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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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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17.07.14 18:08

멋진 프롤로그의 세계

 

토닥이(노동자뉴스제작단)서울

 


도망치다시피 봉천동의 한 오피스텔에 자리를 잡고 난 후 얼마간의 시간 동안 우리는 서로 멋쩍었다. 싸울 땐 몰랐는데 끝나고 나니 우리는 크고 작은 내상(內傷)을 입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무 작아서 짐을 다 풀지도 못하고 간신히 몇 개의 책상을 붙여놓은, 원룸 같은 오피스텔에서 함께 공유했지만 절대 공유할 수 없는 각자 자기 몫만큼의 상처를 안고 우리는 지루한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이 시간은 길게 가지 않았다. 내부의 힘이 아니라 외부의 힘 때문이었다.

 

역사적인 총파업 선언

19961226일 새벽 5. 몇 달간 정리해고법과 근로자파견법을 쟁점으로 김영삼정부와 노동운동 간 긴장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다음날에 - 그것도 전전날(크리스마스 이브)에 여당이 노동법개정안과 관련한 공청회를 열어 여론을 수렴하고 있었기에 - 새벽 5시에 여당의원들만 기습적으로 국회에 모여서, 노동법을 날치기를 할 줄은 몰랐다. 아침부터 전화기에 불이 났다. 덕분에 이날 아침 명동성당에서 열린 민주노총의 기자회견에 간신히 촬영자들이 도착할 수 있었고, 당시 민주노총 위원장 권영길의 역사적인 총파업 선언을 담아냈다. 겨울 아침 햇살이 어깨에 내려앉은, 약간 역광으로 찍힌 장면에, 긴장감이 짙게 배인 목소리로 총파업을 선언하는 권영길 위원장이 찍힌 그 화면은 역사적 의미로 보나 희소성으로 보나 노뉴단 최고의 촬영장면 중 하나이다. 이 화면은 작업자의 손에 의해서 <총파업투쟁속보 1>*의 프롤로그로 재조직되면서, 본문의 시작을 알리거나 본문의 맛보기 역할을 하는 단순한 프롤로그를 넘는 어떤 것이 되었다. 전태일의 앳된 얼굴 위로 다소 비장한 대결의 전주가 흘러나오면, 전태일 분신 이후의 노동자 투쟁의 역사가 나오고, 국회의 노동법 날치기가 나오고, 이어서 권영길 위원장의 총파업 선언이 나온다. 3분 정도밖에 안 되는 이 프롤로그는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적이고도 강력한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어, 이 작품의 본문이나 <총파업투쟁속보 2> 뿐만 아니라, 당시 나온 모든 관련 이미지를 이 프롤로그가 압도했다. 이 프롤로그는 때로는 그대로, 때로는 몇 장면만을 떼어내, 지금까지도 이 시기를 다룬 영상물들에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다.

 

블랙홀처럼 빠져들다

이 프롤로그는 대학에서부터 영상활동을 하다가 졸업과 함께 노뉴단 활동을 한 친구의 작품이다. 강렬한 이미지와 속도감 있는 리듬이 탁월해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다시 똑같이 하라고 하면 못할 정도로, 이제 막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영상효과들을 아주 복잡한 조합을 통해 하나의 화면으로 만들어내고 그것을 연결시켜내는 편집능력 또한 최고였다. 그래서 작품의 부분 편집이든 하나의 작품을 다 편집하든, 이 친구가 만든 작품들에서는 항상 새로운 이미지를 만나고 이전에 보지 못한 세련된 영상을 만나는 쾌감을 느낀다. 세련되고 감각적이고 진보적인 이 친구의 영상작업은 그때나 지금이나 많은 후배들에게 모범이 되고 있다. 보배같은 친구이다.

이때도 독립영화운동을 하는 단체나 개인들이 모여 함께 대응했다. 애초에 촬영과 편집을 나누기로 했으나 편집은 공동 작업이 안 됐고 촬영만 공동으로 했다. 공동제작단은 큰 문제 없이 진행됐는데, 엉뚱한 곳에서 골치 아픈 문제가 터졌다. 당시 총파업이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점점 확대되고 있는 양상이라서 하루라도 빨리 작업을 완성시키려고 애가 탔다. 낮에는 촬영하고 밤에는 편집하고, 이런 식으로 며칠간 밤을 새워 10여일 만에 제작을 완료했다. 완성된 작품은 당시 민주노총 지도부가 농성하고 있던 명동성당의 천막에서 상영했는데, 상영 후에 지도부 몇 사람이 배포를 불허했다. 생각지도 못했다. 처음에는 배포금지 이유가 정확히 나오지 않아서, 상영 후 눈 덮인 명동성당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민주노총 지도부를 만나 설득했으나 완강했다. 배포가 하루 이틀 미뤄지면서 이유가 밝혀졌는데, 그 이유는 당시 똥색 잠바의 물결이라고 할 정도로 기아자동차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이끌었는데 화면에 그 장면이 별로 안 나온다는 것이었다. 과한 지적이었다고 생각했다. 여하간 누군가 지도부를 달래 작품에 손을 안 대고 그대로 배포했다.

이 작업은 노뉴단에게 여러 가지로 행운을 가져다 줬다. 당시 노동자 총파업에 대해 해외에서 폭발적인 관심을 보였는데, 이 작품이 그에 부응해 호평을 받은 것이다. 어쩌다 가끔 듣게 되는 역시 노뉴단이라는 말도 이때가 시작이었다. 우리는 이 역사적인 노동자 총파업에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가 내상으로 인한 망설임을 단시간에 치유할 수 있었다. 물론 완치됐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던 큰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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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파업 투쟁 속보 1>, 19971/26/제작: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노동자뉴스제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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