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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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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라는 억울하다.

하지만 브라질 민중에게

노동자당은 과연 어떤 의미인가?

 

정용경사회운동국장

 

브라질 당국이 부패혐의로 실형을 선고 받은

룰라 전 대통령의 재산에 대해 잇달아 동결 조치를 했다.


1980년 브라질 총파업을 이끌고 노동자당PT을 창당한 룰라가 법정에 섰다. 이는 상당히 오래간 준비된 노동자당을 향한 저격과 정치공작의 결과로 보인다. 2011, 오랜 집권당 노동자당의 지우마 후세프가 대통령이 되었다. 후세프는 과거 브라질 대형 석유회사 페트로브라스의 이사진을 지낸 이력이 있는데, 후세프의 재직 기간 내에 페트로브라스 내부에 부패와 돈세탁, 정경유착 등의 문제들이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검찰은 일명 세차 전략(라바 쟈또)이라고 불리는 부패 수사 과정에 착수했고, 후세프는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지만, 평소 노동자당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여러 목소리들이 이 사건을 계기로 터져 나와 대형 시위로 번졌고, 2016831일 후세프는 탄핵되었다.

201639, 룰라가 브라질 대형 석유회사 페트로브라스의 스캔들에 연루된 건설업체에게 해변가의 호화 아파트를 받아 한화 450억 원 상당의 돈세탁을 저질렀다는 뇌물혐의로 예비 검속 영장이 발부되었다. 이후 세차 전략의 부패 수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룰라의 자녀들도 일상적인 대화를 도청 당했고, 룰라 아들의 회사도 수사 물망에 올랐으며, 이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룰라의 아내도 사망했다.

룰라의 유죄 판결에 항의하는 노동자당 지지파의 목소리가 법원 내에서도 거리에서도 울려 퍼졌을 때, 검찰은 공공질서 위반 혐의를 임의로 얹어버리기까지 했다. 당시 룰라는 이 일련의 사태에 대해 나를 체포하면 나는 영웅이 될 것이다. 나를 죽이면 나는 순교자가 될 것이다. 나를 잡았다가 풀어주면 나는 대통령이 될 것이다라며 떳떳한 모습을 보였다. 룰라의 변호인단도 아파트 소유자 명의도 룰라가 아니며, 이렇게 근거 없는 사건은 정치적 모략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입장으로 일관했다.

2018124, 2심 재판에서 룰라 대통령은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로서 사실상 201810월로 예정되어 있는 브라질 대선 출마가 불가능해졌을 뿐 아니라, 96개월의 형이 확정되었고, 향후 20년간 정계 진출이 불가능해졌다. 룰라의 정치적 생명줄을 법적으로 끊어버린 것이다.

 

부패한 정치인과 엘리트의 적폐청산이라는 쇼

일각에서는 룰라의 법정 공방에 대해 천하의 룰라마저 기소될 정도로 브라질 내의 부패한 정치인과 엘리트의 적폐청산이 이어지고 있다라는 이야기들이 흘러나오고 있다. 여기에는 사실인 측면도 있고, 아닌 측면도 있다. 우선 룰라에 대한 공격들은 당위성이 없고, 룰라의 대선 출마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는 데에 대체적으로 브라질 내의 여론이 모아지고 있다. 반동 우파 정치세력은 민주정치적인 방식으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감지하고, 비정치적이고 비열한 방법(여론 조작, 뇌물 수수, 사법부 매수)을 이용하여 사실상의 쿠데타를 통해 노동자당의 지우마를 탄핵하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실제로 우파 정치인들인 에이치오 네웨스나 미셸 테메르는 노골적인 뇌물 알선과 횡령으로 인한 스캔들을 너무나 태연자약하고 공공연하게 몰고 다니는 데에 비해, 일부 우파 언론에서마저 증거 불충분을 외칠 정도로 조작된 룰라의 사건은 그만큼 터무니없는 것이다.

그러나 위기가 기회로 작용할 수 있는 측면도 있다. 전통적으로 브라질의 엘리트 계급은 끈끈한 유대감과 결속력을 자랑하며 강력한 반동의 흐름을 이어 왔다. 그런데 최근 노동자당을 공격하기 위해 이들이 이용한 일련의 정치적 도구로서의 부패 스캔들이 마치 부머랭처럼 돌아왔다. 브라질의 반동 우파는 결국 부패 스캔들이라는 정치적 무기를 잘못 휘두르다가 자신들 스스로의 발목을 잡아버리는 역설적인 상황을 자초한 것이다. 이런 상황은 엘리트층 내부의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 심지어 현행 대통령 테메르가 비밀리에 룰라와 접촉하려고 했던 정황마저 누설된 상태이다.

 

노동자당은 정말 브라질 노동자를 대변하는가?

룰라의 실형 선고 소식에 브라질 민중이 격노하며 거리로 나왔다. 정확히는 브라질 대중전선Frente Brasil Popular: FBP, 무토지 농민운동Movimento dos Trabalhadores Sem Terra: MST, 전국학생연대União Nacional dos Estudantes: UNE, 브라질 노총Central Única dos Trabalhadores: CUT이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룰라의 기소 단계에서부터 사법부를 규탄하는 공동행동을 벌였다. UNE의 부위원장 제시 다얀은 룰라의 재판이 진행된 브라질 남부 도시 뽀르또 알레그레에 70개 넘는 단위들을 불러모은 124일의 대규모 시위에 대해 브라질에서 벌어지고 있는 자본세력의 쿠데타와 정치화된 방식으로 룰라의 대선 출마를 무력화하려는 공작에 맞서기 위해 브라질 민중을 조직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룰라의 대선출마가 사실상 불가해지면서 노동자당 지지자들은 불복종 장외철야투쟁을 법정 앞에서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제아무리 룰라의 유죄판결이 정치적 공작을 위한 우편향 사법부의 술수였다 해도, 노동자당은 무결한 희생자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빈민과, 무토지 농민과, 노동자 민중의 힘으로, 유례없이 쟁취한 브라질 민주주의의 전위에 섰던 룰라는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속 한 줄기 빛이었다. 그러나 룰라는 이어 무참한 아마존 개발을 진행했고, 원주민을 몰살시키는 연방군부의 행태를 묵인했고, 신자유주의적 자유무역을 감행했다.

룰라는 2003년부터 2010년까지 대통령직을 연임하면서 보우사 파밀리아bolsa familia라는 과감한 재분배 정책을 통해 사실상 브라질의 부의 양극화를 대거 축소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이전의 사회복지망을 확대하여 인구의 26%에 달하던 극빈층을 중산층의 밑단으로 끌어올린 결과를 낳았을 뿐이었다. 룰라는 국가부채를 1/5가량으로 줄이는 과정에서 세계적 경제 호황에 편승하는 등, 임기 이전부터 이어져왔던 개발지상주의적인 정책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중국으로의 석유, 목재, 철광석 등 원자재 수출에만 열을 올렸고, 그 결과 브라질 내의 전자산업이나 조선산업, 내수산업 등 다른 영역은 오히려 고전하게 되었다. 결국 브라질 경제구조의 고질적 악폐들은 더더욱 악화되었다. 이처럼 때로는 공산주의자로, 때로는 온건중도좌파개혁주의자로, 때로는 사회자유주의자로, 때로는 신자유주의자로 보이는 행보를 필요에 따라 이어가다가 대형 석유 회사의 이사진이었던 지우마 후세프를 후임자로 정한 것이 그의 말로였던 것 아닐까.

 

신화는 신화로 남아야 한다

1980년 상파울루의 학교 강당에 모인 도시 빈민들, 전직 게릴라들, 해방신학 신부들, 그리고 금속노동자 300명이 룰라를 당 대표로 선출했다. 35세의 청년이 허름한 청바지 차림으로 강당 연단에 올랐다. 룰라였다. “당신은 마르크스주의자입니까? 사민주의자입니까?” 라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이 답변으로 일관했다. “저는 선반공입니다.”

우리를 이 룰라를 기억하며, 브라질 사법부를 향해 분노할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까움이 전부여서는 안 된다. 룰라는 계급적 정체성을 져버린 대가로 두루뭉술한 인기를 얻었다. 자본가들에게도 예쁨 받고 좌파에게도 신화를 제공했던 룰라와 노동자당은 지금 정치적 중상모략으로 허덕이고 있다. 브라질 민중이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기 위해 투쟁을 이어간다 할지라도, 노동자당은 다시 노동자의 곁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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