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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행의 문제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혹은 ‘노동자 민주주의’

 

 

남구현┃경기

 

 

 

지난 호 연재에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계급 모순을 지양한 사회) 사이에는 혁명적인 이행의 시기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변혁정치> 130호(8월 1일 자) 기사 “사회주의 정치는 무엇일까: 사회주의와 계급” 참고). 이런 ‘이행기’는 아직 잔존하는 이전 시기의 계급과 새로 등장하는 계급이 혼재되어 쟁투를 벌이는 정치적 격동기다. 또한, 노동계급의 정치적 지배가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이 시기의 국가형태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 지칭했다. “자본주의 사회와 공산주의 사회 사이에는 하나의 사회로부터 다른 사회로 혁명적 변혁의 시기가 있다. 이 시기에 상응하는 정치적 이행기가 존재하는데, 이러한 이행기 국가가 바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다.”1 여기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자본주의의 부르주아지 지배에 상응하는 이행기의 노동계급 정치를 의미한다. 맑스는 부르주아 정치의 다양한 형태와 차이에도 불구하고 자본가계급의 지배가 이루어지는 한 이를 ‘부르주아지 독재’로 불렀다.2

 

 

 

‘자본주의는 민주주의,

사회주의는 독재’?

 

흔히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정치적 차이를 ‘민주주의와 독재’라는 틀로 구분한다. 자본주의 체제의 정치적 특징을 ‘자유 민주주의’로 보고, 사회주의 체제의 정치는 ‘공산 독재’로 대비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역사를 보면, 극단적 폭압정치나 테러적인 공포정치는 체제와 상관없이 등장했다. 자본주의 체제를 예로 들자면, 근대 초기 영국의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 ‘청교도 혁명’이라고도 불리는 17세기 중반 영국 내전에서 왕정을 무너뜨리고 국왕 찰스 1세를 처형한 뒤 공화정 수립)이나 1789년 프랑스대혁명 당시 로베스피에르 같은 공화주의자들은 왕정을 타도하고 공화국을 세운다는 명분 아래 공포정치를 폈다. 특히 제국주의 확장기에 독일 나치즘, 이탈리아 파시즘, 일본 군국주의는 위기에 빠진 자본주의를 구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이는 벌거벗은 국가폭력을 안팎으로 사용한, 인류 역사에서 가장 극단적인 사례였다. 이뿐만 아니다. 한국의 독재자들을 위시해 주변부 국가의 수많은 독재자, 최근의 극우 정치세력에 이르기까지 ‘자본을 위한 독재’의 예는 자본주의 초기부터 지금까지 수없이 들 수 있다.

 

노동자민중의 정부를 우익 세력이 물리적 폭력으로 전복한 사례도 부지기수다. 예컨대 ‘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라 불린 1871년 파리코뮌은 파리 민중의 봉기 이후 전국적 선거로 노동자 정부를 구성했지만, 당시 베르사유로 도망친 부르주아 정부가 그 직전까지 전쟁을 벌이던 프로이센과 협조해 파리를 포위공격함으로써 마침내 코뮌 지지자들과 파리 노동자민중을 무참히 학살하며 끝났다. 칠레에서는 1970년 대선에서 사회주의자 아옌데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참모총장 피노체트를 위시해 미국의 사주를 받은 군부가 1973년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 아옌데는 물론이고 수많은 좌파 활동가와 노동자민중을 살해한 뒤 군사독재 정권을 세웠다. 이들은 폭압정치를 펴면서 칠레를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실험장으로 만들었는데, 신자유주의 학파의 거두이자 노벨상까지 받은 밀턴 프리드먼은 당시 칠레 독재정권의 경제고문 역할을 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니카라과‧쿠바‧베네수엘라 등 중남미 국가, 나아가 베트남과 최근의 아프가니스탄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지의 쿠데타와 내전, 반혁명의 배경에는 ‘자유 민주주의’와 ‘인권’의 기치를 높이 들고 있는 미국의 직간접 개입과 공작이 뿌리내리고 있다.

 

 

 

파리코뮌의 경험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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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1년 3월 18일 파리 시내를 장악하고 바리케이드를 쌓은 코뮌군. [사진: wikipedia]

 

 

맑스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전형’으로 제시한 파리코뮌의 정치는 대개 떠올리는 ‘독재’와는 거리가 멀었다. 프랑스 전역에서 진행한 민주적 선거로 대표자를 선출해 노동자 정부를 세웠고, 그 과정에서 베르사유로 도주한 부르주아 정부와 달리 정치적 반대자를 탄압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코뮌에 대한 비판과 부르주아 정부에 대한 지지마저 공공연하게 있었다.

 

코뮌은 파리의 각 구(區)에서 보통선거를 통해 선출한 시 평의회(市 評議會, Stadträte)로 구성됐고, 시 평의회는 [인민에게] 책임을 지며 언제라도 [인민에 의해] 소환될 수 있었다. 시 평의회 다수는 말할 것도 없이 노동자 또는 널리 인정받은 노동계급 대변자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코뮌은 의회처럼 [말만 하는] 기구가 아니라 ‘일하는 기구’였는데, 동시에 법을 제정하며 집행했다… 코뮌 구성원 이하 모든 공직자는 노동자 임금을 받아야 했다… 도시의 행정뿐 아니라 이제까지 국가가 수행한 모든 결정권은 코뮌의 수중으로 넘어갔다.”3([ ]는 인용자가 덧붙였다.)

 

파리코뮌의 이러한 개혁은 정치적(폭력적), 행정적 국가기구뿐 아니라 사회 모든 영역으로 확장됐다. 코뮌이 성직자들의 권력을 박탈했기 때문에 그들은 과거의 사도들처럼 신자들의 헌금으로 살아가야 했다. 법관 역시 다른 공직자와 마찬가지로 선거를 통해 선출했고, 인민에게 책임을 지며 인민이 소환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이전의 허구적 독립성을 상실하게 됐다.4

 

파리코뮌의 경험은 파리의 노동자 정부를 가능케 했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당시 베르사유로 도주한 부르주아 정부보다 얼마나 더 민주적이었는지를 보여줬다. 앞에서 지적했듯 맑스는 자본가계급의 정치적 지배를 ‘부르주아지 독재’로, 노동계급의 지배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 표현했는데, 파리코뮌은 이를 역사적 사실로 입증했다. 후에 민주주의와 독재에 관한 레닌과 카우츠키(Karl kautsky, 1854~1938. 독일 사회민주당의 이론적 지도자로,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에 반대)의 논쟁에서도, ‘자본주의는 민주주의, 사회주의는 독재’라고 본 카우츠키에 대해 레닌은 ‘어떤 계급이 지배하고 있는가’라는 맥락에서 ‘부르주아지 독재’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구분하며 맞섰다. 마찬가지로, 자본가계급의 지배를 ‘부르주아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노동자 민주주의’로 볼 수 있다.

 

 

 

현실사회주의의 실패와

이행의 과제

 

착취자가 사라진 상태에서 작동한 코뮌의 민주주의는 계급이 등장하지 않았던 고대 원시 사회에서의 민주주의와 같은 원리를 보여줬다. 원시 사회에서는 선출된 대표자로 구성하는 일종의 평의회가 직접적으로 구성원 전체가 참여하는 총회 민주주의에 귀속됐다. 인민의 직접적인 자기통치라는 측면에서 보면, 계급이 없었던 원시 사회의 민주주의는 앞서 우리가 살펴본 파리코뮌은 물론이고 이 땅에서 1890년대 동학농민전쟁 당시의 집강소, 1945년 해방 직후 조선인민공화국 설립 운동(북한, 곧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다르다), 1980년 광주의 해방구 같은 형태로 반복해서 등장했다.

 

문제는 현실사회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당 독재’로 변질되며 파리코뮌이 보여준 노동자 민주주의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소비에트 민주주의라는 것(‘소비에트’는 러시아어로 ‘평의회’를 뜻하며, 러시아혁명 당시 노동자‧농민‧병사 대중이 스스로를 대표하기 위해 조직한 기구)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본질적으로는 당의 독재’라는 논리를 폈다. 당은 절대화됐고, 당 무오류설에 입각해 정적 숙청과 강제 이주 정책 등을 밀어붙였다. 노동조합 같은 대중조직은 ‘당의 지시를 대중에게 전달하는 전달벨트’로, 인민 대중은 객체로 전락했다. 민주주의는 완성된 게 아니라 폐기됐고, 이러한 정치 노선은 ‘사회주의 모국’ 소련의 권위를 배경으로 현실사회주의 진영 전반의 기본 틀이 됐다. 1980년대 말에 이르러 체제 자체가 위기에 처하자 소련은 ‘페레스트로이카’(러시아어로 ‘개혁’을 뜻함)를 내세워 사회주의 개혁‧개방을 표방했지만, 노동자‧농민을 정치의 주체로 세우는 게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도입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이행의 과정에서 무계급 사회로의 전망 속에 실질적 민주주의 확대를 통한 민주주의 완성이라는 과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뼈저리게 일깨운 역사적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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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러시아는 소비에트 민주주의에 근거해 탄생했지만, 이후 '당 독재'에 밀려 왜곡-억압된다. 사진은 1917년 혁명 당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회의장 [사진: wikipedia]

 

 

한편,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 최고의 원칙으로 제시하는 ‘제도정당들의 선거를 통한 대의제’가 지닌 근본적 한계를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한다. 예전 연재에서 지적했듯, 의회‧선거정치는 노동계급의 정치적 진출을 제약하는 온갖 장치를 통해 부르주아지의 지배를 지속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이와 관련해 제도적 차원에서도 노동계급 정치의 저변을 넓힐 수 있도록 비례대표제나 선거공영제 등과 함께 주민 발의제와 소환제 같은 직접민주주의적 개혁도 필요하다). 또한, 앞서 살펴봤듯 나치즘처럼 우익 세력이 일단 선거를 통해 집권한 뒤 의회를 해산하고 반대파를 제거한다거나, 칠레 아옌데처럼 좌파 정부가 선거로 집권해도 지배계급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전복하는 실제 사례가 수두룩하다. 이처럼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위기 상황에서 자기 스스로를 부정하는 반대물로 전화하기 쉬우며, 역사의 진보를 막기 위해 지배자들 사이의 적대를 중지하고 연합하게 한다. 역사적 반동과 자본주의 영속을 위한 신성동맹에 맞서 이겨낼 대처 방안이 추가로 요구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파리코뮌에서는 착취 계급이 사라지고 새로운 경제 질서를 갖추게 됐다는 점이다. 민주공화국이 투쟁의 목표는 아니었지만 코뮌에서 민주주의는 그 내용을 갖추게 됐고, 상비군과 관료제가 사라지면서 실로 ‘값싼’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정부가 탄생했다. 부르주아지가 늘상 부르짖는 구호가 실제로 구현된 셈인데, 이는 노동자가 해방되어 경제의 주체가 됨으로써 가능한 일이었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경제적 내용, 즉 사회주의의 경제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살펴보겠다.

 

 

 

 

 

1 Marx(1875), Kritik des Gothaer Programms(<고타 강령 비판>), MEW19, 28.

 

 

2 레닌도 같은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한 계급의 독재가 모든 계급사회에서 필수적이라는 것, 또한 부르주아지를 전복한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해서 필수적이라는 것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와 “무계급사회”인 공산주의 사이에 놓인 모든 역사적 시기를 통틀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이해한 자만이 맑스 국가론의 본질을 깨달았다고 할 수 있다… 부르주아 국가의 형태는 매우 다양하지만 그 본질은 동일하다: 모든 부르주아 국가는 이러저러한 형태를 취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반드시 부르주아지의 독재다.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은 물론 아주 풍부하고 다양한 정치적 형태를 만들어 내겠지만, 그 본질은 반드시 동일한 것이 될 것이다: 즉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그것이다.’ Lenin, Staat und Revolution(<국가와 혁명>), LW25, 425.

 

 

3 Marx, Der Bürgerkrieg in Frankreich(<프랑스 내전>), MEW17, 338~339쪽. 레닌도 자신의 저작에서 파리코뮌의 정치에 대해 맑스를 인용하면서 ‘선출 가능성, 소환 가능성, 모든 특혜 폐지’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원칙으로 제시했다.

 

 

4 앞의 책, 341쪽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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