사진: 노동과세계(변백선)]

 

 

‘공정한 기준’은 없다

 

임금 액수도 문제지만, 직무급제의 근본적 해악은 이른바 ‘핵심’과 ‘비핵심’ 업무를 나누고 철저히 차별해 노동자 내부 분열과 격차를 극심하게 부추긴다는 점이다.4 직무급제를 도입하려면 일단 각종 직무를 구분해 서로 다른 등급을 부여해야 한다. 그런데 개별 기업 안에서도 대개 여러 직무나 직종이 협업해 일하기 때문에, 직무에 서열을 매기는 것부터가 대단히 애매하다. 가령, 앞서 언급한 <매일경제> 기사에 등장하는 ‘공기업 관계자’의 얘기를 들어보자.

 

“예컨대 공항을 운영하려면 전력시설 관리, 공항기계시설 관리, 항행안전시설 관리, 임대 관리, 홍보, 회계, 전산시설 관리, 활주로 관리, 항공보안 직무 등 수많은 직군이 함께 일하며 이윤을 창출하게 된다… 이 직군들의 직무급을 제대로 산정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며 납득하는 직원도 많지 않다”5

 

결국 ‘객관성’, ‘합리성’, ‘공정성’이라는 포장과 달리 직무등급을 매기는 과정에는 자본가와 경영진의 주관과 편견, 자의적 ‘기준’이 판을 칠 공산이 크다. 특히 여기에서 ‘낮은 등급’으로 분류된 직무는 ‘비핵심 업무’라는 핑계로 외주화‧비정규직화 위협에 훨씬 더 많이 노출된다. 자본의 시각에서 이윤 생산과 직결하지 않거나 사회적으로 저평가‧폄하하는 업무, 혹은 이윤 생산과 직결하더라도 인건비를 줄이고 싶은 분야 등에는 낮은 직무등급을 적용해 저임금을 정당화할 수 있다.

 

직무에 등급을 매기는 ‘기준’만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등급을 적용하는 것 자체가 차별을 정당화‧고착화한다. 단적으로 말해 ‘비정규직이라서 차별하는 게 아니라, 직무등급에 맞게 차등 대우하는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우게 된다. 그간 자본과 경영자들은 불법파견 논란 등을 회피하려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업무를 계속 분리해왔다. 가령, 더 이상 ‘왼쪽 바퀴는 정규직, 오른쪽 바퀴는 비정규직이 조립’하는 게 아니라 조립은 정규직이, 부품을 순서에 맞춰 실어 나르는 일은 비정규직이 맡는 식이다. 그 모든 게 ‘필요한 일’인데도 고용형태(정규직/비정규직)에 따라 직무를 분리한 뒤, 비정규직이 맡은 직무는 ‘낮은 등급’으로 규정해 차별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128_24.jpg

 

 

지금도 자본과 국가는 마치 한정된 파이를 두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경쟁해야 하는 것처럼 몰아넣으며 노동계급을 분할통치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직무급제 도입으로 각각의 직무에 따라 분할과 차별의 경계선이 그어지면, 자본가계급은 직무별 노동자 사이의 차별‧적대를 종용하며 바닥을 향한 경쟁을 강요할 것이다. 그렇기에, ‘노동조합이 직무급제 도입을 위한 직무 평가 과정에 개입하면 뭔가 나은 결과를 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허상이다. 이 과정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동료 노동자를 어떻게, 얼마나 많이 차별할 것인가’ 결정하는 일이다. ‘공정한 기준’이 아니라 ‘직무급제 폐기’를 명확히 요구하며 싸워야 하는 이유다.

 

 

성과-퇴출제로 가는 길

 

직무급제는 성과주의 임금체계를 더욱 발전시켜 노동자를 분할‧파편화하는 첩경이다. ‘직무 평가 기준’은 직군뿐만 아니라 각 노동자에 대해서도 점수를 매기는 지표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개인별 ‘성과 측정’도 가능하며, 이게 실물화하면 곧 ‘성과연봉제’와 ‘저성과자 퇴출제’가 된다. 박근혜 정부가 강행하던 그 노동개악을 향해 문재인 정부는 차근차근 디딤돌을 놓는 것이다. 실제로 서두에 언급한 ‘LH 혁신방안’에서 정부는 “직무중심 보수체계 개편과 연계하여 직무분석에 기반한 적재적소 인사원칙 및 성과관리방안 도입”을 명시했다. 직무별 경쟁을 넘어 아예 모든 노동자가 원자화된 채 서로에 대해 ‘투쟁’을 벌이며 스스로를 더욱 고강도-장시간 노동으로 몰아넣도록 강제하는 게 자본가계급의 변함없는 욕망이다. 여기에는 가뜩이나 불안정 노동에 시달리는 대다수 청년노동자의 미래도 없고, 노동자들의 단결된 힘에 기반해 그 이익을 대변해야 할 노동조합운동의 미래도 없다.

 

지난 <변혁정치> 126호6에서도 언급했지만, 현재 이 나라 사업장 가운데 60%는 아예 기본급 운영체계조차 없으며, 호봉제가 있는 곳은 전체의 14%에 불과하다. 정부와 자본이 직무급제를 들이밀며 호봉제 폐지를 시도하는 것은 이렇듯 얼마 남지도 않은 안정적 임금체계를 완전히 무너뜨리기 위함이다. 공격은 공공/민간부문 가릴 것 없이 착착 준비‧진행 중이다. 올 2월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가 공공기관 직무급제 도입에 합의했고, 같은 달에는 노동부가 건설업과 조선업에 적용할 ‘직무평가도구’를 발표했다. 지난 2015년부터 노동부는 ‘업종별 직무평가도구’를 계속 개발해왔고, 그간 보건의료‧철강‧호텔‧은행‧공공서비스‧사회복지서비스‧IT‧제약산업에 대해서는 해당 자료를 내놓은 상태다.

 

더욱 조여오는 직무급제 공세에 맞서 싸우려면, 그에 대응한 모종의 ‘완결적 임금모델’을 설계해야 한다는 강박을 떨쳐야 한다. 위에서 살폈듯 직무급제 자체도 객관적 기준을 갖춘 게 아니라 사측 의도에 따라 모호하고 주관적으로 변동하되, 그 핵심은 노동자를 분할‧차별하면서 다수에게 장시간-저임금 노동을 강제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임금체계는 곧 ‘노동자를 얼마나, 어떻게 착취하고 통제할 것인가’를 정하는 도구로, 어떤 모델이든 자본은 그 속에서 더 많은 몫을 빼갈 방법을 찾는다. 가령, 연공급제에서도 자본은 신규 노동자 임금을 줄이는 한편 기본급을 낮추고 노동시간을 늘려 착취를 강화한다. ‘정교한 임금모델 만들기’에 골몰하는 순간, 우리는 자본의 프레임에 말려들게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정교한 설계가 아니라, 단호하게 직무급제를 거부하면서 △보편적-안정적-고정적 생활임금을 △장시간 노동 없이도 △직종/연령/산업/고용형태 등을 불문하고 모든 노동자에게 지급하라고 요구하며 싸우는 일이다. 원청 대기업이 축적한 천문학적 사내유보금을 하청 연쇄사슬로 묶인 노동자들의 충분한 임금까지 보장하는 데 쓰라고 요구할 수도 있다. 이를 통해 낮은 임금 수준으로 불만을 누적한 청년노동자-비정규직 노동자는 물론이고, 임금체계 자체가 없는 수많은 노동자를 대변하며 투쟁해야 한다. 그때 노동운동 역시 노동계급 내부의 차별과 분할에 맞서 진정한 연대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1“공공기관 직원 돈 얼마씩 주라는 거냐”… 갈팡질팡 직무급제”, <매일경제> 2021년 3월 10일 자.

 

2 이하 ‘표준임금모델’에 관한 설명은 2018년 3월 6일 민주노총 주최 토론회 “공공부문 무기계약직 표준임금모델 비판 및 대안 모색” 발제문 참고.

 

3 앞의 민주노총 토론회 발제문 참고.

 

4 임금체계 개편과 노동자 내부 분할에 관해서는 『노동분할시대, 노동조합 임금전략』, 민주노총 총서 47, 2016 참고.

 

5 앞의 <매일경제> 2021년 3월 10일 자 기사.

 

6 <변혁정치> 126호(5월 15일 자) 기사 “민주노조운동, 2030과 전진하려면: ‘투쟁 멈춰’? 타협부터 멈춰야 한다”. 

© k2s0o1d6e0s8i2g7n.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