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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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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호 사회변혁노동자당 2017.11.15 00:05

거북밀깍지벌레

 

갑자기 날씨가 쌀쌀해지고 바람이 불어서 붉게 물든 나뭇잎이 한 잎 두 잎 떨어지던 날, 마을에 새로 생긴 공방을 찾아갔다. 공방이 들어서기 전 그곳은 밤이면 붉은 불빛이 반짝이던 접대부가 나오던 술집, 이른바 변종카페가 있던 곳이다. 개울 옆으로 즐비했던 변종카페는 관에서 전담팀을 꾸려 지속적으로 단속하고, 건물주들을 설득하니 하나둘 떠나고 지금은 서너 곳만 남아 있다. 변종카페가 있던 자리는 어느새 공방들로 깔끔하게 새 단장을 마쳤다. 이렇게 빨리 바뀔 수 있었던 건 관에서 구조 변경 비용, 기본 물품, 6개월 간 임차료를 지원해 주었기 때문이다. 남아 있는 변종카페 몇 군데 마저 공방으로 바뀌면 그곳에서 예전 모습은 찾기 힘들 것이다. 관은 낡고 어두운 환경을 개선하고 생태와 문화가 흐르는 곳으로 탈바꿈시키겠다하는데, 하루아침에 과거 흔적을 싹 지우고 뚝딱뚝딱 꾸며 놓으면 생태와 문화가 흐르는 곳이 되는 걸까?

잎이 떨어진 가로수 가지엔 깍지벌레들이 닥지닥지 붙어 있다. 나뭇잎이 무성할 때에는 잎에 가려 보이지 않던 깍지벌레가 잎이 지고 나니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벚나무 가지엔 동글동글 오동통한 거북밀깍지벌레가 붙어 있고, 은행나무엔 희끗희끗 가루깍지벌레가 붙어 있다. 감나무 가지엔 붉은색 루비깍지벌레가 붙어 있다. 가지 끝엔 허연 주머니깍지벌레가 빼곡하다. 산울타리 사철나무 잎엔 사철깍지벌레가 잎맥을 따라 촘촘히 붙어 있고, 쥐똥나무엔 쥐똥밀깍지벌레가 아예 가지를 통째로 하얗게 둘러싸서 덮어 버렸다.

겉으로 보이는 깍지벌레들 모습은 본래 모습이 아니다. 깍지벌레 스스로 만들어 뒤집어쓴 밀랍이다. 깍지벌레는 밀랍 속에 몸을 감추고 나뭇가지나 잎에 들러붙어 움직이지 않고 살아간다. 꼼짝도 않고 나무에 붙어서 나무즙을 빨아먹어 나무 힘을 약하게 하고, 끈적끈적한 배설물은 그을음병을 일으켜 나뭇잎이나 줄기를 시커멓고 우중충하게 만든다. 깍지벌레는 공해가 심한 공단이나 도심지 거리와 공원의 가로수, 조경수에서 많이 보인다. 바람이 통하지 않고 건조한 집 안도 깍지벌레가 살기 좋은 곳이다. 깍지벌레는 밀랍으로 몸을 둘러싸고 살아가기에 대기오염 같은 주변 환경조건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천적인 무당벌레, 풀잠자리, 기생벌 따위가 환경오염으로 줄어들어서 더 살기 좋은 곳이 된다.

공단이 있는 울산이나 순천의 가로수가 최근 거북밀깍지벌레로 몸살을 앓고 있다. 울산시와 순천시는 방제를 하고 있지만 살충제만 뿌린다고 방제가 잘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거북밀깍지벌레는 꼭 거북등처럼 생긴 밀랍이 몸을 감싸고 있어서 웬만한 살충제를 뿌려서는 잘 죽지 않는다. 살충제는 깍지벌레보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더 피해를 줄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 많은 것을 하나하나 손으로 떼어서 잡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깍지벌레가 많이 생기는 곳은 그만큼 환경이 오염된 곳이다. 그러니까 깍지벌레는 환경 악화를 알려주는 지표종인 것이다. 깍지벌레만 없앤다고 환경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다. 그건 단지 문제를 가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깍지벌레를 무조건 없애기보다 깍지벌레를 지속적으로 살펴 환경오염 실태를 파악하고, 환경오염을 줄이는 지표로 삼아야 한다. 환경오염이 줄어들면 천적이 돌아오고 자연스레 깍지벌레는 줄어들 것이다. 깍지벌레는 다 없애 버려도 되는 몹쓸 해충이 아니다. 둘레에 흔히 심어 가꾸는 벚나무, 은행나무, 회양목 따위에서 거북밀깍지벌레 여러 마리를 잡아 열을 가해서 밀랍을 녹여 질 좋은 향초를 만들어 촛불을 밝혀 보면 전혀 다른 깍지벌레 모습을 볼 수도 있다.

공방에 입주하는 작가들은 과거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고 서두르지 말자고 하지만, 확 달라진 모습을 빨리 보여 성과를 드러내고 싶은 관은 그런 작가들의 고민을 헤아리지 못한다. 낡고 어두운 과거를 무조건 지운다고 그게 없어질까? 또 다른 변종이 되어 나타나지는 않을까? 낡고 어두운 과거는 마을 주민들 삶을 바꾸어 나가는 지표가 될 수 있다. 마을 주민들 삶이 바뀌어야 생태와 문화가 살아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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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강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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