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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의 인권권고 수용이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

 정주희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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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7일 경찰은 경찰개혁위원회 인권보호분과(이하 인권분과)가 권고한 내용을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집회신고절차를 간소화하고, 전면적 금지통고를 원칙적으로 하지 않으면서, 금지통고를 최소화하도록 구체적인 기준을 제정하겠다는 것이다. 이 권고안은 집회시위 보장 패러다임이 변화해야 한다며 집회를 관리나 탄압이 아니라 보장의 대상으로 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권고에는 지난해 백남기 농민의 죽음으로 도마에 올랐던 살수차 사용은 소요사태, 국가중요시설 공격행위에만 예외적으로 사용하며 사용 명령권자를 격상하고 혼합살수를 금지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동안 집회 참가자들을 광범하게 탄압하는 데 이용한 채증은 폭력행위 임박처럼 요건을 만들고 일반교통방해죄 위반으로 참가자를 입건하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경찰의 집회시위 대응 바꿔냈지만... “패러다임의 변화에는 못미쳐

그간 경찰의 대응기조는 여러 기구와 사법절차를 통해 집회시위에 참가하는 것부터 공포심을 조성하고 집회 참가자들을 다른 사회구성원에게서 고립하는 전략으로 모아졌다. 이번에 경찰이 시민사회가 끈질기게 제기한 의제들에 반응했다는 것은 경찰의 탄압 및 고립일변도 집회시위 관리에 제동을 걸었다는 의미가 있다. 2016년 말~2017년 초반까지 이어졌던 시위가 정권 퇴진을 이끌었다는 권위를 획득하고, 경찰 전략의 유효성이 빛바래짐으로 인해 가능한 일이었다.

2016년까지만 해도 경찰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이하 집시법) 12조에 따라 교통 소통을 사유로 주요 도심에서의 시위를 금지하거나 제한하기 바빴다. 20154월 세월호 집회와 11월 민중총궐기에서 수 겹으로 둘러싼 경찰 차벽과 최루액 혼합 물대포 살수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201611월 민중총궐기 당시에도 법원이 사직로-율곡로 집회를 허가하기 전까지 경찰은 차벽 설치를 계획하고 있었다. 광화문광장에 1년 먼저 닿으려 했던 백남기와 한상균이 희생양이 됐다는 표현은 경찰의 집회시위 탄압에 관해서라면 정확한 표현이다. 경찰의 집회시위 탄압 조치들을 무력화한 것은 대중의 압도적 기세였다.

그렇다고 해서 집회시위에 대한 제약과 탄압에서 이제 완전히 자유로워졌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인권분과의 권고에는 핵심적으로 옥외시위를 특정 시간에 원천 차단하는 집시법 10, 대통령관저와 각급 법원 100미터에서 집회를 원천 금지하는 집시법 11, 교통 소통을 집회시위의 금지사유로 여전히 인정하는 집시법 12조에 대한 개정 방향이나 추진 권고가 담겨있지 않다. 이 조항들은 집회시위를 절대적으로 금지·제한할 수 있는 법적 근거로서 대표적인 독소조항이다.

뿐만 아니라 언론보도에서 느껴지는 온도차에 비해 현장에서는 경찰의 자세에 큰 변화를 느끼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일례로 이 권고에도 포함한 문제인 기자회견에 집시법을 적용하는 문제에 관한 부분은 권고에서도 매우 모호하게 처리했을 뿐 아니라 경찰이 개혁위를 설치한 지난 6월 이후에도 일말의 개선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87일 동양공대위, 투쟁사업장공투위, 설악산지키기국민행동이 주최한 기자회견에서 구호를 몇 마디 외치거나 몸조끼를 착용했다는 이유로 1/3이 넘는 참가자에게 집시법 위반 혐의로 출석을 요구한 것이 불과 8월말~9월초의 일이다. 뿐만 아니라 이 권고를 발표한 날 사드 배치를 강행하기 위해 성주 소성리에서 올 들어 최대 규모의 진압작전을 펼친 사례를 보더라도 경찰의 권고 내용 조율과 수용이 개혁의 의지라기보다 여론대응전략의 일환이라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노동자민중의 권리, 권력이 대신 만들어주지 않는다

법제도와 현장에서의 변화가 수반하지 않는다면, 일시적 변화에 그치거나 정권의 성향 혹은 정세에 따라 빌미를 잡아 금세 뒤집기도 쉽다. 경찰이 탄압중심, 관리중심의 기조를 유지하는 한 이번 권고 외에서 갖은 편법과 꼼수가 판을 치거나 새로운 탄압방법이 등장할 수 있다. 예컨대 2005년 전용철, 홍덕표 농민 사망에 대해서는 대통령이 직접 사과한 뒤, 곤봉과 방패가 차벽과 물대포 뒤로 한발 물러섰다. 사람과 사람이 충돌하는 모습을 감추는 대신, 시각적으로 덜 자극적인 물대포가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그 귀결은 백남기 농민의 사망이었다. 물대포 운용지침 등이 있다고는 하나, 어쨌건 집단으로 모인 사람들에게 위해를 가하고 무력으로 대중을 해산하는 용도의 장비였다.

경찰이 권고를 수용함으로써 집회 신고부터 사법처리까지, 집회 목적의 달성보다도 집회 개최 자체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던 박근혜정부 때와는 조금 달라진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 온라인으로 집회신고서를 제출할 수 있고, 관할서가 두 개 이상 겹쳐도 지방경찰청까지 갈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완전한 변화, 집회시위의 완전한 자유를 의미하지 않는다. 머지않아 우리는 새로운 모습의 장벽을 마주하게 될지 모른다. 집회시위 자유의 확장은 단 한 번도 국가로부터 주어진 적이 없다. 광장의 정치가 힘을 갖고 지지를 획득해왔을 때 집회시위는 물론 출판과 표현, 사상의 자유 역시 확장 가능함을 국내외 수많은 저항운동의 역사에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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