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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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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과의 연대인가,

비정규직과의 연대인가


이주용정책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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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노동(조합)운동이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있다. 물론 정규직 노동조합을 정규직 이기주의혹은 귀족노조로 몰아붙이는 공세가 지난 십수년간 강력하게 지속한 것 때문이기도 하지만, 최근 정규직 노조들이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드러낸 적대적 태도 때문이기도 하다. 올 초 기아자동차에서 정규직노조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노조에서 쫓아낸 것은 상징적 사건이었다. 여기에 문재인 정부가 비정규직 대책을 내놓자 그 일차적 대상인 공공부문에서부터 정규직/비정규직간 갈등이 분출했다.

이 가운데 정규직이 양보하여 비정규직과 임금을 나누자는 주장이 득세하고 있다. 양보와 나눔을 통해 정규직 이기주의라는 사회적 여론을 반전시키고 노동자 내부의 단결을 강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현재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노사정위 복귀와 문재인 정부와의 협조 등 사회적 대타협을 가장 노골적으로 주장하는 윤해모 후보는 사회연대기금을 조성해 정규직-비정규직, 대기업-중소기업 노동자간 임금격차를 줄이자는 공약을 냈다. 조상수 후보 역시 임금연대를 통해 격차를 해소하자는 방안을 내놓았다. 청와대 간담회 불참으로 민주노총이 정부 지지자들에게 비난받는 가운데 정규직 노조들이 잇따라 비정규직 정규직화 과정에서 파열음을 내면서 부정적 여론이 득세하자 정규직이 먼저 양보하겠다는 전략으로 이를 만회하려는 듯하다. 문제는 정규직 양보가 계급적 연대를 형성하기는커녕 오히려 노동자 사이의 연대를 더 무너뜨리면서 자본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것이다.

 

사회연대기금: 비정규직 노동체제에 대한 면죄부

사회연대기금 방안은 정규직이 임금의 일부를 내놓고 사측도 그에 해당하는 액수를 내놓아 비정규직 처우개선에 사용하자는 것이다. 금속노조는 지난 6월 기자회견을 열고 현대차그룹에 5천억 원 규모의 노사공동 일자리기금을 제안했다. 현대기아차 노동자들이 통상임금 미지급분 중 2,500억 원을 내놓고 현대차그룹도 2,500억 원을 출연해 비정규직과 청년고용을 위한 기금을 조성하자는 것이다(현대차그룹은 단번에 이를 거부했다). 공공운수노조 역시 비슷한 목적으로 117일 공공상생연대기금을 출범시켰다. 박근혜 정부가 공공기관 성과연봉제를 강행하며 이를 독려하기 위해 지급한 인센티브 1,600억 원을 반납해 기금을 조성한 것이다(여기에서도 공공부문 사용자인 정부는 이 기금 조성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비정규직불법파견을 양산한 정부와 자본에 면죄부를 주는 한편 이에 저항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까지 꺾으며 연대를 파괴한다. 예컨대 문재인이 칭찬했던 금속노조 일자리기금의 이면을 보자. 지난 428일 금속노조 기아차지부는 비정규직 노조분리를 강행해 2,800명의 비정규직을 노조에서 쫓아냈다. 그 이유가 더 가관인데,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노조의 통제를 벗어나 사측에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투쟁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법원조차 현대기아차 사내하청이 불법파견이라고 판정했지만 기아차지부는 사내하청의 20%만 단계적으로 정규직 전환한다는 선별채용안을 사측과 합의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이를 거부하자 노조분리로 응답한 것이다. 이로부터 불과 2개월 뒤 기아차지부는 비정규직 처우개선을 위해 일자리기금을 조성하자는 기자회견의 전면에 섰다. ‘무리하게 정규직화를 요구하지 말고 정규직의 시혜에 만족하라는 메시지가 아니고 무엇인가?

 

계급적 연대를 파괴하는 사회연대전략

사회연대기금은 일회성 양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자금 갹출을 요한다. 금속노조가 제안한 5천억 원이든 공공운수노조의 1,600억 원이든 현재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 전환은커녕 안정적인 처우개선에도 턱없이 모자라는 액수다. 이 때문에 금속노조는 일자리기금의 실제 중심용도로 현행 고용보험의 사회안전망 기능 보완정도를 제시했고, 공공운수노조도 기금용처로 장학복지사업, 제도개선 연구 지원 수준을 제안했다. 정부와 자본 모두 기금조성에 동참하지 않았지만 설령 일정액을 내놓는다 하더라도 기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규직 노동자들의 주머니에서 계속 돈을 꺼낼 수밖에 없다.

결국 사회연대기금은 장기 지속한다면 스웨덴식 연대임금전략으로 귀결한다. 구체적인 방식은 다르지만 상대적 고임금 노동자의 임금수준을 낮춤으로써 저임금 노동자의 임금상승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스웨덴 연대임금전략은 1940년대 후반 전반적인 임금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도입했던 것으로 주로 대기업 노동자들의 임금을 정체시키는 효과를 낳았으며 그만큼 대기업의 높은 이윤을 보장해주었다. 반면 연대임금 수준을 지불하지 못하는 기업들은 파산하게 함으로써 구조조정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노동자들은 노조 상급기관의 통제를 거부하고 살쾡이 파업을 전개했다.

정부가 기간제법파견법 자체를 폐지할 의사가 전혀 없으며 자본은 불법파견조차 개의치 않는 상황을 타개하지 못하면 정규직 노동자들은 지속적인 임금양보를 강요받을 것이다. 더군다나 문재인 정부가 근로기준법 개악을 통해 휴일수당을 삭감하고 나아가 직무급제 개편으로 임금체계 자체를 개악하려는 지금, 문제의 근원은 손대지도 못한 채 정규직에게 양보를 요구한다면 어떻게 될까. 정규직 노동자들은 임금삭감 압력 속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적대시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차별의 원인이 정규직 기득권 때문이라고 원망하는 계급 내 갈등을 확대재생산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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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사회적 주도권을 향해

일각에서는 정규직노조가 비정규직과 연대해 투쟁하지 못하고 있으니 기금이라도 조성하는 게 무엇이 문제냐고 반문한다. 설령 정부와 자본이 기금조성에 호응하지 않더라도 정규직이 양보함으로써 계급적 단결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만약 그런 목적이라면 정규직노조가 비정규직 철폐를 위해 차라리 투쟁기금을 조성하면 된다. 사회연대기금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연대해 투쟁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 투쟁이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단정하고 정부와 자본의 협조를 기대하며 약간의 시혜로 처우개선을 보조하겠다는 기만책이다. 여기서 웃는 것은 마음 놓고 비정규직을 그대로 쥐어짤 수 있게 된 정부와 자본이다.

문재인 정부에 기대하는 사람들은 정규직노조가 적극 양보하면서 새 정부와 협조해 사회적 주도권을 쥐고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이름뿐인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내세워 임금삭감과 노동법 개악, 직무급제를 통한 차별심화까지 준비하고 있다. 정부와의 협조는 노동운동에 주도권을 주기는커녕 끌려다닐 것을 강요한다. 반면 학교에서, 철도지하철에서, 공항에서, 자동차공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투쟁하고 있다. 정규직노조가 사회적 고립에서 벗어나 노동자의 희망으로 스스로를 정립하고 사회적 주도권을 쥐는 길은 바로 이 투쟁들에 복무하여 함께 싸우는 것이다. 현장에서 저항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침묵하면서 밖으로 외치는 사회연대는 결국 자본과의 연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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